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국민혁명군 장교 강파 리동화 리검운

2022-06-20

image.png

황포군관학교 출신 강파 등이 다닌 황포군관학교 옛 사진. (사진자료)

1926년 북벌전쟁의 나날 국민혁명군 제2군에는 조선인 포병련 련장 강파와 기관총대 련장 리동화가 활약하고 있었고 국민혁명군 제6군에는 기관총교관 김준섭과 포병영 영장 리검운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김준섭은 이미 전기로 정리되여 알려진 현실이지만 강파와 리동화, 리검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강파와 리동화, 리검운은 위대한 북벌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우리 민족의 혁명가이다.

먼저 강파를 본다면, 강파(江波, ?ㅡ1926)가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헤아려지나 몇기 소속인가를 알리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강파 소속 제2군은 상군의 하나인 ‘건국상군(建国湘军)’으로 있다가 1925년 8월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의해 국민혁명군 제2군으로 개편된 부대로서 북벌전쟁시기 국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하나였다.

1926년 7월, 북벌군으로 편성된 국민혁명군의 여러 부대들은 광주 국민정부에서 반포한 북벌동원령에 따라 3로(三路)로 나뉘여 정식 북벌을 개시하였다. 담연개(谭延闿)를 군장으로 하는 제2군은 제2로군에 소속되여 손전방부대를 소멸하는 강서의 싸움터에 나섰다. 그해 9월 19일, 제6군 제19사가 선참 남창성을 진공하였으나 다른 부대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진공목적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강파 소속 제2군은 남창을 흘러지리는 감강서안(赣江西岸)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2군은 명령에 따라 감강을 도강한 후 제1군 제2사 류기(刘峙)부대와 제3군 주배덕(朱培德)부대와 회합한 뒤 10월초에 장개석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남창성을 재차 진공하는 전투에 합류하였다.

image.png

북벌전쟁에서의 조선인 장교 출현 사진. (사진자료)

전투는 처음부터 자못 치렬하게 번졌다. 제2군 제6사는 대악(戴岳)사장의 지휘하에 각 퇀의 돌격대(奋勇队)들이 사다리를 놓으며 견고한 성을 톺았으나 적들이 성 우에서 결사적으로 화력사수하는 탓에 첫 진공이 좌절을 당하였다.

포병련 련장 강파는 소속 부대를 지휘하여 기관총으로 남창의 정가교(郑家桥)를 사수하면서 적들과 용감히 싸웠다. 전투는 갈수록 치렬하고 전우들은 하나 둘 쓰러졌다. 마지막에는 강파 한 사람만 남았다. 강파는 죽을지언정 물러서려 하지 않고 적들과 좌충우돌하면서 격전을 벌리였다. 기관총은 끊임없이 불을 토하고 적들은 무더기로 거꾸러졌다.

남창 정가교전투의 피어린 현실이다. 나중에 강파는 날아오는 적탄에 맞아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필자는 오늘까지도 강파의 고향이 어디고 신상이 어떠한지 모르고 있다. 안다면 강파는 황포군관학교 출신 조선인혁명가이고 국민혁명 제2군의 포병련 련장이고 남창 정가교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는것 뿐이다.

국민혁명군 제2군 기관총대 련장 리동화(李东华)는 본명이 신악 (申岳)으로서 고령 신씨로 알려지지만 그의 고향과 생졸년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한국 나무위키에서는 신악을 경기도 양근군[현 경기도 양평군(杨平郡)]으로 소개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으로 알리고 있다. 생졸년도 관련자료에 따라 출생이 1891년설, 1892년설, 1893년설로 공존한다면 사망도 1942년설과 1944년설이 공존하는 실정이다. 사망을 두고 신악의 고령신씨 대동보는 1942년 봄에 중국 중경에서 전사하였다고 밝히여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리동화는 일찍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1919년에 벌써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으로 활동함을 보인다.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제5기생(1927.1~1927.8)은 모두 6명 뿐이고 리동화는 6명 가운데의 한 사람이며 보병과 제1보병대대에 귀속되여 활동하였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국민혁명군 제2군에 소속되여 기관총대 련장으로 부임하였다.

