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진광화 석정의 장렬한 최후 (1)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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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화 렬사 사진. (사진자료)

1942년 5월, 일본침략군은 팔로군이 활동하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대해 전례 없는 진공을 들이댔다. 이른바 ‘C호작전계획’이라고 일컫는 ‘5월소탕’인데 적들의 주요목표는 태항산항일근거지의 팔로군전선총부를 일거에 소멸하는 것이였다. 무려 2만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었다.

“쿵쿵쿵…”

적들의 포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그날은  5월 24일이였다. 태항산항일근거지의 군민들은 팔로군총부를 따라 후방으로 전이하였다. 조선의용대 100여명 전투원들과 40여명의 비전투원들은 주둔지인 정든 동욕진 상무촌(桐峪镇上武村)과 마전진 운두저촌(麻田镇云头底村)을 떠나야만 하였다. 그들 100여명이 속한 대오는 팔로군총부 정치부 주임 라서경이 인솔하였는데 팔로군 무장대오라야 두개 소대의 경위부대 뿐이였다.

그외는 총부 정치부, 후근부, 위생부 등 각 기관의 일군들을 망라한 방송사업일군들, 문공단 배우들, 로신예술학교 사생들 등 비무장 전투원들이였다. 이런 험악한 형편 속에서도 팔로군 팽덕회 부총사령은 국제주의전사들인 조선동지들을 지극히 아끼면서 그들을 가렬처절한 싸움터에 내세우지 않고 행군대오의 뒤에서 움직이게 하였다. 팽부총사령의 육친의 정은 조선동지들의 마음을 덥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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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렬사 사진. (사진자료)

5월 25일 점심, 이들 대오가 요문구(窑门口) 산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서남쪽 산너머에서 3000여명의 일본군이 우르르 덮쳐들었다. 적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와 부총참모장 좌권이 인솔한 팔로군전선총지휘부, 중공북방국위 기관 및 그 산하 여러 기관과 단체의 인원들이 집결해있는 요문구와 북애포(北艾铺)는 삽시에 불바다로 되였다. 두개 소대의 경위부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더는 뒤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朴孝三) 지대장이 라서경(罗瑞卿) 주임한테로 달려가 팔로군 전우들과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청들었다. 라서경은 이윽토록 박지대장을 지켜보다가 그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더니 생사를 같이하자며 팔로군 경위부대는 서쪽에서, 조선의용대는 동쪽에서 적을 막아 싸우라고 명령했다.

팔로군 경위부대와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동서로 나뉘여 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우며 혈로를 헤치였다. 중앙군관학교 출신인 조선인 문명철(文明哲)은 하나밖에 없는 경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무리로 쓰러눕혔다. 적기까지 날아와 기총소사를 들이대도 조선동지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팽덕회 부총사령과 팔로군총부를 목숨으로 지켜싸웠다. 이와 더불어 비전투원들은 북쪽 산으로 치달았다. 어둠이 깃들어서야 적들은 진공을 멈추었다. 그사이 아군은 적진을 헤치고 나갔고 진광화와 석정을 비롯한 조선인 수십명 비전투원들은 전투원들과 헤여져 행동하게 되였다.

본문의 주인공들인 진광화와 석정을 보면 진광화의 원명은 김창화(金昌华)이고 1911년생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평천리(大同郡古平面平川里)사람으로 알려진다. 1925년에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1931년에  중국 남경의 오주(五州)중학 고중반에 진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다가 1933년 8월에 광주 중산대학 문학원 교육학부에 입학하였다.

중산대학 재학기간 중산대학 학생당지부 서기로 활약했고 1935년 광주 12.12학생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1938년에 화북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한 뒤 중국공산당 북방국 진기로예변구 항일근거지에서 선후하여 변구 당교의 교무과장, 조직과장 겸 당총지 서기,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주석,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정치위원을 력임하였다.

석정(石鼎)은 원명이 윤세주(尹世胄)이고 1900년생이며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사람이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사립동화학교, 서울 오성중학교, 중국 통화현 하니하 신흥무관학교,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혁명학교  등을 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1938년 10월에 한구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건을 주도하고 선후하여 조선의용대 정치조장, 《전고(战鼓)》 주필, 조선의용대 1, 3혼성지대 정치위원, 화북조선청년간부학교 교관을 력임하였다.

진광화와 석정은 조선의용대 주요 지도자들이고 항일혁명가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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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섭현 석문촌 가까이 련화산기슭에 위치한 진광화, 석정 묘소.

