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양림과 요위화의 동지적 인연 (3)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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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경절전야 광주시로전사기념관에 혁명문물을 기증하는 요씨 삼형제.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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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지구에서의 농민폭동의 직접적인 지도자는 후날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사장 겸 정치위원인  리홍광(1910—1935)이다. 리홍광은 또 1931년 12월에 중공반석현위에서 조직한 ‘반석로농유격대’ 대장이기도 하다. 양림은 이 대오를 인차 ‘반석로농의용군(磐石工农义勇军)’으로 발전시켰다. 이 대오가 후에 발전된 남만유격대와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이다. 양림은 명실공히 이 무장대오의 주요창시자로서 남만일대의 항일유격투쟁의 시원을 열어놓은 만주성위 군위 서기였다.

양림은 남만의 항일무장을 조직한 뒤 동만 4개 현의 항일유격투쟁에 대한 지도도 늦추지 않았다. 1932년 봄과 여름 사이 그는 동만특위와 화룡, 연길, 왕청, 훈춘 4개 현 군사부를 통하여, 혹은 직접 연변을 찾으며 분산된 각지 지방유격대를 통일된 현유격대로 발전하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당조직과 양림, 그의 동지들인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의 주도, 노력하에서 화룡, 연길, 왕청, 훈춘 4개현들에는 모두 통일된 현유격대가 조직되여 활동하였다. 이런 현유격대들은 뒤미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개편되여 후날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기본력량을 이루어갔다.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 양림은 9.18사변 이후 성위 서기 라등현, 주보중 등과 더불어 동만과 남만, 북만의 항일유격대를 춰세우며 동북항일무장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발전시킨 창시자이고 조직자였다. 남만과 동만의 곳곳마다에는 양림의 발자취가 어리였다.

중앙순시원 요위화는 동북주재 중공중앙 대표였다. 그는 1932년 4월에 할빈에 도착한 후 계속하여 남만과 동만 각지를 돌아보면서 곳곳마다에 어린 양림의 발자취를 느끼였다. 그로부터 몇달 후인 1932년 7월 양림은 중공중앙국 서기이며 중앙쏘베트 로전(劳战)위원회 주임인 주은래의 부름을 받고 동북을 떠나 상해를 거쳐 강서 중앙쏘베트구역에 들어가게 되였다.

하다면 주은래 동지의 부름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가. 필자는 오래동안 양림을 연구하고 양림평전까지 출판하였지만 관련 자료가 적어서 이에 중시를 돌리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양림의 동지이고 전우인 요위화 연구에 몰두하면서 이는 모두 요위화와 관련됨을 비로소 알 수가 있었다.

요위화는 중앙순시원으로 1932년 4월부터 9월까지 동북의 할빈과 동만, 남만, 심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요위화는 비밀리에 ‘종운이 만주를 순시한 보고 제1호(仲云巡视满洲的报告第一号)’와 제2호, ‘종운만주순시보고(仲云满洲巡视报告)’ 등 2만여자에 달하는 세차례 보고‘(요조생 소개자료, 상해로 돌아간 후 네번째 보고를 올림)’를 작성하면서 동만과 남만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 각지의 당조직과 항일무장투쟁 현실, 주은래의 관심사로 되는 중공만주성위 군위 서기 양림 등을 여실히 당중앙에 회보하였다. 그때 중공중앙 일상사업을 책임진 주은래는 이미 상해를 떠나 강서 서금의 중앙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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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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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초 그 시절 상해는 중국공산당 림시중앙의 소재지이고 주은래가 림시중앙의 일상사업을 맡아나섰다. 주은래는 1928년 6월 쏘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로운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으로, 그 뒤 열린 6기 1차 전원회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서장 겸 중앙조직부 부장 중책을 짊어지다가 상해 중공중앙의 일상사업을 책임졌다.

그러던 1931년 6월 21일, 중공중앙 총서기인 향충발(向忠发)이 주은래의 거듭되는 권고에도 마다하고 스스로 상해의 음페처를 떠나 밖에 나가 잠을 자다가 이튿날 국민당 특무에 의해 체포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은래는 즉시 구출작전을 시도했으나 향충발은 체포되여 3일 만에 반변하고 주은래의 비밀지점을 불어댔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인차 비밀지점을 옮겼기에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바깥활동을 할 수조차 없었고 상해에 머무르기도 어려웠다. 이런 형편에서 당중앙은 주은래가 상해를 떠나 중앙쏘베트구역으로 전이하도록 하였다.

