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하북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4명 렬사 (2)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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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4명 렬사를 남으로 60~70리 밖 찬황현 황백평촌 산기슭에 이장하고 추모하는 당지 군중들.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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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초에 손일봉은 국민당 부대를 떠나 락양에 갔으며 락양에서 인차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다. 손일봉은 조선의용대 환영대회 답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모두가 가서 사업해야 될 곳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국민당부대를 떠나 락양에 온 경위를 말하면서 앞으로 조선의용대에서 한마음으로 싸워 가겠다고 내심을 터놓았다.

그뒤 손일봉은 조선의용대를 따라 국민당통치구역인 락양을 떠나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갔으며 화북의 적후에서 맹활동을 벌려 나갔다. 그와 그의 소속 의용대는 팔로군부대의 배합하에 여러 무장선전대로 나뉘여 적후선전사업에 나서게 되였고 2박 2일의 강행군 끝에 200키로메터 밖의 원씨현 경내에 이르렀다.

팔로군의 한개 대대 약 300명이 손일봉소속 제2대의 행동에 배합하여 나섰다. 무장선전대는 낮에는 팔로군부대와 더불어 협동작전을 벌리고 밤에는 적점령구에 숨어들어 군중선전과 적군와해 사업에 열을 올리였다. 1941년 12월 11일, 제2대의 동지들은 성옹채란 마을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느닷없이 달려든 적들을 물리친 후 성옹채에서 50여킬로 떨어진 호가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름난 호가장전투는 바로 이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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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찬황현 황백평향 황백평촌 산기슭에 모셔진 조선의용군 박철동 묘소. (2009년 8월 15일 현지촬영)

박철동

(1915~1941)


박철동(朴喆东,일명 주동욱)은 고향이 충청남도, 어려서 생활고로 공립보통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키가 작달막하고 호협한 성격의 소유자인 박철동은 공립보통학교 시절에 벌써 충주학생운동에 가담한데서 일경의 요시찰대상으로 되여 1931년 2월에 중국 심양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심양에 도착한 후 박철동은 중국 동북의 추위에 동상을 입기도 하고 허기진 배를 달래며 거리를 방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일자리를 찾아 발을 붙였고 중국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중국말과 글 배우기 수단은 야학이였다. 1933년 18살되던 해에 박철동은 야학에서 한 청년과 사귀게 되였는데 그 청년은 남경 조선혁명당의 파견을 받고 온 혁명동지였다. 이해 10월초에 박철동은 사귄 친구의 소개로 심양을 떠나 남경으로 향했다.

남경으로 가는 길은 걸음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천만한 길이였다. 천신만고 끝에 상해 부두까지 갔으나 일제 경찰한테 잡히여 상해 일본령사관에 억류되였다. 박철동이 멍청이 노릇하며 단식으로 적들의 고문과 회유에 대처하니 일본인들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겨 그를 잠시 홍구의 일본려관에 연금하였다.

박철동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기 행동을 감시하는 사람을 따돌려야 했다.

어느 날 저녁 감시자가 마침 술에 곤죽이 되여 잠에 곯아떨어졌다. 박철동은 아무 것이나 쥐여 이불을 불룩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감시자의 단검을 훔쳐가지고 가만히 문을 나섰다. 공교롭게도 려관집 주인과 마주쳤고 려관주인은 또 감시자를 흔들어 깨웠다.

경찰이 대문을 지켜서고 감시자가 뒤쫓아왔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였지만 박철동은 순순히 잡힐 수가 없었다. 그는 경찰과 감시자가 목과 허리를 그러안을 때 단검으로 감시자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 또 경찰의 목을 들이 찔렀다. 몸이 풀려나자 그는 한사코 죽기내기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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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월에 박철동은 변성명하고 락양의 중앙륙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들어갔다. 1년 반 만에 졸업하고 1935년 7월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니 혁명가의 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1935년 이해 그는 조선민족 혁명당의 파견을 받고 화남으로 가다가 복건 천주나루터에서 또 불행히 일제특무에게 걸려들었다. 일본놈들은 박철동을 심문, 구타하다가 일본 규슈에 압송하여 유기형 3년에 언도하고 규슈감옥에 가두었다.