1942년 5월 27일 동틀무렵, 우리 대오는 하청구에 이르렀다. 련 이틀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밥 한숟가락 먹어보지 못한 동지들은 모진 허기증과 갈증에 시달렸다. 기진한 녀성들은 말꼬리를 엇갈아 쥐고서야 겨우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적들이 집요하게 뒤를 쫓고 있어서 적들의 포위망을 헤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 어려운 나날 5월 26일 먼동이 틀 무렵, 멀리 연안 조원의 움집에서 모택동은 초조한 심정을 억누를 길 없었다. 5월 25일 팔로군 129사의 보고에 의하면 팔로군총부가 적의 습격을 받고 북방국의 기관인원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포위를 헤치였는데 총부의 무전기가 중단되여 그 형편을 알 수가 없었다.

모택동은 벌써 옹근 낮과 밤을 눈 한번 붙여보지 못했다. 27일 밤에도 잠들 수가 없었다. 만약 팔로군총부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느덧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이때 129사 류백승부대에서 팽덕회가 부대를 이끌고 석회요(石灰窑) 서북방향에서 포위를 헤치였고 좌권이 포위돌파중 장렬히 희생, 라서경 등 동지들이 흑룡동(黑龙洞) 방향에서 포위를 헤쳤으나 또 적들과 조우하게 되였다는 전보가 왔다.

모택동은 금방 온 전보문을 갖고 주덕을 찾았다. 두 로전우의 얼굴에서는 더없는 초조와 불안이 비끼였다. 하나 팽덕회가 있는 한 총부가 있고 총부가 있는 한 태항산항일근거지가 엄연히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었다.

그 시각도 100여명의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목숨을 내걸고 팽덕회 부총사령과  팔로군총부를 지켜 싸우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하청구에 이른 후 라서경은 긴급회의를 열고 아군의 전체 비전투원들은 분산하여 각기 행동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선인 40여명 비전투원들은 한밤중에 화옥산(花玉山)에 이르렀다가 또 4개 분조로 갈라졌다.

진광화, 석정, 최채 등이 소속한 분조는 녀성도 몇명 있었는데 그들 수중의 무기라야 고작 권총 한자루와 수류탄 몇개 뿐이였다. 날샐녘에 그들은 한 산비탈의 관목림에 숨었다가 100여명의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진광화는 숲속의 동지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석정, 최채 두 동지를 보고 셋이서 적들의 주의력을 딴데로 끌자고 하였다.

그들 셋은 숲속에서 나와 산비탈을 따라 죽기내기로 달렸다. 진광화의 지시에 따라 그들 셋은 또 세갈래로 흩어져 뛰면서 적의 화력을 분산시켰다. 찰나 진광화와 석정이 부동한 지점에서 각각 다리에 부상을 입으면서 더 뛸 수 없게 되였다. 진광화는 적들의 시선을 벼랑가에로 끌었다. 적들이 거의 다가들 무렵 진광화는 주저없이 벼랑에 훌쩍 몸을 던졌다.

적들이 진광화에게로 쏠리는 그 사이 석정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기여서 벼랑 사이에 몸을 숨기였다. 우리 글로 된 석정전기에는 “적들이 퇴각한 후 동지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희생되였다.”라고 씌여있지만 중문으로 된 연구자료는 이와 전혀 다르다. 청산간객(清山涧客) 블로그의 <태항아리랑 조선의용군의 이야기>라는 글에는 상영생(尚荣生)의 텔레비죤 특별프로 해설자가 있는데 시간은 2007년 4월 2일로 되여있다. 그 해설자의 한 단락이 무척 주의를 끄당긴다.

“우리는 몇번이나 조선의용군 지도자 석정, 진광화 등이 희생된 장자령(庄子岭)에 올랐다. 산 우에는 지금도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상병자들이 들어있던 산굴이 있다. 그때 석정은 포위돌파를 지휘할 때 몸에 중상을 입었는데 피가 멈추지 않았다. 전우들은 그를 장자령의 한 산굴에 숨기였지만 사흘이 지나 피를 너무 흘린 탓으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2007년 그 시절 상영생은 태항산 련화산자락에 있는 섭현 석문촌(石门村) 가까이에 자리한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 관장으로 알려진다. 상영생의 이 텔레비죤 특별프로 해설자로 보아 석정이 희생될 때 석정 한 사람 뿐이 아니였다. 해설자에 따르면 1942년 5월 반‘소탕’의 나날, 장자령에는 ‘팔로군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리재청(李才清) 녀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남편과 아들들과 함께 목숨도 마다하고 수십명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상병자들을 한명 한명 장자령의 산굴에 옮겨 보살피였다. 석정도 그가 보살핀 조선의용군 상병자의 한 사람으로 헤아려진다.

