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하북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4명 렬사 (1)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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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4명 렬사를 작별하는 전우들.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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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말 1941년초부터 국민당 관할구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륙속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들어섰다. 1941년 6월 초순의 어느 날, 팔로군총부에서는 소재지인 료현(좌권현) 동욕진의 한 광장에서 총부 산하 각 기관 일군들과 일본인, 베트남인, 필리핀인들이 참가한 성대한 대회를 가지고 조선동지들을 뜨겁게 포옹했다. 팽덕회, 라서경 등 동지들이 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팽덕회 부총사령이 열정에 끓어넘치는 환영사를 했다.

“18집단군 70만 장병을 대표하여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우리 무기고의 문은 여러분 앞에 활짝 열려있습니다. 마음대로 고르고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그날 오후 팽덕회는 환영연회를 베풀어 조선동지들을 따뜻이 초대해주었다.

1941년 늦가을, 조선의용대는 팽덕회 부총사령의 배려와 팔로군 부대의 배합하에 여러 무장선전대로 나뉘여 적후선전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김학철, 최동광 등이 소속된 무장선전대 제2대 20여명 전사들은 2주야의 강행군 끝에 200킬로메터 밖의 원씨현 경내에 이르렀다. 팔로군의 한개 대대 약 300명이 제2대의 행동에 배합하여나섰다. 무장선전대는 낮에는 팔로군 부대와 더불어 협동작전을 벌리고 밤에는 적점령구에 숨어들어 군중 선전과 적군 와해 사업을 벌리였다. 그러다 보니 조선동지들은 하루에 기껏해야 네댓시간밖에 자지 못했는데 그나마 총을 안고 쪽잠을 자야 했다.

1941년 12월 11일, 제2대의 동지들이 성옹채란 마을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산 우의 초소로부터 적들이 달려든다는 신호가 전해졌다. 적이 쏜 하나의 박격포탄이 벌써 마을에 날아들었다. 조선동지들은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고 급히 산으로 올리달렸다. 그들에게는 적들이 절대 마을 안으로 달려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우리 동지들이 산 우의 유리한 지대에서 방어한 탓에 산 아래 적들은 얻어맞기만 했다. 그사이 마을의 민병들이 마을사람들의 철거를 맡아나섰다. 근 한시간의 격전 끝에 적들은 물러갔다.

조선동지들은 이튿날 성옹채에서 50여킬로메터 떨어진 호가장에서 팔로군 대대와 만나기로 하고 먼저 호가장으로 떠났다. 호가장은 적통치구역과 맞대고 있는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최전선에 자리잡고 있는 그닥 크지 않은 마을인데 마을 남쪽 몇리 밖에 일본침략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날(12월 11일) 저녁, 무장선전대 제2대 동지들은 한 백성의 집에 류숙하였다. 20여일 동안 처음으로 옷과 신을 벗게 된 조선동지들은 보초를 설 고상철을 제외하고 모두가 단잠에 빠졌다. 고상철은 지붕 우에 올라가 보초를 섰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옥하여 멀리 내다볼 수 없었다. 동틀무렵 보초가 지붕에서 내려와 동지들을 깨웠으나 우리 전사들은 설친 잠을 보충하려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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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자지러진 기관총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동지들은 급기야 자리를 차고 밖으로 내달렸다. 적정을 살펴보니 300명을 헤아리는 적들이 삼면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호가장에 있는 괴뢰군 가족이 일본군 거점에 가 고발했고 두개 중대가 넘는 적들이 밤도와 포위진을 치고 있다가 공세를 발동했던 것이다. 사태는 험악했다. 우리 대오는 대장 김세일의 지휘하에 마을 북쪽으로 포위망을 헤치였다. 김학철, 박철동, 손일봉 등 동지들이 맨 뒤에서 동지들의 철퇴를 엄호하였다.

