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양림과 요위화의 동지적 인연 (2)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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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권(伍修权,1908—1997)은 호북 양신(阳新) 태생이고 후날의 저명한 중국인민해방군 고급장령, 무산계급혁명가, 군사가, 외교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1925년 10월에 공청단원인 그는 당조직의 파견으로 강서, 하남, 상해, 섬서 등지에서 모인 10명 젊은이와 함께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정치를 배웠다. 1927년 9월에 이들 11명은 중산대학 제1기 대학생들과 더불어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오수권 등 11명은 또 모스크바 보병학교에 입학하여 특별반-중국반을 이룬다. 모스크바 보병학교 생활을 두고 오수권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1927년 중국대혁명이 실패한 후 상해 등지에서 또 한패의 중국학생들이 왔다. 그들은 먼저 중산대학에서 1년간 정치훈련을 거치고 1928년 가을에 보병학교에 파견되여 공부하였다. 그때 학교에서 하나의 중국련을 조직하였다. 3개 패가 있었는데 련장은 조선동지였다.” 〔《중국당사자료》, 제1집. <오수권 동지 회고록>(1)〕

이 한 단락의 회고는 바로 양림 등의 쏘련행과 양림 등의 중산대학 학습, 다음 보병학교 입학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련장-조선동지는 양림을 가리킨다. 오수권이 비록 양림이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모스크바 중산대학과 보병학교 중국학생들을 검토하면 련장자격으로 나타날 사람은 양림밖에 없다. 두 학교, 더우기 보병학교 중국학생들 상황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다. 양림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양림의 쏘련행 모스크바 보병학교 학습은 <동방매력—장정과 외국인>의 저자 소현사가 말한 것처럼 다섯번째로 군관학교(五进军校)에 들어간 것으로 된다. 첫번째가 동북 남만의 신흥무관학교, 두번째가 동만으로 불리운 연변의 북로군정서 사관련성소, 세번째가 운남 곤명의 운남강무학당, 네번째가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다섯번째가 쏘련의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이다. 이는 양림 인생의 남다른 모습이고 모스크바 동방대학이 아닌 중산대학과 보병학교인데서 요위화와 양림의 모스크바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0년 봄에 양림과 그의 안해 리추악은 쏘련에서의 2년간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의 동북 심양으로 돌아왔다. 그때 중공만주성위는 심양시 화평구 황사로 복안항 3번지에 자리잡았고 중공만주성위 림시서기는 림중단(林仲丹, 原名林育英, 化名张浩)이였다. 1930년 8월에 중공만주성위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만주총행동위원회로 명칭을 고치고 중공 1차 대회 대표의 한 사람인 진담추가 만주총행동위원회 서기로 부임하였다. 그해 10월 24일 만주총행동위원회는 취소되고 중공만주성위로 회복되였다.

양림을 다룬 여러 글들은 쏘련에서 상해로 돌아왔고 상해에서 당중앙의 파견으로 중공만주성위에 파견되였다고 다루고 있는데 이는 력사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1932년에 리추악은 중공만주성위 소재지 할빈에서 모스크바 동방대학시절의 요위화와 쏘련에서 직접 동북으로 왔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 양림 부부가 처음 들어선 곳은 동북 심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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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심양에 온 후 양림은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로 부임하고 리추악은 성위기관에서 사업하였다. 1932년 1월 만주성위가 심양에서 할빈으로 활동지대를 옮긴 후 리추악의 사정이 달라졌다. 요위화는 당시의 리추악을 두고 “중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데다가 또 아이까지 낳았으므로 할빈에서 아직 사업을 배치받지 못했다. 이때 양림 동지는 중공만주성위의 군위 서기였다.”〔《관내지구조선인 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1335페지〕고 말하고 있다.

요위화의 구술에 따르면 그는 1932년 4월 할빈으로 가서 중공만주성위를 찾았고 할빈에서 중공만주성위 라등현 등 6, 7명 주요간부들이 참가한 전문회의를 가지였다. 그는 당중앙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주로 반착취 반투항 문제, 무장투쟁문제, 당이 지도하는 독립적인 무장력량—홍군문제 등을 말하는 한편 중앙혁명근거지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라등현(罗登贤,1905—1933)은 그시절 중공만주성위 서기로서 광동사람이였다. 20살 때인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중공향항시위 위원, 상무위원으로 활동했고 1927년 12월에 로동자적위대를 이끌고 광주봉기에 참가했다.  1928년 여름 상해에서 중공강소성위 서기로 부임, 이해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당 6차 대회에 출석,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정치국 위원 중책을 짊어졌다. 그 후 1929년부터 1931년 사이 선후하여 중공광동성위 서기, 중공중앙 남방국 서기, 중화전국총공회 당단서기를 력임하였다.

