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피어린 항일전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렬사들 (1)

2022-07-11

지난 20세기 40년대 초엽 태항산항일유격근거지에는 조선인혁명가들로 구성된,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이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피어린 항일전에서 선후하여 40여명의 동지를 잃었다. 그중 소수 사람은 항일전의 험악한 생존환경에서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지금까지 불러보는, 항일전의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쓰러진 조선의용군 40여명의 동지들 존함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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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백평촌 산기슭에 모셔진 조선의용군 4렬사 묘소.(2009년 8월 15일 현지촬영)

진광화(陈光华), 석정(石鼎), 문명철(文明哲), 손일봉(孙一峰), 박철동(朴喆东, 주동욱), 리정순(李正淳, 王现淳), 최철호(崔鉄镐, 한청도), 림평(林平), 장문해(张文海), 엽홍덕(叶鸿德), 김산륜, 오균(吴均), 서각(徐觉), 호철명(胡哲明, 한운), 호유백(胡维伯), 김명화(金明华), 최영, 한락산(韩乐山), 서영연(徐永然), 한진, 김학무(金学武, 최중길), 김이륜(金已伦), 한동산(韩东山), 진락삼(陈乐三), 최지남, 리용연(李镛演), 김영신(金永新), 관균(关均), 한일래(韩一来), 림철(林哲), 최결순(崔缺錞), 왕곤순(王昆淳), 리세영(李世荣), 리원대(李元大, 마덕산), 김석계(金石溪), 진원중(陈元仲), 장봉상(张凤翔), 여해암(余海岩), 정여해(郑如海), 김정희(金鼎熙), 진일평(陈一平)…

(정여해, 김정희, 진일평은 조선의용대시기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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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ㅡ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이 보인다.(2009년 8월 16일 현지촬영)

이번 내용은 먼저 림평, 장문해, 엽홍덕, 김산륜, 최영, 한락산, 서영연, 한진, 오균, 서각 등 10명 렬사를 조명한다. 이들 10명 렬사는 모두 당년의 연안 《해방일보》, 《조선의용대통신》, 조선의용군 출신인 한청의 회고록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림평

(1909-1942)


림평(林平) 동지는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분회의 선전위원이였다. 1942년 8월 15일에 그는 장질부사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는 충청도 태생이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서울 보성고급중학교와 보중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기간 그는 청년동맹에 참가하여 여러가지 반일활동에 종사하였다. 1929년에 일어난 학생운동 즉 ‘15만 학생, 180여개 학교, 반년 시간’(필자주: 광주학생시위운동을 가리킴)이라는 장거 가운데서 그는 적극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이였다. 그는 쏘련사람이 꾸리는 공업대학에 다녔고 조선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34년에 그는 이 당의 좌파-공산주의자전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있었다. 1941년 6월에 화북에 왔고 8월말부터 진찰기분회에서 사업하던중 3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떴다.

—1942년 8월 27일부 연안 《해방일보》에서



장문해

(1922-1942)


조선 평안북도 선천읍 태생이며 올해 21살이다. 장문해(张文海)의 아버지는 1919년 3.1운동 때에 일제에 반항하는 투쟁에 적극 참가했다. 그 후 적들의 핍박으로 온 가정이 상해 프랑스조계지에 망명하였다. 그의 가정은 살림이 극히 빈곤한 혁명가정이였다.

1926년에 그는 상해 프랑스조계지에 있는, 조선인이 꾸리는 인성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하였다. 그해에 프랑스인이 꾸리는 상해보산학교에 진학하였다. 1935년에 그의 아버지가 적들에게 체포, 투옥되였다.(지금도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적에 대한 적개심과 애국열정으로 가슴을 불태운 장문해 동지는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7.7사변 후 단기간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8년에 한구에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한구가 함락되자 그는 군대를 따라 여러 전구로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상북대회전에서 두차례나 싸움에 참가하여 영용 과감한 전투적 작풍을 남김없이 발양하여 ‘모범조선군관’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1939년에 신사군에 파견되여 6개월간의 단기훈련을 받고 조선의용대 독립분대에 배치되여 사업하였고 제3전구 금화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초여름에 총대부에서 맡기는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비밀리에 상해에 잠입하여 조선인민의 상황과 적정을 조사하였고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을 조직하였다.