찰나, 손일봉과 박철동이 적탄에 부상당했다. 일본군 소대장이 병졸 7명을 이끌고 손일봉한데 덮쳐들자 손일봉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한손으로 일본군 소대장의 목을 틀어쥐고 한손으로 수류탄을 뽑아들었다. 손일봉은 이렇게 적군 8명을 료정을 내고 피못에 쓰러졌다. 박철동도 적들과 박투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한청도는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적들과 결사적으로 싸웠다. 탄알이 떨어지고 적들이 에워싸자 그 역시 수류탄을 터치고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약 한시간 끝에 동지들은 겨우 마을을 벗어나 동쪽 산에 접근하였다. 헌데 그곳에서도 조우전이 벌어져 사태는 갈수록 험악했다. 이때 팔로군 대대가 달려와 반포위진을 치고 적들과 싸웠다. 적들은 황망히 물러갔다. 이날 혈전에서 손일봉(28살), 박철동(26살), 한청도(27살), 왕현순(24살) 네 동지가 영영 눈을 감고 김세광(29살), 김학철(25살) 두 동지가 중상을 입었다.

이것이 바로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벌어진 피어린 호가장전투이다.

후에 연안의 《해방일보》는 특집을 내여 희생된 조선동지들을 추모하였고 이듬해 2월 7일 중경에서도 추도식을 장중히 가지였다. 조선동지들의 련이은 희생은 중경의 주은래 동지를 심심한 애도에 잠기게 하였다. 그는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 셋의 이름으로 중경의 추도식에 만련(挽联)을 보내왔다. 만련의 글은이러하였다.

“조선의용대 전사한 동지들 천고에 빛나리. 어떻게 전사한 네명의 조선족동지들을 추모할가, 일본강도 공동의 원쑤를 때려눕히는 것이리!”

주덕, 팽덕회도 만련을 쓰고 《신화일보》에서도 추모의 만련을 보내왔다.

호가장전투는 말 그대로 중국을 들썽하게 한 전투였다. 해방 후 소학교교과서에 호가장전투에 관한 기사가 수록되였다. 1989년 1월 24일자 길림신문 3면에 실린 기행문ㅡ <렬사들의 고귀한 넋을 차마 잊을 수 없어>에 의하면 당년 조선의용군 전사였던 류동호 등 분들이 호가장을 찾아 네명  렬사의 무덤을 배알했을 때 당지 사람들은 “조선의용군이 그때 이 마을에서 싸웠기에 우리 마을이 국제적으로 이름이 나게 되였지요.”라고 하면서 조선의용군 동지들을 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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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4명의 렬사인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왕현순 네 동지를 아는 것 만큼 한분한분 소개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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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찬황현 황백평향 황백평촌 산기슭에 모셔진 조선의용군 손일봉 묘소. (2009년 8월 15일 현지촬영)

손일봉

(1912—1941)


손일봉(孙一峰)은 평안북도 의주태생이며 1912년에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생활형편이 하도 어려워 그는 반나절은 일하고 반나절은 공부하면서 의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였다.

가정생활은 다리가 불구가 된 아버지에 의해 가까스로 지탱되였다. 아버지는 워낙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였으나 1919년 3.1운동에서 부상을 입고 절름발이가 되였다. 손일봉은 3.1운동 때 겨우 일곱살이여서 뭐가 뭔지를 잘 몰랐다. 그 후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셈이 들자 아버지가 다리를 절면서 밭에서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만악의 일본놈들을 단숨에 죽여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의주는 압록강 대안의 한 고장이여서 겨울철이 돌아오면 남만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군들이 남몰래 얼음 우를 넘나들며 조선 변경지대에서 활동했다. 이 소식이 의주의 일봉한테도 전해졌다. 그때  11~12살의 소년이였던 일봉이는 아버지한테 혁명군에 참가하겠다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물론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지청구를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손일봉은 의주의 한 목재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하였다. 그 시절에도 그의 가슴속에서는 일본놈들에 대한 치솟는 분노가 꿈틀거리였다. 그러던 그는 1931년 초봄에 만 19살의 나이로 끝내는 고향을 떠나 홀몸으로 중국의 청도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돈 없는 그는 이국의 해변 상업도시에서 정처없이 거리를 헤매기도 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꼬물 만치도 없었다. 대신 청도에 머무른 2년간 일봉이는 실업했거나 실학한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곳에서 반일활동을 벌려 일본령사관의 중요감시대상으로 점찍혔다.

1933년 1월에 손일봉은 청도를 떠나 상해로 갔다. 상해도 청도와 마찬가지로 일본놈들이 살판을 치는 세상이여서 지도자를 찾지 못한 그는 한 시기 고민하다가 상해 홍구삼림자동차양행 서무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손일봉은 이름 대신 싸브로라는 가명을 쓰면서 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손일봉의 해당 소개자료를 보면 그는 소박하고 어리무던한 사람이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기백이 없는 사람으로 보기도 하나 이는 손일봉을 모르는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상해에 거주했던 그 시절에 손일봉은 복수에 불탄 애국자로서 몸에 늘 권총을 품고 다니며 일제경찰들과 한간들을 암살하였다고 한다.

