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피어린 항일전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렬사들 (2)

2022-07-25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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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태항산항일근거지ㅡ산서성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 마을에는 오늘도 그제날 조선의용군이 쓴 구호가 보인다.(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이는 지난 40년대 중반 팔로군에 소속된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에서 활동할 때 김학철 작사, 류신 작곡으로 지은 조선의용군 <추도가>로서 40년대 초반과 중반 조선의용군 동지들이 항일전쟁에서 희생될 때면 추도식에서 먼저 이 추도가를 불렀다. 1945년 8월 10일부 연안 《해방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에서 가진 조선독립동맹 진찰기분맹의 오민성 추도대회에서도 추도회는 비장한 이 추도가의 노래소리로 시작되였다.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나 그 후의 조선의용군에서 희생된 동지들은 얼마일가, 다시 보지만 아래의 조사자료들이 이를 잘 알려주고 있다. 먼저  당년 조선의용군 출신 최강 로혁명가가 2006년 2월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조선의용군사》에서 밝힌 자료를 보기로 하자.

“1942년 10월 12일에 거행된 조선의용군기념모임에서 발표한 데 의하면 4년간(1938년-1942년) 조선의용군 희생자가 모두 33명이였다. 이 집계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여러 면의 자료를 종합해볼 때 30여명이 희생된 것만은 확실하다.”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희생자가 30여명임을 밝히는 연구자료이다. 이 자료외 조선의용군 희생자 30여명을 언급한 자료를 보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활동한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을 전문 연구하는 필자에겐 이 33명쯤이 기성사실로 되여버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조선의용군 출신 김학철 선생은 김학철전집 7ㅡ《항전별곡》(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12년 11월)에서 조선의용군 출신 희생된 전우들을 심심히 그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 군관학교의 교문을 나서서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던 그날까지 사이에 희생된 전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난다.”

이어 김학철 선생은 24명의 조선의용군 희생된 전우를 밝히고 있는데 그중 리세영, 서각, 진락삼, 김석계, 장봉상, 진원중, 여해암 등 7명은 상기 33명 가운데 속하지 않은 희생자들이였다. 이들 7명까지 하면 조선의용군 출신 희생자들은 40여명을 훨씬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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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항일근거지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은 하북성 섭현 섭성진 중원촌 원정사.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그외 필자는 오민성 등 몇몇 희생자들 자료를 더 찾아냈다. 지금까지 밝혀낸 조선의용대 시절과 그 후의 조선의용군시절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희생된 동지들은 40여명으로 헤아려진다. 먼저 김학철전집 7ㅡ《항전별곡》에서 새로 밝힌 6명 조선의용군 출신 희생된 전우를 보기로 하자.


김정희

김정희(金鼎熙), 김정희(金正熙)라고도 부른다. 1914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  정양동(定州郡葛山面鼎阳洞)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 1933년 경성중동(京城中东)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8월에 조선민족혁명당의 파견으로 광동 중산대학 공학원 토목공정학부에서 학습. 1936년 8월에 공학원기계공정학부로 옮기다. 그는 중산대학 축구대 운동원이였다. 1937년말에 조직의 지시로 중앙군교 특별훈련반 제6기생으로 훈련을 받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 대원으로 페결핵을 앓다. 1939년 3월 계림을 거쳐 중경, 로하구(老河口), 락양으로 전전하며 병마를 안고 싸우다. 1940년 9월 3일 서안 홍십자병원에서 병사, 멀리 고향에는 어머니와 세 동생이 있었다. ㅡ149페지


여해암

중앙군교 특별훈련반 제6기 졸업, 조선의용대 제2지대 대원.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화북으로 진출한 후 국민당통치구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 (원 조선의용대) 제2분대에 편입. 분대장은 김창국(金昌国)이고 대원은 여해암, 심세화(沈石華), 홍순애(洪顺爱), 최계화(崔桂華), 김성렬(金聲烈), 한찬거(韩赞琚) 등. 1943년에 여해암 소속 제2분대는 안휘성 륙안(六安)사회복무사로 파견되고 그중 여해암, 김성렬, 한찬거 등 3명 대원이 적들에게 체포되다. ㅡ148페지


