연변일보

광주봉기 교도퇀의 포병지휘관 리빈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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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광주봉기렬사릉원의 ‘중조인민혈의정’.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1927년 12월 광주봉기에 참가한 200여명 조선인들중에는 남달리 용맹과 슬기를 떨친 이름난 조선인혁명가 리빈이 있다. 황포군관학교 관련 자료에 따르면 리빈(李彬, 1902ㅡ1928)은 함경북도 사람으로 알려진다.

륙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사료》 (광동혁명력사박물관 편, 황포군관학교사료, 1982년)에 의하면 리빈은 제3기생으로 나타난다. 조선사람 측과 황포군관학교측 관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절의 제1기생(1924.6—1924.12)과 제2기생(1925.1—1925.6) 가운데서는 조선인 학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제3기(1925.6—1926.1)부터 리빈, 차정신, 장성철, 류철선 등 4명이 흔적을 보이다가 제4기(1926.6—1927.1)부터 많은 흔적을 보인다. 리빈이 제3기생으로 출현한 것은 비교적 빠른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후 리빈은 제4기 정치과 학생대대 구대장(区队长)으로 활동한다. 그는 여러가지 군사기능을 소유한 뛰여난 포병전문가로서 광주봉기에 앞서  1925년 2월에 동정군 정치부주임 주은래가 인솔한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에 참가하여 광동의 혜주, 조주, 산두 등지에 도사린 채 국민혁명군을 위협하는 반동군벌 진형명(陈炯明)을 소탕하는 제1차 동정(东征)에서  선참 용맹을 떨치였다. 그해 6월에는 또 주은래의 지도하에서 운남군벌 양희문(杨希闵)과 광서군벌 류진환(刘震寰)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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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봉기렬사릉원내 광주봉기렬사묘.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1926년 7월부터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 인민군중의 지지 밑에서 국민혁명군 8개군 약 10만명 대오는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 북벌군으로 나뉘여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 손전방의 수십만명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 땅을 점령하였다. 1927년 1월 광주의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옮겨갔다. 혁명세력은 주강 령역으로부터 장강, 황하류역에로 발전하였다. 이 위대한 북벌전쟁에 리빈도 참가하였으련만 아직 리빈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1927년 12월초, 광주봉기를 앞두고 중공광동성위 서기 장태뢰는 광주시 황화강에서 교도퇀내 공산당원회의를 열고 무장봉기의 의의와 교도퇀이 짊어져야 할 과업에 대해서 전문연설을 하였다. 리빈은 양달부, 김규광, 리용, 박영, 김은혁 등 수십명 조선인공산당원들과 함께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12월 11일 새날 2시경에 장태뢰(张太雷), 엽정(叶挺) 등 광주봉기 주요지도자들이 광주 북교창 사표영(北较场四标营)의 교도퇀주둔지에서 봉기동원과 전투과업 포치를 할 때 조선인 명포수로 알려진 리빈은 봉기총지휘부로부터 교도퇀의 포병지휘관으로 임명되여  북부전선 경계과업을 맡아나섰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북부전선을 맡아나선 리빈은 한패의 소분대를 지휘하여 적들의 광주비행장을 습격하였다. 광주비행장에는 비행기 10대가 있었는데 쓸만한 비행기는 5대로 헤아려졌다. 하지만 봉기군측에서는 일순 비행기조종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리빈은 과단성 있게 명령을 내려 비행장의 비행기들을 전부 파괴해 페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소부대를 이끌고 지체없이 병기공장으로 달려갔다.

광주봉기 참가자 김산은  그때 병기공장엔 성이 리씨인 조선인 하급사관 한명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리씨는 봉기전야에 당의 파견을 받고 병기공장에 침투한 조선인혁명가로서 광주봉기가 터지자 자기 주위에 뭉친 여러 사람들과 같이 비밀리에 병기공장측 완고분자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병기공장을 지키던 2개 중대 전부를 봉기군에 가담시킨 쾌거를 이뤄냈다. 리빈이 지휘한 봉기부대는 말그대로 총 한방 쏘지 않고 병기공장을 장악하였다.