1938년 가을에 박철동은 드디여 자유를 얻고 충청남도 고향땅으로 돌아갔다. 때는 이미 중국의 항일전쟁이 폭발한 뒤였다. 박철동은 적들이 비밀리에 늘인 끄나불을 피해 중국의 산서 운성(运城)으로 탈주하고 말았다.

박철동은 운성에 간 후 한 조선애국청년의 집에 기숙하면서 운성의 실업청년들 속에서 반일활동을 벌리였다. 반일활동의 한 표현형태가 매일 밤 비밀리에 삐라를 살포하고 표어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던 하루 그는 밤에 벽에다 표어를 쓰다가 한 친일주구에게 발각되여 그 밤으로 운성을 떠나야 했다.

운성 다음의 목적지는 락양, 박철동은 1939년에 락양에서 결연히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여 눈에 띄는 활약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호가장전투에서의 최후를 제외한 박철동의 활동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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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백평촌 산기슭에 모셔진 조선의용군 리정순 묘소. (2009년 8월 15일 현지촬영)

리정순

(1916~1941)


리정순(李正淳)은 일명 왕현순이고 1918년 태생이고 평안북도 강계 출생이다. 1933년, 남경에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조선에 사람을 보내여 뜻있는 혁명청년을 모집하였다. 이에 왕현순은 1933년 겨울에 비밀리에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넜다.

리정순은 중국 동북을 거쳐 남경에 간 후 남경의 의렬단간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2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후 그는 광동 국립중산대학 부중, 중원학교에서 수학,광동 국립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하고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1937년 7.7사변 후 리정순은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38년 5월에 졸업하고 그해 10월에 무한 한구에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였다.

그후 리정순은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배치되여 줄곧 전선에서 뛰였다. 리정순이 참가한 공격전으로는 상북대사평(大沙坪), 통성, 석산, 백예교 등이다. 그외에도 삐라뿌리기, 공로파괴, 지뢰묻기, 전선대 끊기, 전기줄 끊기, 적병영 습격하기, 부상병 구원 등에서도 모범을 보이였다.

1940년에 리정순은 남악서남유격훈련반 훈련을 거치고 조선의용대 제3지대에서 활동, 후에는 화북지구에서 적후선전사업에 열을 올리였다. 1941년 12월 11일, 리정순은 하북성 호가장전투에서 26살을 일기로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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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백평촌 산기슭에 모셔진 조선의용군 최철호 묘소. (2009년 8월 15일 현지촬영)

최철호

(1915~1941)


최철호(崔铁镐)는 일명 한청도, 1915년 6월 19일 충남 대전에서 태여났다. 1929년에 대전 제2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경제난으로 학업을 접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삼천리강산에는 백정계층의 신분제도를 반대하는 형평사운동이 터져올랐다. 최철호는 부형을 도와 상업활동을 벌리다가 형평사운동에 적극 뛰여들었다.

1935년에 중국의 중경이나 남경에 반일군사간부 양성에 취지를 둔 군관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철호는 누구의 소개도 없이 홀몸으로 중국 심양으로 왔고 심양에서 김해암을 알고 1936년 5월에 남경으로 떠났다.

1937년 7.7사변 후 최철호는 락양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6기생으로 전문훈련을 받았다. 특별훈련반을 졸업한 후 최철호는 한구에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서 항일선전활동에 나섰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였다. 최철호는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소속되여 국민당 제1전구와 제5전구에서 적후선전사업에 뛰여들었다. 그후 국민당 제1전구에 들어가 산서 중조산(中条山) 등 지에서 간고한 적후선전사업에 나섰다. 최철호의 남다른 재간은 연극과 음악이였다. 더우기 연극 면의 특장은 서안, 락양, 로하구 등지 항일군민들의 절찬을 받았다.

최철호는 로하구, 락양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 주임으로 파견되였다. 그는 조선의용대 제3지대의 북상항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1941년 12월 11일, 하북 호가장전투에서 최철호는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때 나이가 27살이였다.