중앙쏘베트구역을 흔히 중앙혁명근거지라고 한다. 1931년 12월 33세의 주은래는 지하교통원의 안내하에 다년간 활동하던 상해를 떠나 영국 양행(洋行)의 소륜선에 올라 향항을 거쳐 산두로 갔고 산두-대포(大埔)-복건 영정(永定)유격구-복건 장정(长汀)을 지나 12월말에 끝내 중앙혁명근거지-강서 서금에 도착하였다. 서금에 간 후 주은래는 중공쏘베트구역 중앙국 서기,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홍군총정치위원 중책을 짊어졌다.

주은래는 강서 서금에서 동북으로 간 중앙순시원 요위화의 비밀회보를 접하고 중공만주성위와 양림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일찍 자기의 수하에서 황포군관학교와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활동한 양림을 즉각 중앙혁명근거지로 소환하였다. 이 지시는 모두 동북에서 활동하는 요위화를 통하여 전달되였었다. 요위화가 주은래와 양림 사이를 이어준 공신인 셈이다. 상해를 거쳐 중앙혁명근거지로 진출한 양림은 요위화 등이 개척하고 지도한 비밀교통선을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비밀교통선이란 어떤 교통선일가, 이 교통선은 중국혁명사에서 한획을 긋는 자못 중요한 교통선으로서 시초의 교통선은 양림의 동지인 요위화와 직접 관련된다. 1930년 가을과 겨울 사이 상해에서 활동하는 중공중앙은 중공남방국과 광동성위의 긴밀한 협조하에 상해로부터 향항ㅡ산두(汕头)ㅡ대포(大埔)ㅡ청계(青溪)ㅡ영정(永定)을 거쳐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진출하는, 약 3000킬로메터에 달하는 홍색 비밀교통선을 개척하였다.

그때 중공중앙은 전국의 비밀교통망으로 북방선과 장강선, 남방선(네갈래 지선을 가지고 있었음) 등 세갈래 주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갈래 주선과 남방선의 세갈래 지선은 모두 국민당반동파에 파괴된 현실이였다. 남은 것은  남방선의 한갈래 지선인 화남선 뿐, 이 화남선이 중앙홍군이 전략적 전이로 중앙혁명근거지를 떠난 1934년 10월까지 줄곧 운영되면서 상해와 중앙혁명근거지 사이 연락과업은 거개가 이 교통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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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남선이 요위화와 직접 관련되면서 양림과 이어지니 세상사란 참 기묘하다.

알고 보면 우리 당의 홍색비밀교통선을 이룬 화남선은 그 지휘기관이 향항에서 활동하는 화남교통총소(华南交通总站)였다. 화남교통총소를 향항에 설치한 것은 중공광동구위와 관련되니, 1927년 장개석의 광주 ‘4.15 반혁명정변’으로 광주에서 활동하던 중공광동구위는 향항으로 전이하게 된다. 따라서 그해 5월 20일 중공중앙의 결정으로 중공광동구위는 향항에서 중공광동성위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1930년 상해에서 활동하는 중공중앙은 상해의 지도기관을 강서 서금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혁명근거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0월에 중앙정치국의 지도를 받는 중앙교통국을 설립하였다. 1930년 8월 요위화는 중공중앙남방국 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가 새로 설립된 중앙교통국으로 옮겼다. 그 후엔 주은래의 지시로 향항에 파견되면서 화남교통총소를 세우고 제1임 소장으로 부임하였다.

화남교통총소는 향항의 구룡 상해가(九龙上海街)에 중공남방국의 지도를 받는 비밀무선국(秘密无线电台)을 설치하고 상해의 중앙교통국과 직접 통신련락을 가지였다. 상해의 중앙교통국에서 향항을 거쳐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하는 동지들은 모두 상해를 출발하기에 앞서 상해의 비밀무선국에서 떠나는 이의 성별, 정치상황, 향항 도착 후 숙박처(旅馆), 약정한 접선암호(约定的接头联系口号) 등을 알리면 요위화를 소장으로 하는 화남교통총소에서 비밀무선국의 통지에 따라 관련 이를 찾고 비밀접대에 나서며 비밀교통선을 따라 중앙혁명근거지로 움직이도록 하였다.

향항에 설치된 화남교통총소는 이렇듯 중국혁명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1931년에 요위화는 중앙순시원 책임을 맡고 화남교통총소를 떠났지만 화남교통총소는 총소가 운영되던 1934년 10월까지 중요인물 200여명을 포함한 수백명에 달하는 당의 간부들을 중앙혁명근거지로 호송하였다. 상해의 중공중앙에서 중앙혁명근거지로 파견하는 동지들은 대부분 중앙과 성과 현 그리고 중앙홍군대오에서 고급 지도 책임을 맡지 않으면 무선전, 의료, 문화, 교육, 병기생산 등 전문기술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이였다.