12월 11일 오전까지 리빈과 그가 지휘한 소속 봉기부대는 북부전선 경계과업을 뛰여나게 완수하였다. 이날 오후 리빈은 봉기총지휘부로부터 다른 봉기부대와 더불어 남부 주강기슭의 적을 타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장제(长堤)로 방향을 돌리였다. 이와 비슷한 때에  조선인 포병총지휘 양달부도 포병련을 지휘하여 관음산의 적 거점을 빼앗고 그곳에서 적 제4군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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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년 중국의 첫 쏘베트정권ㅡ해륙풍쏘베트정권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해풍현 현지에 세워진 붉은 광장 대문. (사진자료)

그때 장제에서는 광주경위퇀 퇀장 량병추(梁秉枢)가 경위퇀의 혁명적 장병들을 지휘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공산당원 량병추는 공산당원들이고 조선인혁명가들인 김형평과 손문적 등 많은 장병들을 이끌고 부대내의 국민당 완고분자들을 처단하고 봉기부대에 가담한 터였다. 조선인혁명가이고 공산당원들인 김빈현과 민승재도 광주경위퇀의 장교였다.

그러나 주강이북의 장제에는  장발규의 제4군 사령부가 의연히 둥지를 틀고 있었다. 양달부가 소속부대를 령솔하여  적4군 사령부로 가니 리빈도 한창  장제부근에서 싸우는중이였다. 리빈과 양달부  여러 조선인 포병전문가들이 인차 한자리에 모이고 적4군 사령부를 포격하려고 서둘렀다. 그들은 관음산에 대포를 걸어놓고 양달부가 포를 조준, 발포하였다. 포탄은 적사령부 부근을 들부셨지만 적들의 사수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날 밤 봉기군지휘부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리고 엽정 군사총지휘가 12일 새벽부터 주강북안의 적을 철저히 제거하는 한편 주강남안의 적을 공격하기로 선포하였다. 장발규, 진공박, 황기상 등은 주강남안의 리복림을 사촉하여 봉기군을 진압하려고 날뛰고 광주주둔  영국, 일본 함대도 구실을 대여 봉기진압에 나섰다.

12일 아침, 주강에 정박하고 있던 제국주의 군함들이 봉기군 진지에 함포사격을 개시하였다. 일본 군함 두척은 살기등등하게 발포하면서 부대상륙을 서둘고 있었다. 리빈 등 조선인장병들은 일제놈들에 대한  분노로 가슴을 불태웠다. 리빈은 작전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포를 끌어오더니 자기가 직접 일본군함을 조준하고 포사격을 안기였다. 적함 야마모도(山本)호는 명중되여 검은 연기를 뿜으며 패주하였다.

봉기군은 제국주의 군함과 일대 격전을 벌리였다. 양달부와 여러 조선인장병들이 달려와 힘을 합치였다. 그들이 포 세방을 안기자 적함의 연통 세개가 박살났다. 적함은 더는 으시대지 못하고 역시 패주하고 말았다. 관음산의 장발규사령부도 사수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경위퇀의 조선인장병들은 이발을 앙다물었다. 교도퇀의 장병들이 달려와 힘을 합친 덕분에 제4군사령부의 요인들은 배를 타고 줄행랑을 놓았고 관음산전투도 역시 봉기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리빈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 정치과 학생대대 구대장(区队长)이였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위대한 광주봉기에서는 광주봉기의 주력부대로 등장한 교도퇀의 포병지휘관이였다. 이런 리빈을 두고 김산이 구술하고 미국의 녀작가 님 윌즈의 집필로 된 《아리랑의 노래》에서는 리빈이 12월 “12일에 사면부근에서 일본포함과 교전하던중 스물다섯살  꽃나이로 전사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리빈의 생졸년은 1902-1927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김산은 리빈의 희생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 광주봉기 후 해륙풍투쟁 시절에 리빈이 등장한 력사자료가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1927년 12월 11일 위대한 광주봉기는 적들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력사적 현실 앞에서 결국 실패하고 봉기군은 명령에 의해 해륙풍쏘베트쪽으로 전이하게 된다. 해륙풍은 광동의 해풍현과 륙풍현의 략칭으로서 이곳에는 중국공산당의 이름난 농민운동가 팽배(澎拜) 등이 지도하는 해륙풍쏘베트가 활동하고 있었다. 해륙풍에 이른 리빈 등 광주봉기 참가자 1200여명은 홍군 제4사로 개편되고 교도퇀 지휘관 엽용이 제4사 사장으로, 조선인 오성륜(전광)이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해륙풍에 도착한 이튿날 해륙풍쏘베트의 수천명 혁명군중들은 중국사람들과 같이 싸우고 있는 양달부, 오성륜, 김산, 리빈 등 조선사람들을 경탄한 나머지 성대한 ‘조선인동지환영회’(朝鲜人同志欢迎会)를 열고 뜨겁게 맞아주었다. 이어 10여명중 일부는 해륙풍쏘베트에서 꾸린 당학교 교관과 교원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바이두(百度)를 검색하면 관련 자료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해륙풍쏘베트정원의 수립과 그 의의>(海陆丰苏维埃政权的成立及其意义)라는 글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정부에서 돈을 대여 동강당학교(东江党校)를 꾸리고 현성의 관음당에 자리잡았다. 당학교내에 학교관리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에 교무처와 경리처를 두었다. 학교관리위원회는 장북성(张北星, 조선인), 함성(咸声, 조선인), 류금한(刘锦汉,  서기)이 맡았다. 교관들로는 로씨야홍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량도부(梁道夫, 조선인), 김병현 (金秉铉, 조선인), 리점양(李点阳, 조선인)이고 교원은 정지운(郑志云), 륙정일(陆定一), 리빈(조선인), 진적화(陈赤华, 절강인) 등이다.”