김영신

김영신(金永新), 본명 김문찬(金文燦), 별명으로 김정수(金正水), 김영신(李永新)으로도 불리우다. 원적이 조선 평안도이고 출생은 중국 길림으로서 일찍 김구의 특무대, 조선청년전위동맹에서 활동. 그 후 선후하여 락양분교 조선인반과 중앙군교 특별훈련반 제6기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제2지대 제3분대 분대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대원으로 뛰다. 1943년에 병으로 태항산에서 별세하다.ㅡ149페지


진일평

진일평(陈一平), 진일호(陈一浩)라고도 불리운다. 남경중앙대학을 다니다가 중앙대 재학중 1935년 8월 조선혁명동지회(10월회) 결성에 참여.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제6기를 마치다. 6기생들 가운데서 성적이 월등하다. 1939년 4월 계림에서 차를 타고 전선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도로에 락석(落石)이 쏟아지는 데서 조난당하다. 향년 25세. ㅡ75페지


리세영

리세영(李世荣), 본명 신응남(申應南), 별명으로 신기성(申箕星), 신계서(申继胥), 1912년 강원도 통천군 욕곡면 신흥리(通川郡歙谷面新兴裏)  13번지 출생. 조선의용대 제1지대 제1분대 분대장. 1939년 하남 신향(新乡)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일본군에 살해되다. ㅡ103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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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섭현 하남점진 조선의용군 옛 주숙지.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김석계

김석계(金石溪), 본명 김광구(金光求), 별명으로 김산광일(金山光一). 전남 보성군 벌교읍 고정리(寶城郡筏桥邑固定裏) 629번지 출생. 1931년 3월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천진 건축도거리 업주 석문(石门, 석가장)판사처에 취직. 1939년 5월 락양에서 조선의용대 가입. 1942년 5월 2일 석문에서 체포되여 1943년 6월 북평 일본헌병대에 의해 살해되다.


오민성

오민성(吴民星, 1916-1945)은  1937년 12월에 중앙륙군군관학교 성자 강릉분교에 입학, 1938년 5월 졸업. 그해 10월 조선청년전위동맹 계렬부대인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가담하고 락양의 제1전구 장관사령부에서 항일활동에 나서다. 1941년초 화북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전이하여 화북독립동맹 진찰기분맹 맹원으로 활동. 1945년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ㅡ《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년 8월 초판) 제283페지에서


(주: 45년 8월 10일부 연안 《해방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에서는 8월 5일,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대강당에서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 주임 리성호와 진찰기분맹 오민성의 추도대회를 가지였다. 추도대회는 비장한 추도가의 노래소리로 시작되면서 먼저 사회자로부터 리성호, 오민성 두 동지의 생전의 눈물겨운 영용한 투쟁사적을 소개하였다.

김교장이 추도사를 드리였다. 그는 추도사에서 “오민성 동지는 혁명투쟁중에서 왜놈에게 피살된 자기 부친의 원쑤를 잊지 않고 옳바른 혁명의 길에 올라 부친을 위해, 전체 조선인민을 위해 복수하였다.”고 하면서 “동지는 비록 희생되였지만 그들의 투쟁정신과 우량한 품성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배우며 희생된 이들과 민족을 위해 복수해야 합니다.”고 강조하였다.)

(필자 주: 사실 추도대회의 리성호는 희생되지 않았다. 이는 잘못 알려진 소식에 따른 오류였다.)


진원중

조선의용대 대원 진원중(陈元仲, 1908~?)은 평북 용천 출신이고 1935년 4월 의렬단(义烈团)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그해 9월에 졸업. 졸업 후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특무부에 배속되여 활동하다가 11월에 이 민혁당을 탈퇴하고 상해로 가 동제대학에 입학. 1937년 12월 중앙륙군군관학교 성자 강릉분교(江陵分校)에 입학, 이듬해 1938년 5월 졸업.

1938년 10월 무한 한구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 조선청년전위동맹 계렬부대인 조선의용대 제2지대 부지대장으로 활동.