1941년 8월에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그는 적들의 혹형을 받으면서도 완강히 투쟁을 견지하였으며 틈을 타서 일본놈 몇을 칼로 찔러죽였다.(필자주: 조선의용군 출신 한청이 자기의 《한청항일혁명회상록》에서 회고한 사실은 이와 다르다. 한청은 헌병들이 장문해를 감방에 밀어넣었고 간수가 재차 그를 끌고 고문실로 들어갈 때 번개같이 간수의 총을 빼앗아 헌병 몇을 쏴죽였다고 한다.) 놈들에게 사형당하기 전에 그는 사형장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을 견책하였으며 “조선민족의 위대한 혁명정신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용감히 웨쳤다.

—1942년 9월 20일부 연안 《해방일보》에서



엽홍덕

(?-1941)


죽음은 워낙 인생행로의 귀속으로서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홍덕 동지의 죽음은 그야말로 우리의 상상 밖이다. 서른살도 안된 젊은이, 더우기 조선혁명의 전야에 이러한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에 대하여, 우리의 조국에 대하여 그 얼마나 큰 손실인가!

홍덕(鸿德) 동지는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간부 가운데의 한분이고 조선민족혁명당의 핵심인물 가운데의 한분이다. 지난해 ×월 중순, 그는 조선의용대 1분대를 이끌어 전선에 나가던 도중 락양을 거치다가 쌓인 피로로 인한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락양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중국의 항전을 위해 희생되였고 조국의 혁명을 위해 희생되였다.

홍덕 동지는 학문이 매우 연박하다. 그는 조선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정치와 군사는 그의 천직이였다. 후에 신철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등 연구에서 모두 뛰여난 성취가 있었다. 특히 중국 항전 이후 수년간에 그는 놀라운 진보를 가져왔다. 리론면과 실천면에서 그는 성취가 뛰여나 가장 희망에 찬 청년간부로 떠올랐다.

홍덕 동지는 보기에는 그토록 의젓하고 기민하고 랭정하지만 일상생활과 사람과의 접촉에서는 화애롭고 자상한 마음을 가지였다. 그는 랭정함 속에 따스함을 두었기에 그와 접촉한 사람이라면 모두 그의 지성과 열성에 감화되여 령혼이 거센 렬화 속에서 타오르는 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기에 그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홍덕 동지는 진보를 추구하는 청년혁명자였다. 그의 근면한 학습정신과 태도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정확한 리론, 소탈한 문필, 심각한 관찰, 정밀한 분석 등은 모두 우리가 따라배울 소재로 된다.

홍덕 동지는 혁명에 대한 책임이 중대하고 열정이 뛰여났다. 그는 조국해방에 가장 충실한 혁명자이고 조선 혁명청년의 빛나는 전범이다.

홍덕 동지의 형상은 영원히 그의 평생혁명의 빛나는 장에 새겨질 것이고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홍덕 동지의 정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ㅡ《조선의용대통신》, 제40기, 1941. 10



김산륜

(1919-1943)


“【신화사 태항 17일발 통신】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청년혁명학교 세 단체는 본월 6일 태항 북부 모 지구에서 집회를 열고 정의의 사업을 위해 몸바친 문명철, 김산륜 두 렬사를 침통히 추모하였다…”

김산륜 렬사는 올해 25살이다. 집살림이 극빈하여 유년시절부터 견습공으로 있었던 그는 자유 없는 쓰라림을 가슴 아프게 느끼면서 애타게 광명을 바랐다. 마침내 그는 1939년에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이번 반‘소탕’전에서 그는 불행히 적들과 조우하여 영용히 박투하던중 장렬히 희생되였다.

추도대회는 여름밤의 고요 속에서, 더없이 슬프게 들리는 추도가의 노래 속에서 시작되였다. 먼저 조선의용군의 지도자 무정 동지가 연설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 추도회에서 피와 힘이 솟구침을 느낄 뿐 예상의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우리는 최대의 희생으로써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복수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팔로군 129사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명철, 김산륜 두 렬사는 (항일구국의) 싸움터에서 희생되였습니다. 우리 함께 그들의 유지를 계승해나갑시다.”