1931년 여름 라등현은 동북에 파견되여 중공중앙 동북주재 대표로 뛰다가 그해 11월에 정식으로 중공만주성위 서기 겸 조직부장 책임을 맡고 성위 군위 서기 양림과 더불어 각지로 다니며 무장투쟁을 조직, 지도하면서 후일의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련군의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때 중앙순시원 요위화가 할빈에 왔고 성위회의를 소집하였었다.

그때 중공만주성위가 지도하는 당조직은 도시에서의 력량이 따르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주요한 사업은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고 학교의 학생들을 조직하여 항일부대에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동자운동이 따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요위화는 도시사업은 마땅히 농촌사업과 배합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때 양림은 무장투쟁문제로 남만의 반석 등지에서 활동한데서 회의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양림이 반석지구에서 할빈의 성위로 돌아온 후 요위화는 양림과 두번 이야기를 나누며 무장투쟁문제, 홍군문제 등 중앙의 정신을 주고받았다. 그번 두차례 만남에서 양림은 남만과 동만의 당조직과 무장투쟁 문제를 가지고 상세히 소개하여주었다. 중앙순시원인 요위화는 남만과 동만의 당조직사업성과에 기뻐마지않았다.

“양림 동지, 동지가 말하는 남만과 동만 각지를 다니며 직접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서 양림은 요위화가 다닐 동북 남만과 동만 각지 로선도를 자상히 작성하여주었다. 요위화는 양림의 자상함과 동지적 인품, 혁명의 헌신성에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였다. 양림에 대한 그때의 인상이 너무 깊어 요위화는 먼먼 후날 양림을 전문 회고하며 그 인상을 여러번 밝힌 적 있고 그 인상은 자식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본문에서 개략적으로 밝혀지지만 요위화의 막내아들과 필자는 양림을 두고 서로의 련락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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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위화는 양림이 그려준 로선도에 따라 1932년 5.1절 이후, 적절히 말하면 7월 전후에 남만의 반석현, 화전현, 동만의 화룡현 등지를 돌아보았다. 요위화는 성위와 지방의 련락원들이 안내했다고 하지만 양림이 동행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요위화가 다닌 지방은 모두  양림이 활동하는 지구들이고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지구들이여서 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대가 활동하며 항일투쟁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다.

요위화는 회고록에서 자기는 광동사람이지만 생김새가 조선사람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요위화가 찾아다닌 곳도 모두 조선이주민들이 모여사는 고장으로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요위화를 조선사람으로 여기여 무척 좋아했다. 어디를 가나 조선동지들이고 혁명열성이 대단하였으며 어디를 보나 양림의 발자취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는 모두가 력사사실이였다. 당조직계렬에서 연변은 동만이라고 불리운다. 그런 동만에 양림이 첫 발자취를 남긴 때는 1930년으로 헤아려진다. 그해 10월, 양림은 안해 그리고 새로 부임된 중공동만특위 서기 료여원과 함께 중공만주성위 소재지 심양을 떠나 연변땅을 밟았다. 양림의 신분은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 겸 중공동만특위 군위 서기였다.