1934년 3월 3일 상해 홍구신사에서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 리봉창 의사 의거사건에 이어 또 하나의 투탄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투탄사건의 공모자의 한 사람이 손일봉으로 알려진다. 그때 중국침략의 급선봉들인 일본 아리따 대사와 상해 륙전대 사령관이 상해 홍구신사 기념회에 참가하였다가 손일봉 등 한패의 조선애국청년들이 공모한 투탄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1934년 4월경에 손일봉은 상해를 떠나 하남 락양으로 갔다. 그는 락양의 국민당 중앙륙군군관학교에 시험을 쳐 입학하고 이 학교에서 군사를 배웠다. 락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손일봉은 1935년 10월에 또 광주로 가 중앙륙군군관학교 광동 제4분교에 들어가 단기포병훈련반에서 포병훈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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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7사변이 발발한 후 손일봉은 국민당 모 부대 포병 53퇀에 파견되였다. 후에는 포병 56퇀에 파견되여 간부훈련반 교관 겸 탄약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포병 54퇀에 근무하며 전차방어포련(战车防御炮连) 련장으로 활약했다고 알려지나 조선의용대 출신인 김학철의 소개에 따르면 련장이 아니라 포병련 중위패장이였다. 김학철은 국민당 부대에 있을 때의 손일봉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련장이 자리를 비우면서 중위패장 손일봉이 련장대리를 하게 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손일봉은 4문의 프랑스제 쏘로동포(고사, 평사 량용포)를 움직이면서 방어선교체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느닷없이 한개 중대가량의 일본군 기병대와 조우하게 되여 진퇴량난이였다. 포병이 기병과 맞다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적아의 거리는 사이에 실개천 하나를 둔 1000여메터에 불과하였다. 손일봉이 쌍안경으로 적들을 주시하니 일본군 지휘관도 말잔등에서 쌍안경으로 이쪽을 더듬고 있었다. 적 기병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선손을 써야 했다. 손일봉은 위기를 돌려세우고저 포수들에게 재빨리 류산탄을 장탄하라고 명령하였다.

“목표-좌전방, 1200메터-적 기병의 밀집대렬-사격!’

손일봉의 호령이 터지자 4문의 쏘로동포는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뜻밖의 날벼락에 적 기병 서너명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지고 아군의 포격은 계속되였다. 얼결에 얻어맞게 된 적 지휘관은 모진 매는 피하는 게 상수라고 생각했던지 진세를 헤아리지도 못한 채 급급히 퇴군령을 내리였다. 일본군 100여명 기병은 총 한방 쏘아보지도 못하고 퇴각하고 손일봉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따라서 포병대로 기병대를 격퇴한 손일봉의 전설적 무용담은 널리 퍼지였다.

국민당 부대에서 활동하던 시기 손일봉은 부대를 따라 1939년 9월 장사대회전과 1940년 6월 신양대회전 등 크고 작은 전역에 수십차 뛰여들었다. 신양 부근의 고량점에 주둔할 때 그는 의용대에서 활동하는 자기 친구한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중광군, 싸움터는 혁명청년의 구락부요… 군이여, 생각해보라, 혁명을 위해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바로 최대의 쾌락이 아닌가를…”

“…나는 개선하는 영웅이 못되면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이라도 되고 싶네! 중광군, 그대는 나의 영웅주의를 반대하지야 않겠지?”

친구는 인차 회답을 날리였다.

“난 그대의 영웅적 절개를 반대하지 않네… 인류를 위해 복무하는 영웅은 바로 혁명에 리로운 영웅인 거네. 우리 함께 어깨 겯고 전진합세.”

친구가 락양에서 활동할 때 조선의용대에서는 손일봉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친애하는 혁명동지, 우리는 동지가 여기 와서 사업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화북으로 가서 ××군과 함께 적후의 조선동포들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친구와의 편지거래, 조선의용대의 편지는 손일봉에게 혁명의 손길을 내밀었다. 드디여 1940년 8월초에 그는 국민당 부대를 떠나 락양에 갔으며 락양에서 인차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다. 손일봉은 자기를 환영하는 조선의용대 환영대회 답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