또 한편의 글은 이와 조금 다르다. 엽량방의 서명으로 된 <해륙풍혁명근거지와 후방기지>라는 글에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28년 1월 19일, 동강특위(东特委)는 해풍현성 홍도야지에 중공동강당교를 꾸리고 쏘련홍군군관학교 졸업생들인 량도부, 김병현, 함성, 리빈, 리점양, 장북성(모두가 조선인) 및 륙정일, 류금한, 종지운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군사학 등 내용을 가르치며 중공당정군 인재를 양성하였다. 학기는 1개월 시간이고 학생들은 동강 각 현 농민운동 골간 100명이였다. 중공동강당학교를 나온 이런 졸업생들은 후에 모두 여러 혁명근거지의 군사골간으로 성장하여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기여하였다.”

엽량방의 이 글은 동강당학교의 교관과 교원을 나누지 않고 량도부(즉 양달부), 리빈 등 모두가 조선인이였다고 쓰고 있다. 똑똑히 밝혀지는 것은 조선혁명가 양달부 등과 더불어 리빈이 해륙풍쏘베트 동강당학교 교원이라는 점이다. 1928년 1월로 나타나는 <동강당학교에 대한 고헌장의 일기초록>(古宪章关于东江党校的日记摘抄)에는 로씨야 홍군군관학교 졸업생들인 조선인 양달부, 김병현, 김점양이 교관이고 함성, 장북성, 리빈 등은 학교관리위원회 성원으로 알려진다. 어찌했든 리빈이 해륙풍쏘베트로 전이했고, 근거지내 동강당학교 교관이든지, 교원으로 근무했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적들은 해륙풍쏘베트근거지의 발랄한 발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28년초 이후 리복림, 리제심 등이 지휘하는 광동의 적 10여만명 병력이 해륙풍을 포위하다가 드디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해륙풍쏘베트근거지에는 홍군 제2사의 1000여명과 홍군 제4사의 2000여명, 로농혁명군과 농민적위대 등 1만여명 무장대오가 있었다. <아리랑의 노래>에 보이는 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교도퇀이 다시 전선으로 나갈 때 조선사람들중에서 오성륜과 나만이 후방에 남아있도록 위탁받았다.”

나머지 조선혁명가들은 홍군부대에 소속되여 전선으로 달려갔으며  1월부터 5월 3일까지 선후 다섯차례의 치렬한 전투를 벌리였다. 나중에 해륙풍근거지는 적들에게 점령되고 김산, 오성륜 등은 포위돌파에 성공하였지만 최전선에서 적들과 판가리싸움을 벌리던 여러 조선혁명가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리빈, 양달부 등에 관련한 자료는 이것이 전부이다. 보이는 자료는 해륙풍쏘베트근거지 동강당학교 교관, 교원에 대한 상기 자료들 뿐이다. 그후 리빈에 대한 그 어떤 자료도 보이지 않는걸로 보아, 광주봉기에서 전사하였다는 김산의 회고로 보아 5차례 해륙풍근거지 보위전에서 영영 쓰러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산은 1928년 5월 3일 마지막 반격을 앞둔 일주일 전에 제2사와 제4사의 살아남은 병사들이 대회를 가지였는데 대회 출석자는 겨우 600명으로서 홍군병사는 400명 뿐이였다고 회상하였다. 이에 앞서 김산은 리빈을 “우리 가운데서의 가장 우수한 당원이였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희생을 슬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