료여원과 양림은 지체없이 중공연화중심현위 소재지인 연길현 조양천 부근의 무산촌에서 중심현위 간부들이 참가한 회의를 소집하고 성위의 해당 결정과 중공동만특위에 보내는 만주총행동위원회(그때 중공만주성위는 총행동위원회로 불렀음)의 지시서한을 전달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산촌은 오늘의 연길시 조양천진 태동 2대를 가리킨다. 그날 회의에서 료여원, 양림, 왕경, 류지원, 리용, 주건, 리용국 등 동지들로 첫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회의는 또 중공연화중심현위를 중공연화현위로 개칭하고 왕청과 훈춘에 각기 현위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새로운 연화현위와 곧 조직될 왕청현위, 훈춘현위는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즉 중공동만특위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당시 연변에는 광주 황포군관학교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 최상동, 방상범, 신춘, 김철산, 장자관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황포시절에 서로 허물없이 지내던 조선동지들이였다. 양림은 빠른 시간내에 조직선을 타서 최상동, 방상범, 신춘 등 황포계 출신들을 만나보고 그들과 쏘련에서 군사를 배운 적이 있는 박윤서, 류지원, 김명균 등 간부들을 흡수하여 특위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양림과 특위군사위원회 여러 동지들의 피타는 노력으로 연변 각지에는 평강구유격대와 라자구유격대, 연화유격대 등 현과 구 여러 유격대들이 조직되고 특위 산하에 개산툰유격대를 토대로 조직한 직속유격대를 두고 동만특위와 군위 기관, 간부와 군중을 보위하는 사업을 선차적인 과업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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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현 조양천 무산촌과 그 일대는 중공연화중심현위와 연화현위의 소재지였다. 료여원과 양림은 1930년 10월에 연변에 파견되여온 후 먼저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활동지점을 국자가로 옮기였다. 특위 서기 료여원은 국자가의 북산 아래에 약방을 꾸리고 약방 주인의 신분으로 나타났으며 특위 군위 서기 양림과 그의 안해, 특위 조직부장 왕경은 국자가에 세집을 맡고 활동하였다. 특위 선전부와 비서처가 연화현위 소재지인 조양천 무산촌에 자리잡았기에 화룡현 약수동 녀성인 김옥주 등 특위 통신원들은 국자가와 무산촌 사이를 자주 오고갔다.

동만 즉 연변의 유격대사업은 자못 활기를 띠였다. 따라서 유격투쟁경험을 제때에 총화하고 유격투쟁을 한단계 끌어올릴 것이 아주 수요되였다. 1931년 2월 15일, 중공동만특위 군사위원회는 양림의 노력과 지도 밑에 동만유격대의 사업경험을 전면적으로 총화하면서 동만 즉 연변의 실정에 어울리는 <동만유격대사업요강>을 제정하였다.

<동만유격대사업요강>은 양림이 손수 써낸 중요한 군사문헌으로서 그 자수가 7000여자에 달한다. <요강>은 연변에서의 군중발동문제, 유격대에 대한 당의 령도문제, 유격대의 전략전술 등을 옳바르게 지적하면서 유격대사업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건군원칙과 정치방향을 분명히 하였으며 투쟁책략을 똑똑히 밝히였다.

1931년 9월에 일본제국주의는 심양 류조호에서 공공연히 9.18사변을 발동하여 무장으로 동북을 침략하였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이 긴급한 관두에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각급 당조직은 모두가 일떠나 군중성 반일투쟁을 조직하며 반일유격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라고 호소하였다. 중공만주성위는 따라서 양림에게 소환령을 내리고 심양으로 불렀다. 이 시기는 적절히 말하면 1931년 11월—12월 사이이다. 양림은 다시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로 나서고 리추악은 성위 부녀위원회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1932년 1월 중공만주성위는 할빈으로 옮겨갔고 이해 3월 무장투쟁 관련 성당위의 한차례 회의 후 양림은 성위 순시원의 신분으로 남만에 파견되였다. 남만에서의 중심지대는 반석이였다. 반석일대는 산간지대에 자리잡은 반석, 이통, 쌍양, 화전, 휘남, 해룡 등 지구를 포괄하고 있었다. 1928년 여름 황포군관학교 출신  진공목 등 몇몇의 조선족 공산당원들이 반석에 와서 지하사업을 벌리면서 남만의 정치기후는 날따라 달라졌다.

  1932년 4월초에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 양림은 남만의 반석현에 간 후 전면적으로 무장하여 항일할 데 관한 성당위의 지시를 전달하고 리홍광과 함께 ‘4.3’, ‘5.1’, ‘5.7’ 농민폭동을 련속 조직, 지도하였다. 그중에서도 농민들이 대거 동원되고 기세가 큰 것이 5월 7일의 하마하자폭동이였다. 하마하자 5.7농민폭동은 남만항일투쟁의 새로운 발단이고 반석유격대발전의 힘찬 추진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