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원 문명철 (2)

202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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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 한돐을 맞아 계림에서 합영.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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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로동부녀전지봉사단은 국민당 제19로군에 소속돼 활동하였지만 그들중의 허다한 녀성들이 우리 신사군의 지도를 받는 중공지하당지부 당원들이였기 때문에 이들의 전선봉사활동은 언제나 뛰여난 열성으로 넘쳤다. 이는 소극항전과 적극반공에 열을 올린 국민당내 반공완고파들의 눈에 가시로 되여 전선봉사단은 도처에서 감시를 받고 제한을 받아야 했다. 이는 불길한 징조로서 전지봉사단의 중공당원과 적극분자들은 국민당완고파의 감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 전지봉사단 지하당지부에는 16명 공산당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10월 하순경에 지하당지부에서는 당원동지들과 진보적 청년 도합 20여명을 이끌고 무사히 국민당 제19로군을 벗어났다. 이는 실제상 상해로동부녀전지봉사단의 해산을 의미하는바 국민당의 감시에서 벗어난 전지봉사단의 대부분 동지들은 계림으로 전이하여 팔로군판사처의 지시를 기다리게 됐다.

광서쫭족자치구 계림시 중산중로(中山中路) 96번지는 ‘팔로군계림판사처’로 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2017년 6월 필자는 옹근 한달간 계림에 머무르면서 수차 팔로군계림판사처를 찾게 됐다. 그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하나의 인물은 조선의용대 혁명가들이 아닌, 계림에서 활동상을 보인 상해로동부녀전지봉사단(战地服务团) 단원이고 공산당원인 윤복구 녀성이다.

팔로군계림판사처는 1938년 11월 중순에 중공중앙에서 중앙남방국 비서장 리극농을 계림에 파견하여 세우게 한 판사처로 부지면적 1300여평방메터에 건축면적이 8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토목결구의 건축물이다. 원래는 ‘만상조방(万祥糟坊)’으로 알려지다가 중공남방국에서 빌리게 되면서 팔로군계림판사처로 쓰이게 됐다.

이 팔로군계림판사처가 문명철과 윤복구를 한곬으로 이어놓으니 그 시절의 윤복구는 한창 페결핵에 시달릴 때여서 신체가 허약하여 말이 아니였다. 전지봉사단 당지부에서는 소속 동지들 앞서 윤복구를 병치료의 명의로 먼저 광서 계림에 보냈고 이에 윤복구는 계림에서 약 두달이란 시간을 보내게 됐다.

윤복구가 계림에 이르자 마침 녀성혁명가인 그의 언니 윤복견이 우리 당이 지도하는 계림의 ‘신안학교(新安学校)’에서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윤복구는 언니와 함께 주숙하면서 치료하는 한편 팔로군계림판사처의 배치를 기다렸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도 의용대 총대부가 자리잡은 계림으로 전이했으니 세상사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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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윤복구와 언니 윤복견이 계림에서 합영. (사진자료)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계림에 나타난 후 선후하여 계림 동령가 1번지(东灵街1号)와 시가원 53번지(施家园53号)에 자리잡고 광서락군사(广西乐群社), 신화대극장(新华大戏院), 계림중학교 등지를 무대로 여러가지 형식의 항일활동을 펼쳤다. 그중 동령가 1번지는 지금의 계림시 칠성(七星)공원 입구내 화교(花桥)다리 동쪽가를 가리키고 시가원 53번지는 칠성공원의 측문으로 되는 남문에서 시가원로(施家园路)를 따라 약 300메터 되는 곳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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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필자는 계림에 머무르는 기간 동령가 1번지 등 조선의용대 관련 유적지를 모두 찾아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모두 찍어두었다. 문명철은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자리한 동령가 1번지와 시가원 53번지, 윤복구의 주숙지, 팔로군계림판사처를 자주 드나들면서 윤복구와 그의 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속에서 두달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윤복구는  조선인 문명철에 대하여 보다 깊이 리해 할 수 있었다.

1940년 9월경에 윤복구는 조선의용대 총부를 찾아 중경으로 출발하는 조선의용대 일행 속에 섞이여 계림을 떠났다. 려비가 부족한 탓에 이들 일행은 뻐스 따위를 리용하지 못하고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편을 리용해야 했다. 그나마 화물차 꼭대기라 짐을 동인 바줄을 꽈악 잡아야 하는데 ‘마귀로선’이라 이름난 귀주 동재(桐梓)구간의 굽이굽이 ‘72굽이길’만 한시간 푼히 달릴 때면 머리가 쭈볏해났다.

그렇게 험악한 길을 달리며 중경에 도착하니 윤복구는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와 더불어 남안(南岸)의 진가화원(陈家花园)에 자리한 조선의용대 총대부에 두달 동안 머물면서 휴식정돈과 학습에 나서야 했다. 문제는 페결핵을  앓는 윤복구가 늘 열이 오르고 피를 토하는 것이였다. 그때를 두고 복구는 <잊지 못할 전우>란 한편의 회고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문명철은 의사를 청해다가 병을 보이고 생활면에서 시중을 들어줬다. 중경을 떠난 후 나는 또 학질에 걸렸었다. 문명철은 늘 나의 짐을 들어주기도 하고 이모저모로 살뜰하게  도와주면서 꼭 병마를 이겨내고 행군임무를 완수하라고 고무격려해줬다. 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윤복군은 계속하여 문명철을 외우고 있다.


