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항일련군 녀전사 리정옥 (2)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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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3일, 박근수와 리정옥 부부의 맏아들 박호걸씨는 어머니 리정옥씨가 소중히 보관하여온, 당년 박근수 리정옥 결혼을 축복하면서 양정우 장군이 기념으로 준 금가락지를 반석시동북항일련군박물관에 증정하였다. (최후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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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18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반석현 서버리하투 저요령 장수궁절(西玻璃河套猪腰岭长寿宫庙, 오늘의 明城镇永兴村 저요령 남쪽비탈)에서 성대한 설립대회를 가지였다. 설립대회는 10여개 지방에도 분회장을 두어 2000여명 반일군중들이 경축대회를 조직할 때 박근수와 안해 리정옥은 저요령 중심회장이 마련된 광장모임에 참가하면서 제1군 독립사 사장 겸 정위인 양정우의 현지보고를 직접 듣는 력사적 기회를 가지였다. 제1군 독립사 설립에 기여한 이들 부부의 얼굴에는 희열이 넘치였다.

1933년 겨울 중공반석중심현위 조직부장이고 제1군 독립사 후방일군인 박근수는 남만의 중공청원현위에 가 파괴된 당, 단조직 복구사업에 나섰다. 박근수가 청원현 산성진(山城镇)에 간 3일 후 산성진에서 당지 일본헌병대의 습격으로 현위 서기 박원근(朴元根)과 조직부장, 선전부장, 공청단현위 책임자 등 도합 7명이 불행히 체포되여 적들의 비인간적 악형을 받았다. 이 사연은 박근수와 리정옥이 각기 친필자서전과 회고문에 남기면서 리정옥의 둘째사위 최후택 교수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진다.

리정옥의 회고에 따르면 남편 박근수는 적들 앞에서 김정일(金正日)로 나타나면서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박근수외 6명 동지는 조선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되고 박근수는 끝까지 관련 혐의를 승인하지 않았기에 적들은 무죄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무죄석방에는 장인으로 되는 리정옥 아버지의 보석출옥 노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리정옥은 회고하였다.

적들은 박근수에 대한 감시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박근수는 가시집 편과 여기저기 산등성이에 토막굴을 짓고 숨어살다가 몇달 후 일본놈들에게 다시 체포되여 50여일간 옥살이를 하여야 했다. 두번째 체포에서도 유력한 증거를 밝히지 못한 적들은 50여일 만에 박근수를 다시 풀어주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광주봉기 참가자로서의 박근수의 투쟁예술을 잘 알리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때의 박근수의 옥살이와 심문 과정을 밝히는 적들의 원시기록이 지난 80년대초 길림시 덕승문(德胜门)공안파출소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박근수의 둘째사위이고 연변대학 전임 교수 최후택 제공한 자료)되여 박근수는 굴할 줄 모르는 항일혁명가였음이 밝혀져 화제다. 이 자료는 올해 2022년초 최후택 교수를 통해 우리 조선족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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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7월 16일 오후 《길림석간》(吉林晚报) 기자가 리정옥씨를 취재하는 모습. (최후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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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반석중심현위의 조사과정을 거치면서 박근수의 옥살이회보는 모두 진실이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에 따라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는 박근수를 류하현에 보내여 사업하도록 하였다. 그때 중공류하현위는 통화현 소황구(小荒沟)에 자리잡았고 박근수는 홍수백(洪树柏)으로 변성명하고 활동하였다. 박근수는 친필자서전에서 통화현 소황구(小荒沟)에 가 군중사업을 하다가 33세부터 36세 즉 1934년부터 1937년에 이르는 사이 중공류하현위 비서처에서 활동하였다고 알리였다. 리정옥도 남편을 따라 중공류하현위 비서처에서 항일사업에 나섰다. 그들 부부는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 소속 항일련군 후방전사들이였다.

공청단원 리정옥은 언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을가, 이는 지난 1984년에 조선글 문학잡지 《장백산》에 일찍 리정옥의 항일이야기 <녀련락원>을 펴낸 고 김운룡 선생의 글에서 선참 알려진다. 리정옥의 입당시간은 1935년이다. 김운룡 선생은 당년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반석을 비롯한 남만의 항일투쟁연구의 제1인자로서 양정우 장군의 지하련락원 리정옥을 취재하였기에 리정옥의 입당시간은 신빙성이 있다.

