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조선의용군 리원대와 김학철의 인연

202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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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리원대.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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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새해 벽두에 조선의용대 총대부 일부 간부들과 제1지대, 제3지대 등 대원들은 국민당 통치구역인 중경을 떠나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출발했다. 그들 속에는 제1지대 소속 리원대도 있었으니 리원대에게는 황하를 건너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전이할 때 재미 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이야기는 물이 귀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에서 생겼다. 마을 앞 내가도 바닥이 바싹 말라버려서 마을 사람들은 멀리 이웃동네에 가서 나귀바리로 물을 실어날라야 했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물 배급제를 실시했다. 한 사람에게 하루에 군용고뿌로 하나ㅡ500그람이 차례졌다. 물이 귀하기로 이를데 없는 마을이였다.

조선의용대가 이 마을에 도착한 이튿날 희한하게도 비가 한바탕 쏟아지면서 황토고원에서 흔치 않은 멋진 풍경이 생겨났다. 이 멋진 비풍경 속에 조선의용대 제1지대 마덕산(리원대)과 주동욱(박철동)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때를 상기하면서 김학철 선생은 《김학철전집7ㅡ항전별곡》(주: 연변인민출판사. 2012년 11월 출판, 제196페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마덕산이와 주동욱 두 친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옷들을 홀딱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뛰여나가 마당에 서서 비물로 샤와욕을 시작한 것이다. 한데 그들이 전신에 ㅡ머리꼭뒤에서 발뒤꿈치까지 듬뿍 비누칠을 했을 때  갑자기 비가 그치고, 비가 그치자 이내 구름이 걷히고, 구름이 걷히자 또 곧 해가 났다. 그러니 두 욕객은 삽시간에 비누졸임으로 돼버릴 밖에. 마덕산, 주동욱 두 친구가 매시근해서 머리에 말라붙은 비누거품을 입들이 쓴듯이 마른 손으로 비벼떨구는 꼴을 보고 나는 허리를 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내였다. 나는 본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데 그적에는 아마 눈치코치도 모르고 좀 지나치게 웃은 모양이였다. 마덕산이는 몹시 맞갖잖은 듯이 내게다 눈을 흘기며 두덜두덜했다.

“남은 속이 상한다는데 저 좋아하는 꼴 좀 봐라. 저렬한 인간!…”

김학철 선생 글 속의 리원대와 박철동의 조선의용대 북상시절의 이야기다. 이 글을 정리하는 필자도 킥킥 웃음을 참지 못했다. 김학철 선생은 명실상부한 항일혁명가들을 서술하는 가운데 실생활 속의 리원대나 박철동의 삶의 생생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리원대 등을 보다 잘 리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리원대는 누구이며 그의 행적은 어떠할가. 리원대의 관련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리원대(1911-1943)는 경상북도 신녕군 지곡면 운산동에서 출생했다. 지금의 주소로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동(永川市華北面梧山洞)으로 알려진다. 본명은 리원대(李原大)이나 호적에는 이원대(李元大)로 기록되여있다. 자는 달문(達文), 호는 덕산(德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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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의 리원대. (사진자료)

2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공문덕(孔文德)  또는  마덕산(馬德山)이라는 이명(異名)을 많이 사용했다. 아버지 리중호(李重鎬)와 어머니 정오동(鄭梧桐) 사이의 5남 1녀중 차남으로 태여났지만 집안이 부농가ㅡ부유한편이여서 1921년에 백학학원에 다니다가 1922년에 자천공립보통학교에 편입되여 1928년 제1회로 졸업할 수가 있었다.

이후 영천공립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을 수료하고는 중퇴한 것으로 알려진다. 어릴 적부터 정의롭고 외골수적인 성격으로 알려진 리원대는 본가로 돌아왔다지만 삼천리 금수강산을 짓밟은 일제놈들과는 한 하늘을 떠이고 살 수가 없었다. 일제놈들과 싸우기로 결의한 그는 마침 친구 안병철(安炳喆)을 만났다.

안병철은 중국에서 의렬단 간부학교 제1기를 졸업한 인물이다. 그는 의렬단 간부학교 제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의열단공작원으로 영천 등지로 잠입했다가 정의와 의협심으로 끓는 친구 리원대와 리진영을 적임자라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리원대는 안병철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이웃동네 운산마을 친구인 리진영(李進榮, 그 후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과 더불어  중국행에 나섰다.