국민혁명군 제2군이 북벌에 뛰여든 후 리동화는 소속 부대를 따라 강서로 진격하여 남창진공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치였다. 리동화는 계속하여 부대를 따라 강서, 호남, 호북 전선에서 싸우면서 의창공격전 등에서 맹활약하였다. 1927년 3월에는 남경공격전에서 선봉으로 나서서 이름을 떨치였다.

image.png

 국민혁명군 포병영 영장 리검운 소속 제6군이 당년 남창에서 가진 조선인장교 김준섭 렬사 장례의식 사진. (사진자료)

그후 1938년 10월 리동화는 무한 한구에서 설립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는 조선의용대 본부 기요조장(纪要组长)으로, 1941년에는 조선의용대 부대장으로, 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리동화는 1945년 항일전쟁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리동화(신악)의 고령신씨 대동보가 전하는 1942년 봄 중경 전사설이 신빙성이 있어보인다.

국민혁명군 제2군 조선인 장교 강파와 리동화와 더불어 북벌전쟁에서 이름난 장교는 제6군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剑云)이라고 보아진다. 알려지는 편단자료들을 모아보면 리검운은 의렬단 출신으로서 리철호(李哲浩)라고도 불리우며 일찍 운남륙군강무당을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장판공청 조교(助教)로 임직하였다. 1926년 7월 제6군을 따라 북벌의 원정길에 오를 때는 제6군 포병련 련장이였다. 그는 초급장교의 신분으로 북벌군에 참가하여 포병련장으로서의 존재를 남김없이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리검운은 11월 5일, 부대를 따라 군벌 손전방의 사령부소재지인 강서 구강공격전에 나섰다. 그는 뛰여난 포격술로 구강포대의 손전방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여 일격에 포병영 영장으로 승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북벌군 속의 그의 소속부대는 재빨리 구강을 점령하고 진군방향을 남창으로 돌리였다. 그후 제6군은 제2군과 더불어 남경공격전에도 나서고 리검운은 싸울수록 전과를 늘여갔다.

1926년 10월 무한은 북벌군의 세상으로, 새 기상으로 넘치였다. 리검운은 진공목, 권준, 안동만 등과 손잡고 1927년 3월에 무한 조선청년들의 혁명단체-류악한인혁명청년회(留鄂韩人革命青年会)를 조직하고 이 청년회의 주력으로 뛰였다. 류악한인혁명청년회의 회원은 46명으로서 그들 거개가 쏘련에서 국민혁명군에 파견한 조선인장교들이 아니면 황포군관학교와 무한분교 출신들이였다.

1927년 봄 리검운 소속 국민혁명군 제6군은 계속 무창에 주둔해있었다. 리검운의 포병영도 독립포병영으로 불리우며 무창에 머물렀다. 그러던 6월말에 리검운은 자기의 숙소에서 이름난 항일운동가인 류자명선생을 맞이하게 되였다. 류자명은 항일독립단체인 의렬단 주요지도자의 한사람으로서 광주에 반년가량 머무르면서 의렬단 지도자 김약산, 즉 김원봉과 더불어 의렬단을 새로운 모습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결성하고 모든 사무를 보아온 사람이였다.

알고보면 류자명 선생은 광주에서 의렬단의 력사적 혁명전환을 이룩한 공로자이고 새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 주요인원과 당원들 태반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의렬단사람이지만 의연히 무정부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기에 그는 1927년 5월 4일, 국민당의 광주 ‘4.15’ 피비린 탄압을 피해 광주를 떠나 월말에 간신히 상해에 도착하여 한달 동안 체류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무정부주의 사상을 지키면서 어느 파에도 기울이지 않았다.

류자명은 상해에서 먼저 광주를 떠난 김약산을 만나려고 했는데 그가 상해에 도착하기에 앞서 김약산은 무한으로 떠났었다. 그리하여 류자명은 상해에 한달간 머무르다가 혁명의 새 기상으로 넘치는 무한으로 달려가 무창에 주둔하고 있는 리검운을 찾았다. 국민혁명군 제6군 포병영에는 리검운외에도 부영장 권준, 영부 부관 안동만과 최원, 최승년, 양검 등 많은 의렬단원들이 몸담고 있어 무한은 사실상 의렬단의 아지트, 본거지와 진배없다.

