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진광화 석정의 장렬한 최후 (2)

2022-04-24

하북성 한단시 릉원로 진기로예렬사릉원 북원의 진광화 렬사 묘소. (2009년 8월 17일 현지촬영)

1942년 5월로 다시 돌아가면, 5월 27일 밤에 포위를 헤친 팔로군총부와 북방국의 인원들은 소남산(小南山)림에 모이였다. 팽덕회가 밀탈곡장에서 동지들을 한명한명 점검해보니 부총참모장 좌권과 진광화, 석정 등 수십명의 동지들이 장렬히 희생되였었다. 모두가 비통에 잠기였다. 이때 팽덕회가 동지들을 돌아보며 짙은 호남말씨로 입을 열었다.

“동지들, 우리 모두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르고 참모장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희생된 전우-조선동지들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비참하게 죽은 동포들을 위하여 복수합시다!”

이어 팔로군총부와 당중앙과의 련계가 이어지고 내외협공으로 적들의 ‘5월대소탕’을 물리쳤다. 이번 반‘소탕’에서 조선동지들은 팽덕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팔로군부대와 어깨겯고 싸우면서 목숨으로 팔로군총부와 근거지를 지켜냈다. 했으나 팽덕회의 심정은 무겁기만 하였다. 팔로군총부와 북방국에 대한 적들의 습격으로 하여 좌권과 진광화, 석정 등 수십명 동지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는데 이는 항전이 시작된 이래 팔로군수뇌기관과 조선의용대가 당한 가장 큰 손실이였다. 조선의용대 전우들이 아니였더면 팔로군총부의 안전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팽덕회 부총사령은 반‘소탕’에서의 조선동지들의 역할과 희생을 여실히 당중앙에 보고하면서 조선동지들을 보호할 데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조선동지들을 아낄 데 대한 당중앙의 지시가 전달되였다. 그때부터 조선의용대전사들은 당중앙과 팔로군총부의 배려로 직접적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정력을 집중하여 군사훈련과 정치문화학습에 몰두하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팽덕회는 팔로군 야전정치부에 지시하여 중공중앙 북방국과 18집단군 야전정치부의 명의로 조선의용대 렬사기념방법을 전문 규정하게 하였다. 팽덕회 부총사령의 지시에 좇아 팔로군총부와 변구당조직에서는 태항산근거지군민들에게 통지를 내여 피어린 항전에서 영용히 희생된 진광화, 석정 등 10여명 조선의용대 렬사들의 영웅업적을 널리 학습할 것을 호소하였다.

하북성 한단시 릉원로 진기로예렬사릉원 남원의 석정 묘소. (2009년 8월 17일 현지촬영)

한편 팽덕회는 당중앙에 청시하여 팔로군포병퇀 퇀장이며 조선사람인 무정을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 팽덕회는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연안으로 돌아간 후 태항산근거지와 화북 적후싸움터의 당, 정, 군, 민의 중책을 한몸에 짊어지고 있었다.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팽덕회의 청시에 따라 팔로군부대의 포병퇀 퇀장으로 있던 무정을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무정은 1942년 8월에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활동지대를 옮기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용대는 원 주둔지와 활동지들인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과 마전진 운두저촌(云头底村)을 떠나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섭현 섭성진 중원촌(일명 곡원촌-曲原村)으로 활동지대를 옮기였다. 1942년 여름에 이르러 1938년 10월 10일 한구에서 건립된 조선의용대의 북상이 기본상 끝났다. 이해 7월 중순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중원촌 주둔지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가지고 본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개편된 조선의용군은 팔로군의 통일지휘하에 태항산근거지에 본부를 두고 화북 각지에 지대를 두었다.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정식부임한 곳은 태항산근거지내 하북성 섭현 중원촌으로 알려진다. 2009년 8월 20일, 필자는 무정과 무정 소속 조선의용군의 발자취를 좇아 하북-산서 접경지대의 하북성 섭현 중원촌을 처음 찾았다. 중원촌은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태항산항일근거지의 한 마을로서 섭현 현성에서 청장하(清漳河)를 따라 서쪽으로 5킬로메터 떨어진 청장하기슭의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원촌 마을에 들어서니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촌사무실로 보이는 단층집의 대문가에 달린 섭성진 중원촌 (涉城镇中原村) 지부위원회와 촌민위윈회 간판이다. 마침내 당년 조선의용군이 활동한 태항산항일근거지 심장지대에 들어서고 중원촌의 사람들은 멀리 동북땅에서 온 이 조선족남자를 열성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지난 세기 40년대 초반 우리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원정사(元定寺)를 찾으니 원정사는 옛 모습 그대로, 마을의 제일 높은 지대로 보이는 언덕 우 색바랜 낡은 단층집으로 시야에 안겨들었다. 사합원(四合院) 형태를 이룬 원정사 단층집 바깥은 담장모양으로 담장벽을 이루고 대문에 들어서면 네면이 모두 각이한 건축구조를 가진 여러 채의 회색벽돌집으로 둘러있었다.