ㅡ《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년 8월 초판)제478페지에서


한일래

한일래(韩一来,1896~?)는 충남 부여 출신. 중국으로 망명한 후 하문대학을 졸업. 의렬단에 가입하고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 모집과 련락에 참여. 1936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화남지부 총책임자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비서처에서 활동. 1940년 2월 이후 조선의용대 편집위원 겸 조선민족해방동맹 간부로 뛰다.

ㅡ《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년 8월 초판)제527페지에서


김명화, 호유백, 호철명 세 조선의용군 세 렬사는 조선의용군 출신들인 한청과 최강 회고록에 나오는 개략적인 소개이다.


김명화

김명화(金明华)는 조선 평안도사람이였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어릴 때부터 로동하였다. 그러다 1939년 자유가 그리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였다가 25세에 희생되였다.

ㅡ최강, 《조선의용군사》(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06년 2월)에서


호유백

호유백(胡维伯, 1912ㅡ1943)은 항일에 몸바칠 때 겨우 32세였다. 그는 경상도사람이다. 1929년에 광주학생반일운동에 뛰여들었기 때문에 일본헌병들의 요시찰인이였다.

호유백은 핍박에 못 견디여 1935년에 중국에 와 남경시 교외의 황룡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청과 동창생이였다. 호유백은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고 1937년초에 재중국 조선공산주의자전위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는 내가 재중국 조선공산주의자전위동맹에 가입할 때 소개인으로 되여주었다.

호유백은 1938년 5월에 중앙군사학교 호북분교를 졸업하고 1938년 10월 10일에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2지대 정치지도원직을 맡았다. 1941년에 진기로예항일근거지에 전입하여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 가입하였고 1942년 8월 15일에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였다.

호유백은 1943년에 조직의 수요에 복종하여 적들과의 담판에 참가하였다. 담판을 마치고 돌아올 때 적들에게 포위되였다. 포위권을 뚫고 나올수 없게 되자 그는 권총으로 반격하다가 나중에 자결함으로써 혁명자의 고결한 지조를 지켰다. 호유백 동지의 이름은 영생불멸할 것이다.

ㅡ《한청항일혁명회상록》(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11년 12월)에서


호철명

호철명(胡哲明)은 1935년에 남경 황룡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제3기생으로 들어갔고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중앙군사학교 호북분교를 졸업하고 1937년초에 재중국 조선공산주의자전위동맹에 가입하였다. 10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입대하고 로하구에서 국민혁명군과 배합하여 일본군에 대한 와해공작을 하였다.

호철명은 1939년초에 대홍산일대에 깊이 들어가서 신사군 정진종대 당위원회와 련계를 맺고 그 당위원회 지도하에 조선의용대 제1지대와 제2지대에 통일된 당지부를 세우고 당지부 서기로 선거되였다. 호철명은 적점령지구에 깊이 들어가서 공작하고 돌아올 때 적들의 매복습격을 받아 희생되였다. 희생될 때 겨우 32세였다.

ㅡ《한청항일혁명회상록》(연변인민출판사 출판, 2011년 12월)에서


김학철전집 7ㅡ《항전별곡》에는 새로 알려지는 김정희 등 6명 렬사 략력외에도 마덕산으로 불리운 리원대 렬사 략력도 소개되고 있다. 이 밖에 김학철 선생은 문집과 여러 책에서 리원대를 소개하고 있어 리원대 렬사에 대한 리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리원대 렬사는 1941년초 조선의용대 대부분 대원들과 함께 황하를 건너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진출한 동지로 알려진다.

  그러던 리원대는 1942년 5월 2일 하북성 석가장 일본헌병대에 체포되고 1943년 6월 17일 북평주둔 일본헌병대 본부에서 만 32세를 일기로 빛나는 최후를 마치였다. 본문에서 간단한 략력으로 소개한 조선의용군 김석계도 리원대와 함께 석가장 일본헌병대로부터 북평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였다가 1943년 6월 17일 북평 일본헌병대에 의해 총살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