그런데 무한도 장개석의 상해 ‘4.12’, 광주 ‘4.15’반혁명 청당운동의 계속으로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汪精卫)가 ‘7.15’반혁명 청당운동을 벌리며 살판치는 데서 안전한 곳이 못되였다. 장개석, 왕정위가 련이어 혁명을 배반한 데서 중국의 절반 땅을 휩쓸던 기세드높은 북벌전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제1차 국공합작이 동강나면서 무한 경비사령부와 공안국은 공산당원과 좌익경향을 가진 진보적청년들까지 마구 체포하며 학살을 서슴치 않았다. 이럴 때 포병영 영장 리검운의 숙소는 그 어느곳보다 안전하여 좋았다. 부대생활이 넉넉한 데서 리검운 등 조선인들은 부담없이 류자명을 받들어 줄 수 있었다.

공산당원과 혁명자들에 대한 피비린 탄압이 이어지는 속에서 의렬단-조선민족혁명당은 무한에서 긴급회의를 가지였다. 김약산, 류자명 등 지도자들과 제6군 포병영을 망라한 리검운 등 의렬단성원들이 긴급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의 주목적은 제1차 국공합작의 파탄이 조선인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간의 분렬로 확대되는 것을 막고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려는 것이였다. 북벌전쟁의 고조 속에서 조선민족의 새 희망을 보아오던 리검운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렬이라는 현실이 그지없이 안타깝고 통분하기만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의 이 준엄한 력사적 관두에 결코 머리 숙이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이 7월말에 국민혁명군의 하룡부대와 엽정부대 등을 남창으로 움직이며 남창봉기를 밀고갈 때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무한에 이른 많은 조선인 중공당원들과 조선인혁명가들이 주저없이 무한을 떠나 남창으로 갔다. 그속에는 김약산 등 원 의렬단 조선민족혁명당 성원들도 섞이였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8월 1일에 남창에서 남창봉기를 일으키고, 12월 11일에는 광주에서 또 광주봉기를 일으켰다. 이 두차례 위대한 무장봉기에 수백에 달하는 우리 겨레가 쓰러지고 피를 흘리였는데 이 나날에 무한 국민정부는 갑자기 공산당 혐의라면서 제6군 포병영장 리검운과 부관 안동만을 체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부영장 권준은 포병영을 거느리고 호남으로 떠나고 무한에 없었다.

류자명이 리검운의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음식과 의복을 가지고 감옥에 가서 리검운네를 자주 면회하였다. 이국의 타향생활에 찾아줄 이 없는 리검운으로 말하면 그지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자기 숙소에 남은 류자명과 무한 의렬단원들의 경제생활을 돌볼 수 없는 것이 무척 안타깝기만 했다. 생활의 핍박으로 류자명 선생이 무창에 설립된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로 자리를 옮겼다는 말을 듣고 더욱 그러했다.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는 북벌전쟁의 포화 속에서 결성된 조직이다.

무한 무창에서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가 설립될 때 중국, 인도, 조선 등 대표들이 련합회 설립식에 참가하였다. 조선대표로는 류자명과 김규식, 리검운 셋이였다. 이것은 몇달 전에 있은 일인데 류자명 선생은 기거할데가 없어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를 찾으니 리검운은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검운은 무한 국민정부에 의해 체포되였다가 풀리기는 하나 그후 리검운의 활동은 오리무중이다.

1932년 10월 20일, 약산 김원봉은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으로 남경 교외의 탕산(汤山) 선사묘(善祠庙)라는 사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로 불리우며 1933년 4월까지 김세일(金世日), 윤세주, 리륙사(李陆史)를 비롯한 제1기생 26명을 졸업시키였는데 학교운영은 김원봉과 의렬단 지도부가 맡아 나섰다. 리철호로도 불리운 리검운을 비롯하여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인 리집중(李集中), 신악(申岳, 리동화), 김중(金鐘), 로을룡(卢乙龙), 박건웅, 권준, 왕현지(王现之 리영준), 한일래(韩一来)가 군사, 정치, 총무를 맡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이후의 리검운은 어떠할가? 필자는 그후의 리검운 활동자료들을 더는 접하지 못하고 있다. 리검운에 관심을 돌리는 누군가에 의해 조선인혁명가 리검운의 삶의 자취가 계속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