마을의 안로인 몇분이 원정사내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필자가 동북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무척 반기면서 이 원정사가 당신들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중심부라면서 무척 반기였다. 중원촌의 안로인들과 대문가 세멘트로 된 표지석에는 한단시 문물보호단위 완정사(邯郸市文物保护单位完定寺)로 되고 대문 바로 우에는 원정사(元定寺)로 나타나니 웬일인가고 물었다. 그들은 너나없이 이 옛절은 조선의용군이 활동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원정사로 통한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진기로예렬사릉원 내 렬사기념당 진광화 석정 전시 부분. (2009년 8월 17일 현지촬영)

필자는 당년 우리 겨레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한 태항산의 중원촌에 서 있었다. 당금이라도 무정이며 정률성이며 환히 웃는 모습으로 대문가에 들어서는 것 같았고 <아리랑>노래를 부르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웃고 떠들며 즐기는 것만 같았다. 1942년 8월, 무정장군을 따라 연안을 떠난 정률성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처음 들어선 곳이 이곳 중원촌 원정사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그 시절 중원촌 원정사는 많이는 학교 교실로 리용되고 넘쳐나는 주숙지는 흔히 주변의 민가에 잡았다. 필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원정사 주변에서 당년 조선동지들이 머무른 민가 여러채를 찾았다. 민가 주인들은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주숙한 적이 있는 한단락 력사를 집의 자랑으로, 마을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원정사내에서 휴식하던 마을의 안로인들은 더구나 그러하였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중 한 안로인은 무정사령원을 알고 있다면서 엄지를 내들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였다.

섭현의 중원촌은 팔로군 129사 사령부가 자리잡은 적암촌(赤岸村)과 청장하(清漳河)를 사이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에 대한 당중앙과 팔로군총부, 129사 사령부의 뜨거운 사랑과 깊은 배려였다. 조선의용군 신임 사령원 무정이 중원촌에 이르자 그달 8월, 팔로군총부와 129사 사령부, 근거지당조직에서는 근거지군민들에게 통지를 내여 피어린 항일전쟁에서 영용히 희생된 진광화, 석정 등 조선동지들의 영웅업적을 널리 학습할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적암촌과 중원촌에서 멀지 않은 태항산의 섭현 련화산(莲花山) 기슭에 좌권(左权) 장군과 진광화(陈光华), 석정(윤세주 尹世冑)  유체를 모신 진기로예항일순국렬사릉원을 건설하였다. 렬사릉원은 련화산 아래, 청장하반에 위치한 섭현 석문촌(石门村) 가까이에 자리잡았다.  렬사릉원의 묘비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창립시 선전부장이였던 조선의용군 화가 장진광이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해 10월 10일, 5월 반‘소탕’전에서 영용히 희생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 부회장이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인 진광화,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지도자의 한사람인 석정 등 순난렬사의 추도대회를 장중히 가지였다. 팔로군총부, 중공중앙 북방국, 팔로군 129사, 태항군구, 진기로예변구정부와 각 군정, 민중 단체 대표 5000여명이 추모대회에 참가하였다.

추도대회는 팔로군총부 등대원 부참모장의 사회하에 류백승, 등소평,  라서경, 변구정부 주석 양수봉 등 동지들이 참가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한 무정과 정률성 등 조선의용군 전체 동지들도 추도회에 참가하였다.

주덕 총사령이 이날 추도대회에 제자(题字)를 보내왔다. 라서경은 추도사에서 “국제주의정신을 남김없이 보여준 조선동지들의 피는 이미 우리의 피와 함께 흘렀다”고 하였다. 주덕, 엽검영 등 동지들은 여러번 글을 써서 항일의 싸움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을 추모하였다. 주덕은 “자유 위해 희생되였거늘 그 생명 영원하리”라는  추모연설에서 조선동지들의 희생정신과 국제주의정신을 높이 평가(연안 《해방일보》. 1942년 9월 20일)하였다.