호가장전투가 끝난 후 팔로군부대와 조선의용대에서는 희생자들을 찾아 마을 뒤편의 크지 않은 평지에 림시로 초장하였다. 호가장 남쪽 몇리밖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수시로 들이닥칠 수 있기에 호가장에 묘소를 앉힐 수는 없었다. 며칠 사이 당지에서는 손일봉 등 네명의 렬사묘소를 남으로 60~70리 떨어진 찬황현(赞皇县) 황백평향(黄柏坪乡) 황백평마을 언덕으로 이장하게 되였다. 황백평마을은 진기로예변구(晋冀鲁豫边区) 제1분구 사령부가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날은 1941년 12월 15일, 팔로군부대와 조선의용대, 찬황현 동지들 수백명이 황백평마을에 모여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네명 렬사들을 위한 이장식을 장중히 가지였다.

호가장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렬사들은 원씨 경내에서 남으로 60~70리 밖 찬황 경내에 이장하게 되였으니 필자는 2009년 8월 15일 불원천리 하북 찬황을 찾았고 찬황현성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황백평으로 향했다. 현성에서 황백평까지의 거리는 30킬로메터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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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황현성을 벗어나 황백평에 이르니 11시 30분이였다. 길가에는 시골마을들에서 팔려고 싣고 온 대추주머니들이 가득 쌓여있어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택시는 반시간도 안되여 황백평향 황백평촌에 이르렀다. 큰길가에는 돌거북우에 우뚝 일어선 ‘순국렬사기념비’가 뜨거이 맞아 주었다. 한국의 순국렬사유족회와 황백평촌에서 2002년 12월 26일에 함께 세운 기념비인 것이다. 큰길에서 내려 말라버린 강바닥을 지나 황백평촌에 이르니 마을사람들은 저기 마을 뒤 언덕에 4명의 렬사묘가 있다고 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따라 등판따라 한참 달리니 내리막 길이 나졌다. 어딜보나 키를 넘는 옥수수밭이고 있어야 할 렬사묘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마을로 돌아와 50대가 넘은 한 중년남자분과 물으니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나서는 것이였다. 렬사묘는 우리가 달린 언덕길이 아닌 마을 뒤 언덕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뒤 언덕 우에는 풀속에 묻혀버린 ‘조선의용군선렬묘소옛터(朝鲜义勇军先烈墓所旧地)’표지석이 있었다. 묘소는 보이지 않고 손일봉, 리정순(일명 왕현순), 최철호(일명 한청도) 세 렬사의 묘소표지석이 련달아 나타났다. 필자가 의아한 눈길을 던지니 중년분은 허허 웃으며 여기는 원래의 4명 렬사묘소 자리이고 몇해 전에 조금 웃쪽 언덕 펑퍼짐한 곳에 이장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세멘트에 자갈돌을 총총히 박아만든 세멘트길 따라 나아가는 것이였다.

말수는 적었지만 고마운 분이였다. 그와 함께 언덕길을 따라 수십메터 앞으로 더 나아가니 과연 펑퍼짐한 곳에 자리한 4명의 렬사묘소가 나타났다. 4명의 렬사묘소는 앞면을 제외한 삼면을 낮다란 세멘트 담장으로 두르고 그안에 4명의 렬사를 모시였는데 묘소 앞 오른쪽에 보통 사람 키보다 조금 낮은 ‘순국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었다. 순국렬사기념비 뒤로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차례로 최철호(한청도) 묘소, 리정순(왕현순) 묘소, 손일봉 묘소, 박철동 묘소가 자리하고 묘소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보니 황백평마을 뒤 언덕 호가장 4명 렬사묘는 한국 순국선렬유족회와 황백평촌에서 2002년 12월 26일에 바로 아래켠의 원 묘소를 웃쪽으로 이장하면서 일정한 규모로 새롭게 꾸민 렬사묘였다. 렬사묘 비석마다에는 비문이 새겨져 렬사의 략력을 알리고 있었다.

  필자가 안내자로 나선 중년분에게 근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조선의용군 4명 렬사의 묘소가 잘 모셔져 있는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더니 그는 당년 조선의용군은 국제주의 전사로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희생되였으니 그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신성한 책임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