리정옥도 관련 회고에서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남편과 더불어 중공류하현위 비서처에서 활동했다고 소개한 적 있다. 회고에서 리정옥은 중공류하현위 비서처 시절 줄곧 남편을 따라 산속에서 혁명활동을 하였다고 하면서 1937년에 맏이를 출산한 후 갓난아기와 함께 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수가 처음 중공류하현위 비서처에서 비밀사업을 할 때는 1934년, 때는 1932년말에 조직된 남만유격대가 1933년 9월 18일에 반석현 버리하투(玻璃河套)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1934년 11월 7일 림강현 사도이차(四道二岔)에서 정식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으로 재편성된 시절이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군장은 양정우, 제1사 사장은 리홍광이고 제1사의 주요활동구역은 통화, 림강, 류하, 흥경(兴京), 환인 등지로 획분되였다. 따라서 룡강산맥(龙岗山脉)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하니하 상류 산간지대(哈尼河上游山区)로 되는 하리지구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가장 중요한 후방기지로 떠올랐다. 하리지구는 오늘의 길림성 류하, 통화, 훈강의 변계지대에 위치하지만 30년대 그 시절엔 위만주국 금천현의 경내로 되기에 습관적으로 금천하리(金川河里)라고 부른다.

중공남만림시성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군부는 금천하리를 주요한 활동무대로 하면서 금천하리 주변의 류하현 산구에서 활동하는 중공류하현위와 긴밀한 련계를 가지였다. 군장 양정우는 박근수 소속 중공류하현위 비서처와도 자주 련계하면서 원 중공반석현위 제1임 서기로 활동하던 박근수와 틈나는 대로 어울리였다.

동북항일련군 제1군, 제1로군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기는 적들의 거듭되는 토벌로 중공류하현위의 비밀장소들은 엄중히 파괴되면서 살아있는 우리의 동지들은 거의가 그 시절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에 참가하였다. 한데서 중공류하현위와 군중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중공류하현위와 동북인민혁명군 그 후의 동북항일련군과의 관계가 모두 단절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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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박근수 리정옥 부부의 자녀들인 6남매와 그들의 부인, 남편들 한자리 모이여. (최후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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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 전임 교수 최후택 교수가 제공한 박근수 친필자서전에 의하면 박근수 등의 비밀아지트까지 전부 파괴되면서 류하현 당책임자와 박근수 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던 1937년 겨울의 어느 날 반역자의 밀고로 마지막 비밀아지트마저 적들의 돌연습격을 받았다. 그날 해가 진 후 박근수는 밤의 어둠을 타서 적들의 포위돌파에 성공하면서 청원현으로 전이하였다.

그때의 산속생활과 청원으로의 전이생활을 리정옥씨가 사실 대로 밝히여 박근수 행적규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박근수는 청원현으로 전이한 다음 청원 초시(草市) 부근의 수렴동(水帘洞)을 찾았다. 그때의 박근수는 발의 동상이 심하여 초시의 친척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로부터 박근수는 안해 리정옥과의 재회를 이루었지만 지방조직이 몽땅 파괴되고 부대가 고정된 근거지도 없이 동북산야에서 유격전을 벌리며 수시로 이동하였기에 우리 조직과의 모든 련락을 잃은 외기러기 신세로 되여버렸다.

험악한 환경 속에서 별수가 없었다. 박근수는 청원현의 친척집에 가서 며칠, 처가집을 찾아 며칠씩 보내였지만 이는 장구지책이 아니였다. 적들의 감시 속에서 박근수는 처가집을 떠나 영길현 쌍하진의 안해 4촌 집에 가 지내기도 하였다. 이어 영길현 차로하(岔路河) 부근 김가툰(金家屯)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고 학교 교원으로 활동하기도 하다가 1949년에 길림시 변두리의 영신촌(永新村)에 이사하여 당지 소학교 교원으로,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좌우에 박근수 부부는 길림시 변두리 이도하자(二道河子)로 이사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1968년경에 맏아들 박호걸을 따라 길림시 선영구 진양골목(船营区晋阳胡同)으로 삶의 지대를 옮기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중국공산당 당적을 증명할 만한 증명인과 조직관계를 찾을 수 없어서 줄곧 당적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박근수는 동란의 시기에 갖은 박해를 받다가 1968년 풀리여났지만 그 미열로 1970년에 1월에 만 67세로 별세하였다. 리정옥도 남편과 함께 갖은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때 박근수 부부와 맏아들 일가 10명 식구는 20여평방메터밖에 안되는 흙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원 연변대학 교수이고 박근수의 둘째사위인 최후택 교수에 의하면 박근수와 리정옥 부부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맏아들 박호걸(朴虎杰, 1937년생)은 길림시원림처 공정사로, 큰딸 박영화(朴英华, 1939년생)는 연변백화공사 과장으로, 둘째아들 박호웅(朴虎雄, 1941년생)은 길림시조선족문화관 촬영사로 사업했고 둘째딸 박영련(朴英莲, 1945년생, 최후택 교수의 부인)은 연변담배공장 기건처(基建处)에서, 셋째 아들 박호림(朴虎林, 1946년생)은 길림시강남공원 화가로, 넷째 아들 박호명(朴虎明)은 길림시정협 간부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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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초에 길림시 덕승문(德胜门)파출소에 보관된 일제놈들의 원시기록이 발견되여 길림시당위 조직부에 알려졌다. 길림시당위 조직부의 조사결과 박근수는 적들에게 죽어도 굴하지 않은 항일혁명가였음이 밝혀졌다. 이와 더불어 중공길림시교구(郊区) 이도향(二道乡)위원회에서도 1983년 12월 20일 ‘리정옥 동지 명예회복에 관한 결정’을 발표하였다. ‘결정’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졌다.