“우리의 조선혁명동지 11명이 희생되였다. 그들은 중국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생전에 우리 화북군민과 동심협력하고 함께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숭고한 국제주의정신을 보여주었다…

자유를 위해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전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인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그들이 몸바쳐 싸운 위업은 더 많은 투사들에 의하여 계승 완수될 것이다.”

이는 주덕 총사령이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섬감녕변구지회가  연안청년구락부에서 가진 재화(在华)조선순난렬사 진광화, 석정 등 11명 동지 추도식에 모처럼 참가하여 한 연설의 한부분이다. 엽검영도  <희생된 조선의용군동지들을 추모하여>란 추모글에서 조선 동지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진광화-석정 렬사가 처음 묻히였던 초장지ㅡ진기로예항일순국렬사릉원은 풍수가 좋은 태항산의 웅장한 련화산 아래, 청장하반에 위치한 섭현 석문촌 구내에 자리잡았다. 2009년 8월 20일 오전 필자는 섭현 현성 부근인 적암촌과  중원촌 현지답사를 마친 후 오후시간을 타서 택시로 석문촌으로 갔다. 진기로예 순국렬사릉원은 석문촌에서 조금 떨어진 련화산 아래 높은 지대로 펼쳐진 펑퍼짐한 언덕 우에 위치하고 있었다.

택시는 조금후 련화산 아래에 이르렀다. 처음 보이는 것이 이곳 언덕아래 단층집을 이룬 ‘조선의용군렬사기념관’이고 그 아래에 꽤나 되는 공지를 만들어 정차하기가 좋았다. 공지 오른쪽은 수림 속이고 꼭대기에 오각별을 올린 좌권 장군 기념탑과 좌권 장군 원 묘소가 보이였다. 좌권 장군 묘소는 여러 계단을 이루며 나타나 필자에게는 하나의 땅크 모양으로 형상화되였다.

좌권 장군 묘소 왼쪽 가장 높은 언덕 우에 진광화와 석정 원 묘소가 있었다. 좌권 장군의 묘소보다는 많이 작은 편이지만 모두가 조선의용군 화가 장진광이 설계한 터에 묘소설계는 하나의 풍경선을 이루었다. 왼쪽이 진광화 렬사 묘소였고 오른쪽이 석정 묘소로 나란히 펼쳐진 속에 뒤쪽은 ‘중한우의림’으로 되여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단으로 옮겨지기 전 진광화-석정의 초장지였다.

1950년 10월에 진광화, 석정 유해는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렬사릉원’으로 이장되였다. 진광화 렬사묘소는 렬사릉원 북원내 좌권 장군 묘소 한켠으로, 석정 묘소는  남원의 넓은 평지에 위치한 진기로예렬사공묘에 옮겨졌다. 렬사공묘의 렬사는 약 200명으로, 모두가 누운 상태로 된 자그마한 장방형 묘소라면 석정 묘소의 대리석 묘비에는 중문과 조선문으로 ‘석정 윤세주렬사[石鼎(正)尹世胄烈士]’라고 씌여있었다.

필자가 섭현 석문촌에 앞서 한단시를 찾은 것은 2009년 8월 17일 이였다. 진기로예렬사릉원은 한단시 릉원로에 위치하고, 릉원로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여지면서 렬사릉원 정문은 북원에 세워졌다. 북원내 진기로예렬사릉원에 들어서면  모택동의 “무상광영(无上光荣) ”금빛글발을 새긴, 하늘을 떠인 듯한 웅위로운 회색기념탑이 선참 안겨온다. 기념탑을 지나면 인민영웅기념묘소, 진렬관, 4.8렬사각(四八烈士阁), 렬사기념당, 좌권 장군묘, 좌권 장군기념관, 진광화묘 등 기념시설물들을 찾을 수가 있다.

진기로예렬사릉원내에는 또 전문 렬사기념당이 발목을 잡는다. 렬사기념당에는 진광화, 석정 두 렬사의 사진과 략력, 1942년 7월 18일자 《신화일보》에 실린 진광화, 석정의 추모기사, 조선의용군이 항일표어를 쓰는 력사적인 사진, 진광화가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아리랑> 가사 등이 전시되여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아리랑 가사전시는 진광화가 지난 30년대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중국사람들을 위하여 번역한 <아리랑>가사여서 더구나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