일본 반전동맹 대표 다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일본과 조선인민은 더욱 긴밀히 단결하여 공동의 원쑤 일본파쑈를 타도합시다.”

ㅡ1943년 6월 18일부 연안 《해방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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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설립 사진.(무한 한구, 사진자료)

조선독립동맹의 네 렬사


【신화사 태항 15일발 통신】 본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지난달 20일에 모 지구에서 추도회를 열고 최근 여러 적후에서 영용히 희생된 조선 혁명청년들인 최영, 한락산, 서영연, 한진 등 4명의 렬사를 애도하였다. 다년간 조선혁명운동에 발벗고 나선 그들 가운데서 어떤이는 적들과 총을 맞대고 싸우는 마당에서 영용히 전사하였고 어떤이는 피로에 피로가 겹쳐 병마의 시달림을 받다가 숨지였다. 그들이 희생된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가슴을 파고드는 슬픔과 애석함을 금치 못하였다.

ㅡ1944년 2월 22일부 연안 《해방일보》에서

필자주: 조선독립동맹 네명의 렬사중 한락산은 본명이 천룡구(千龙九)이며 일명 천수봉(千水峰), 한락산(韩洛山), 최만성(崔万声), 진락삼(陈乐三) 등으로 통하였다. 1915년에 충남 부여군 부여면 가증리 317번지에서 출생,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1기 제2총대 기병과를 졸업한 후 특별반 제6기 제4중대 견습군관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말 연안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산동분맹과 화북지대에 편입되였다. 그 후 그는 화중 신사군 제4사 사령부 군사교원과 교육참모를 지내다가 1941년 4월 6일 하남성 영성현 만루전투(永城县万楼战斗)에서 희생(김학철전집 7 ㅡ《항전별곡》,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12년 11월 제150페지, 제279페지)되였다.

본문 서두에서 밝힌 40여명 렬사들중 한락산과 진락삼이 이명동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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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에서 담장에 구호를 쓰고 있는 조선의용군 전사.(사진자료)

오균

(1909ㅡ1943)


오균(吴均)은 항일에 몸바칠 때 35세였다. 오균은 조선 강원도 사람이다. 1932년에 의렬단에 가입하였고 그해에 중앙군사학교 호북분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남경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졸업생이였댜. 그 당시 그와 함게 졸업한 학생들로는 윤공흠, 한광무, 정률성, 지일청, 장걸, 여성무, 장지량, 송문욱, 진동방, 강남해, 양휘, 황민 등 60명이였다.

오균은 1935년에 남경조선혁명간부학교 제3기의 소대장직을 맡았었다. 그는 성격이 부드럽고 붙임성이 있으며 학식수준이 매우 높은 훌륭한 소대장이였다. 그는 1938년 봄에 연안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갔고 졸업한 후 1940년에 진기로예군구 태악군구 사령부에 배치되여 대적공작을 하였다. 1943년 반소탕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는 태항군구 사령원 진갱의 호평을 받은 조선인간부로서 중조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자기의 청춘을 바치였다. 그는 중조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ㅡ《한청항일혁명회상록》(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11년 12월)에서



서각


서각(徐觉)은 본명이 장도성(张道成)이고 일명 박희출(朴熙出), 오균(吴均), 평북 선천군 합산면 원봉동(宣川郡合山面圆峰洞) 태생이다. 장익수(张益洙)의 장자이고 조선민족혁명당 특무대원으로서 선후하여 조선혁명간부학교 제3기와 중앙군사학교 특별훈련반 제4기와 제6기를 졸업하였다. 조선의용대 제2구대 대원, 화북지대 대원이며 1941년에 산서성 림분시 향녕현 점아평(乡宁县店儿坪) 부근에서 실종되였다.


필자주: 김학철전집 7 ㅡ《항전별곡》(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12년 11월 제278페지)에 따르면 김학철 선생은 오균과 서각이 이명동인이라고 밝히였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오균과 서각은 고향으로부터 경력 모두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다르다. 본문은 오균과 서각을 각기 다루면서 오균과 서각을 두고 계속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