때는 1933년 8월. 상해에 도착한 리영대와 리진영은 안병철의 소개로 남경으로 가서 의렬단에 가입하였다. 이어 선후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조선인반과 특별훈련반 제6기생 훈련을 받았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과 더불어 입당하고는 남경과 상해 등지에서 비밀첩보활동에 뛰여들었다.

1937년 7월 7일에 로구교사변이 터지자 리원대는 그해 12월 중앙륙균군관학교 성자분교에 입학했다. 1938년 5월에 성자분교를 졸업한 뒤 조선민족전선 본부가 자리한 한구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 한구에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고는 소속 의용대를 따라 호남, 호북, 강서를 중심으로 중국의 항전에 궐기해 나섰고 1941년초엔 조선의용대 대부분 대원들과 함께 황하를 건너 화북지역으로 진출했다. 화북지역에서 리원대는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대 제1지대 대원으로, 조선독립동맹 적후련락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항산 일대를 주름잡으며 수십 차례의 항일전에서 용맹을 떨쳤다. 1942년 5월 2일 하북성 석가장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였다가 북평주둔 일본헌병대 본부로 압송됐다.


3

관련 자료로 보는 조선의용군 리원대 렬사 개략적인 인생행적이다. 리원대와 김학철의 인연은 그 후에도 이어진다. 마침 석가장 일본헌병대에 투옥된 김학철과 만나게 되면서 적들에게 체포된 후의 리원대의 신상이 알려진다. 김학철 선생이 1951월 12월 1일에 정리한 후 《인민문학》 제5권 제2호에 실린 <준엄한 나날에ㅡ호가장전투 10주년을 기념하여>(김학철문학연구회 편.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4에 전문이 실림)에서 석가장 일본헌병대에서의 리원대와의 만남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다.

1941년 12월 12일 하북성 호가장전투에서 김학철은 대퇴골에 총상을 입고 산등성이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본군의 들것에 누워있었고 석가장 일본헌병대에 투옥됐다. 적들은 김학철에게 회과성명서를 쓰고 팔로군내 조선혁명가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면 ‘죄’를 사면해주고 병원에 입원시켜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고 뇌까렸다. 하지만 김학철은 혁명지조를 꺾지 않았고 적들의 거듭되는 악형을 이겨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일본 헌병 두놈이 김학철을 데리고 나가더니 헌병조장(曹长) 야마모도의 사무실문을 열어 제꼈다. 김학철은 눈앞에 나타난, 회색정장에 연한 하늘색넥타이를 맨 신사를 보고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그때를 김학철선생의 원문 그대로 인용해본다.


“아, 류빈이(刘斌) 아닌가? ㅡ 호가장전투 때 나와 함께 실종되였던 류빈이 아닌가?”

“전혀 생각밖이겠죠? 자, 여기 앉아서 얘기나 하죠.”

류빈은 친절하게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야마모도가 오만한 자세로 옆에 앉아 류빈을 소개한다.

“이분은 군사령부에서 팔로군에 첩보대원으로 파견한 신용순(申容纯)이라는 사람이요…”

나는 금시 눈앞이 새카매져 털썩 걸상에 주저앉으면서 “간첩! 내가 너를 잘못 알았구나. 우리 함께 침대에 누워 늘 이야기를 나눴었지…에끼 이 놈, 이제 보니 간첩이였구나!…”


석가장 일본헌병대에서 겪은 김학철 선생의 첫 놀라움이라 하겠다. 그후 김학철 선생은 또 한번 놀라운 일에 부딪쳤으니 상상외로 석가장 일본헌병대에서 “평복을 입은 키다리 마덕산과 김석계 두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만남의 장소는 높은 벽돌담에 둘러있는 일본헌병대 뜰안이고, 만남의 시간은 단 10분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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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투항 후 감옥에서 석방된 김학철.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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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조선의용군의 세 동지는 너무도 뜻밖의 만남에 그만 억이 막혀 멍하니 건너다 보고만 있었다. 눈물이 글썽한 마덕산ㅡ리원대는  친구인 김학철의 이름을 부르더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네 다리는 꼭 나을거야! 아무렴 완치될 수 있고말고!!”라며 고무해주었다. 마덕산과 사귄지 오륙년이 되는 김학철은 덕산 친구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음 보게 되였다.