또 화남교통총소는 운영된 4년간 비밀리에 전송한 정보나 호송한 인원과 물자 모두가 한차례의 손실도 입지 않은 기적을 창조하였다. 이렇듯 화남교통총소가 운영하는 홍색비밀교통선을 다시 보면 상해에서 먼저 향항에 이르고 향항에서 광동 산두(汕头), 조안(潮安), 대부(大埔)와 복건의 영정(永定), 상항(上杭), 장정(长汀)을 거쳐 강서 서금으로 이어간다.

1932년 7월, 양림은 중공중앙의 파견으로 상해를 떠나 배편으로 광동 산두로 갔고 주은래 동지가 통과한 산두-대부-장정 지하교통선을 따라 적점령구인 국민당의 봉쇄선을 헤치며 강서 서금에 이르러 주은래를 찾았다. 주은래는 양림을 즉각 중화쏘베트공화국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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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양림은 중공중앙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앙혁명근거지와 홍군장정길, 섬북에서 홍군 제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홍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 홍군 제15군단 제75사 참모장, 홍1방면군 보충사 사장 등 직책에 충실하며 홍군의 고급 장령으로 활동한 빛나는 력사를 보인다. 그러던 양림은 1936년 2월, 홍군의 동정항일에서 황하가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본문은 양림과 요위화의 동지적 전우인연을 주선으로 힘자라는 대로 다루어보았다. 또 필자는 양림연구를 평생과업의 하나로 삼고 양림평전을 민족출판사에 의해 조선문, 중문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양림평전을 매개로 필자는 이 몇해 사이 광동 광주에서 삶을 영위하는 요위화의 막내아들 요조생(饶潮生)과 인연이 닿아 서로 연락을 가지고 있다.

요조생의 아버지 요위화(1906ㅡ1996)는 1932년 9월 동북에서 상해로 돌아간 후 선후하여 섬북공학(陕北公学) 비서장, 중공동강특위 조직부장, 중공월북성위(粤北省委) 조직부장, 동강종대(东江纵队) 군정간부학교 비서장 등을 력임하면서 국민당반동파에  의해 두차례나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였다. 해방 후에는 광주시수공업관리국 국장, 광주시건축재료공업국 국장, 광주시 제3기와 4기, 5기,  6기 정협 부주석을 력임하며 문화대혁명의 박해로 5년간 고생하다가 명예를 회복하며 1996년 9월에 병환으로 서거하였다.

요조생의 소개에 따르면 요위화와 안해 하숙영(何淑英,1920-1974,녀성혁명가)은 슬하에 장자 요연생(饶燕生)과 요회생(饶回生), 요동생(饶东生), 요건생(饶建生), 요전생(饶田生), 요기생(饶基生), 막내 요조생(饶潮生) 등 아홉 아들을 두었다. 요조생의 소개에 따르면 아버지 요위화가 1924년과 1925년 그 시절 광동대학을 다닐 때 당지부 서기로 활동하면서 한 학급 동창들인 강세우(姜世宇,공청단원), 리영준(李英俊,공청단원), 류우상(刘禹相) 등 조선인과  대학의 조선 동지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모스크바 동방대학시절에는 또 리추악 등 조선 혁명가들과 동창으로 동지로 지내였다.

요위화의 자식들은 아버지 요위화한테서 조선 동지들과의 우정이야기를 자주 들으면서 중국혁명에 뛰여든 조선 혁명가들에 대하여 남다른 감정을 가지게 되였다. 그중 막내 요조생은 광동성사회과학원 연구생원 출신으로서 법원계통에서 30여년 사업하다가 퇴직한 후 광주시 남사구(南沙区)  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상무부주석, 광주로간부대학 연구원으로 활동하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필자는 요위화의 막내 요조생과의 인연으로 양림과 요위생의 동지적 전우관계(요위화는 양림의 전우이고 모스크바 동방대학시절 리추악의 학우)를 새로 연구를 하게 되고 본문을 새로 정리하게 되였다. 본문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화남교통총소 지도하의 화남선ㅡ홍색비밀교통선, 이 홍색비밀교통선을 따라 후일 중앙홍군의 고급 장령 양림도 상해를 떠나 중앙혁명근거지로 진출하게 되니 양림과 요위화의 동지적 인연의 계속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