이 해설자의 저자인 상영생은 중국항일전쟁과 세계반파쇼전쟁 승리 60돐이 되는 해 2005년 여름, 한국손님들을 안내하여 장자령 산허리에 거주하는 리재청의 곽씨댁 옛집을 찾았다. 옛집 뜨락에는 100여년의 수령을 가진 호두나무와 버드나무 두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들을 맞아준 이는 리재청의 손자 곽수홰(郭树槐)였다. 곽수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숙박한 방 뜨락에는 할머니 리재청이 무척 즐기며 아끼는 무궁화(木槿花) 두그루가 있다고 하였다.

무궁화라면 한국의 국화가 아닌가?! 흥분된 상영생 일행이 두그루 무궁화나무를 찾으니 무궁화나무는 꽃핀 상태로 푸르싱싱한 모습 그대로였다. 할머니가 왜서 무궁화 두그루를 심었는가고 물으니 곽수홰는 모르겠다면서 당년 조선의용군 상병자들이 이 집에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동을 달았다. 참으로 무궁화 두그루에 깃든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그 후 한패 또 한패의 한국손님들이 해발 1700여메터의 이곳 태항산 장자령에 올라 진광화와 석정의 희생지를 찾아보았다고 해설자는 말하고 있다. 해설자는 한국의 관련 자료를 인용하면서 석정, 윤세주 렬사가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일 때 <밀양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태항산 장자령 흑룡동에서 윤세주 렬사가 생전에 좋아하던 고향노래 <밀양아리랑>을 느린 곡조로 불렀다고 한다.

석정이 장자령의 한 산굴에서 사경을 헤매일 때 잊지 못할 이들은 그의 동지들과 당지 녀인 리재청이다. 리재청(李才清, 1902—1989)은 하북성 섭현 청탑향 대암촌(涉县青塔乡大岩村)사람이고 17세 때 이 고장 대암촌 장자령(庄子岭) 곽씨댁으로 시집왔다. 남편은 곽사례(郭思礼)였다. 장자령은 대암촌 뒤 4~5리 되는 곳에 위치한 높은 산으로 기암괴석과 수풀이 우거졌다. 곽씨댁은 이런 고장에 외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1942년에 리재청은 40세였다. 이해 5월에 일본침략군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달려들 때 리재청은 한패의 팔로군 부상자들과 행동거지가 불편한 녀성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장자령의 여러 산굴에 숨기였다. 그날 밤으로 팔로군 후근부대에서 숱한 근거지 지페(钞票)들과 은기물(银器), 군복, 약품들을 가져오자 리재청은 온가족을 동원하여 사처에 잘 숨겨두었다. 지페를 숨긴 자리만 해도 서른두곳에 달했다.

그때 팔로군 부상자들과 관련 동지 50여명은 장자령의 크고 작은 동굴에 은페하고 있었다. 그들을 돌보는 일은 리재청과 그들 가족의 몫이였다. 리재청은 낮이면 적들의 수색을 피해있다가 밤이면 남편과 함께  때시걱을 마련하여서는 어둠 속 바위와 수풀을 헤치면서 우리 동지들에게 날라갔다. 그렇게 20여일 내내 견지하였다. 그 속에는 석정과 그의 동지들도 섞여있었다. 적들이 물러간 후  팔로군의 후근물자 전부가 주인한테로 돌아가고 리재청은 40여년간이나 이 사실을 누구한테도 꺼내지 않았다. 1985년에 섭현에서 당사자료를 수집할 때에야 그의 사적이 알려지면서 ‘팔로군의 어머니’로 불리였다.

이로부터 보면 우리 동지들이 석정을 발견했을 때 이미 희생된 것이 아니라 동지들과 리재청 가족에 의해 장자령의 한 산굴에 옮겨져 보살핌을 받았고 사경을 헤매일 때 곁의 동지더러 <밀양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하였으며 사흘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헤아릴 수 있다. 중상으로 인해 피를 너무 많이 흘렸지만 의료조건이 전혀 따르지 못하니 동지들이나 리재청네가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