김학철도 김석계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야마모도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서로 넋이 나가 쳐다볼 뿐 한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했다.” 김학철 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마덕산은 내가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는 동지중의 한사람”이고, 김석계는 “새로운 동지인데 적구에서 잡아온 동지들 중 가장 희망이 있는 젊은이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이튿날 이른아침 잡역노릇을 하는 병졸이 슬쩍 접은  종이쪽지 하나를 김학철이 투옥한 제6호감방 나무창안으로 던져줬다. 연필로 쓰고 김석계와 마덕산이 서명한 종이쪽지였다.

종이쪽지에는 “적의 소굴에서 너를 만날줄은 생각도 못했”고, 이 쪽지를 받을 땐 우리는 북경으로 가는 렬차에 앉게 될 것”이며, 적들의 ‘군법회의’에서 사형으로 판결 받았다는 내용, 자기들 사형은  류빈-신용순이 한 짓이라는 것, 신용순이란 놈의 헛된 통역과 불리한 말로 죽게 된다는 것, “자, 이젠 리별이다! 너의 다리가 낫기를 빈다! 공산당 만세!…” 등등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사실 그러했다.

리원대와 김석계는 조선의용군 부대원 모집차 북평 등지로 갔다가 일제 간첩인 류빈ㅡ신용순의 밀고로 체포되였고, 심문 과정에 또 의용군 부대원 모집 아닌 군사정탐으로 모함하여 이른바 ‘군법회의’ 결과 사형으로 판결됐다. 류빈의 친일죄악, 이자는 분명한 일본 간첩임에도 일제 패망과 더불어 일본에서 서울로 귀국한 뒤 애국지사로 분장하여 나섰다.

그때로부터 근 60년 세월이 흘러갔다. 1998년 여름 김학철 선생은 서울나들이를 갔다가 하도 어이없는 일에 부닥쳤다. 김학철 선생의 글 그대로 인용하면 “한동안 부아통을 터뜨리다가, 마침내는 허탈감에 빠져버리고 말았었다.” 왜일가, 이 부아통, 이 허탈감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5

KBC 전 사장 서영훈(徐英勋)씨가 베푼 초대연에 참석을 했을 때의 일이다. 오랜 항일운동가들인 안춘생(安椿生), 박진목(朴进穆), 김승곤(金胜坤) 등 제씨왕 환담을 나누던중 우연히 ‘신용순’이란 이름이 내 귀에 들어와 머물렀다.

“신용순? 그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작고를 한지가 벌써 몇해 잘됩니다. 그와 혹 상종이 계셨던가요?”

“그자는 일본군의 첩자였습니다. 백번 죽어 마땅할 놈이였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들 놀라와서 좌중이 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자가 의용군에 들어와가지고 쓴 이름은 류빈이라고 했었는데…”

“류빈 맞아요. 광복군에 있을 때도 그 이름을 썼었죠.”

“그렇다면 더군다나 틀림이 없습니다. 일본간첩이.”

좌중의  10여명 사람이 모두 귀를 도사리고 내 입만 쳐다보게 됐다.

그번 초대연에서 김학철 선생은 본문에서 스치여 본, 당년 석가장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였을 때 일본군 헌병조장 야마모도 사무실에서 만난 류빈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 주었다. 또 류빈 때문에 적들에게 체포된 조선의용군 출신들인 리원대와 김석계가 사형으로 판결 받았고, 1943년 6월 17일 북평주둔 일본헌병대 본부에서 만 32세를 일기로 빛나는 최후를 마치였다고 동을 달았다.

이 글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2002년 8월 출판한 김학철 문집 제5권 《천당과 지옥사이》의 한편ㅡ<력사비빔밥> 중의 소제목으로 된 “일본간첩 신용순”에 실린 글이다. 력사는 돌고돌아 오래동안 항일혁명가로 애국지사로  둔갑한 신용순의 정체를 까밝히면서 진짜 항일혁명가 리원대의 위상을 그대로 살려주고 있다.

관련자료에 따르면 1943년 6월 17일 북평의 일본헌병대 본부 후원에서 14명의 저격수로 사형을 집행할 때 리원대는 일제놈들이  수건으로 눈을 가리려고 하자 “나는 죽을 때까지 네놈들을 똑똑히 지켜 볼 것이다!”라고 하면서 결연히 뿌리쳤고, 두눈을 부릅뜬 채 떳떳이 총살을 맞았다고 한다.

  그때 북평 일본헌병대 통역 곽동수는 리원대의 장렬한 최후에서 엄청 감명을 받고 일본군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으로 넘어갔고, 리원대의 최후를 증언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리원대 렬사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선산에 모셔지고 생가도 보전되여있으며 1977년에 한국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