“…조직의 심사를 거쳐 리정옥 동지는 1930년에 중공반석중심현위 서기(필자 주: 중공반석현위 서기) 박근수 동지와 결혼한 뒤 1931년에 입단, 1935년에 입당하고 양정우 동지의 지하련락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간고한 환경 속에서 남편을 따라 항일련군투쟁에 참가하면서 선후하여 반석, 류하 등 현에서 여러해 지하공작을 하였음이 알려졌다. 나중에 임신한데서 조직의 결정으로 혁명대오를 떠나게 되였다…”

그러면서 ‘결정’은 리정옥 동지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 유익한 사업을 하였다면서 일찍 이른바 반역자로 투쟁받은 것은 오유적이였다고 조직결의를 내리였다. 이어 1984년 7월 1일 길림시당위 조직부에서는 박근수 가족에게 조직의 심사결과와 박근수와 그의 안해이고 양정우의 지하련락원이였던 리정옥은 로홍군대우를 향수한다는 조직의 결정을 알리였다.

이어 7월 16일, 이들 박씨 가족의 참여 속에 항일혁명가 박근수의 골회를 화장한 후 길림시 영렬관(英烈馆)에 안장하였다. 그날 오후 《길림석간》 기자가 로홍군 리정옥을 취재하였고 1984년 8월 25일자 《강성일보》(江城日报)는 주일판(周日版) 톱자리에 ‘항일련군전사 박근수의 아들딸들’이란 부제와 <예술지가>(艺术之家)란 제목으로 리정옥과 그의 자녀들 소식을 전하면서 리정옥을 “당년 동북항일련군 군기(필자 주: 실제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기발)를 수놓고 여러차례 양정우 장군의 통신과 정찰에 나선 항일련군 녀전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2017년 10월 13일, 박근수와 리정옥 부부의 맏아들 박호걸씨는 어머니 리정옥씨가 소중히 보관하여온, 당년 박근수 리정옥 결혼을 축복하면서 양정우가 손수 기념으로 준 금가락지를 반석시동북항일련군박물관에 증정하였다. 반석시동북항일련군박물관은 동북항일련군 제1군 연구회 간판의식과 더불어 항일련군 유물을 증정한 박호걸 등 여러 항일련군 자녀들에게 영예증서를 내주었다.

반석시동북항일련군박물관에 전시된 이 금가락지 사진은 올해 2022년 음력설기간 최후택 교수를 통하여 박근수의 손자가 반석시와 련계하면서 필자에게 전해졌다. 최후택 교수는 필자의 연변대학 78년급 조문학부 시절의 중공당사교원이였고 대학시절 필자를 조선족력사연구가로 이끌어준 첫 계몽스승이였다.

  뒤늦게 알려진 항일의 녀성혁명가 리정옥, 그는 실로 남편 박근수를 도와 남만의 반석 당조직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시원을 여는 데 기여한 공청단원으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양정우 장군의 지하련락원으로, 항일련군 녀전사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리정옥의 남편 박근수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1927년 광주봉기 참가자이고, 양정우장군의 친밀한 전우와 조수이고 항일련군의 우수한 후방간부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이름난 항일혁명가였다. 따라서 최후택 교수의 뜨거운 도움으로 박근수와 리정옥의 전기가 사상 처음으로 정리되여 세상에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