행군길에서 문명철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애로운 어머니와 아름다운 조국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했다. 그는 “조국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가 없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군 했다. 행군길에서 그는 여러가지 돌멩이를 줏기를 즐겼는데 돌멩이를 주어들고는 이 돌에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여있고 저 돌에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여 있다고 하면서 호주머니에 주어넣어 표본으로 삼았다. 그는 “혁명이 승리한 후 나는 과학가가 되여 지질학을 연구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조국건설에 이바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회고문은 전문 문명철 렬사를 추모하여 쓴 회고문으로서 중국인 녀성 윤복구에 대한 문명철의 애틋한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랑이 있었으므로 문명철은 그로부터 몇년 후 산서의 한 오지에 이름없이 쓰러졌지만 사랑했던 련인인 윤복구에 의해 묘소가 발견되고 자기의 조국땅에 다시 묻힐 수가 있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갸륵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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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머물렀던 계림시 동령가 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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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초부터 중국의 항일전쟁은 가장 간고한 대치단계에 처했다. 일본 침략군에 대해 소극적으로 항전하고 공산당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장개석 국민당반동파의 진면모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은 오로지 중국공산당과 그가 지도하는 팔로군, 신사군만이 중국을 도탄속에서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의용대 다수가 북상해서 팔로군부대와 함께 항일할 것을 주장했다.

드디여 1941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조선의용대 총대부의 일부 간부들과 제1지대, 제3지대 대원들은 중경부두에서 ‘민생호’기선에 올라 중경을 떠났다. 국민당의 풍옥상, 리제심 등 애국장령들과 애국인사들은 조선의용대가 떠나는 전날밤, 성대히 환송하면서도 조선동지들이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이동한다는 것을 몰랐다.

조선의용대 대다수의 북상행동은 의용대 총대부에서 극비리에 팔로군 중경판사처의 주은래에게 청시하고 결정한 일이여서 풍옥상 등 애국장령들과 애국인사들은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때 태항산근거지 두리의 화북땅에는 20여만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매불망 바라던 념원이 현실로 되자 문명철 등은 가슴이 한없이 후더워났다.

‘민생호’는 해종일 달린 끝에 산간의 자그마한 도시 만현(万县)에 이르렀다. 만현의 조선인 최성오 의사와 그의 안해가 반갑게 맞아주고 술에 풍성한 안주까지 마련해 제법 흥성한 연회를 베풀었다. 조선의용대 대원들 속에는 조선녀성 장수연, 중국녀성 윤복구, 일본녀성 권혁에다 국민당군대에 잡혀갔다가 의거한 조선동지들이 있어 국제적인 대오를 방불케 하였는데 오락판이 벌어지자 녀성대원들이 선참 공격목표가 되고 조선노래, 중국노래, 쏘련노래, 일본노래가 터져올랐다.

그중에서도 문명철의 련인 윤복구가 부르는 중국노래, 쏘련노래가 자못 인기를 끌었다. 열대여섯살부터 전선공작대에서 사업해온 복구에게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의례 한마디 “목이 쉬였어요!”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날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가 옆에 앉은 문명철한테 눈치를 주자 그것을 알아 챈 문명철이 제꺽 하모니카를 꺼내 들고 련인의 노래에 멋들어지게 반주를 해주었다.

문명철은 정말이지 하모니카를 너무나도 잘 불었다. 아무리 어려운 나날에도 하모니카만은 늘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틈만 나면 꺼내 불군 했던 그였다. 만현 최성오 의사 병실연회에서도 그 재주가 남김없이 드러났다.

인연이란 참 갸륵한 존재라고, 중국인 녀성 윤복구와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환난지우 사이를 잘 말해준다. 그들은 옹근 반년이란 기간 사천, 호북, 하남, 하북, 산서 등 성을 거치면서 서로의 정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북상길에서 날씨가 이미 추워지는 데도 문명철의 행장에는 바꿔 입을 옷 한두벌과 절반짜리 군용탄자밖에 없었다. 있다면 여러가지 판본의 진보적 책들 뿐이였다.

“이번 행군이 아무리 고생스럽다고 해도 중국로농홍군의 2만 5천리 장정보다는 고생스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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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철의 진심어린 말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윤복구의 건강은 그닥 좋지 못했다. 중경에서는 페결핵으로 고생하여 늘 열이 오르고 피를 토했다. 그러면 문명철은 의사를 청해온다, 생활시중을 들어준다 하면서 윤복구를 싸고 돌았다. 북상길에서 또 윤복구가 학질에 걸리자 문명철은 윤복구의 짐을 들어주고 살뜰히 굴면서 꼭 병마를 이겨내고 행군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고무격려했다.

행군길에서 문명철은 윤복구에게 많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자기 조국-조선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국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가 없는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거듭되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 문명철은 중국과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항일전사였다.

문명철이 련인 윤복구와 터놓았던 마음속 말, 문명철과 윤복구의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문명철, 윤복구 일행은 1941년 6월 초의 어느날 오매불방 그리던 태항산항일근거지ㅡ팔로군총부소재지 료현 동욕진(辽县桐峪镇)에 도착했다. 정녕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윤복구는 조선의용대 동지들과 더불어 동욕진 상무촌(上武村)의 옛 사찰ㅡ홍복사(洪福寺)에 주숙하게 됐다. 로신예술학교 태항분교도 상무촌에 자리잡아 진정 사람사는 동네 같았다.

동욕진 상무촌은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으로서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위치하고 있다. 상무촌 뒤로는 하늘을 찌르는듯한 웅장한 바위산이 자리하고 바위산 아래에는 규모가 상당한 불교사찰 홍복사(洪福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9년 8월 21일, 필자가 태항산항일근거지 답사차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찾으니 홍복사는 촌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제날 상당한 규모의 홍복사는 보이지 않고 꽤나 길다란 단층집 하나만 달랑 남아 북방의 손님을 맞아줬다. 알고보니 당년 일본침략자들이 불살라 버린 결과였다. 오늘의 단층집은 그대로 불교의 절로 리용되고 있었고 절 정문가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시절의 홍복사는 비교적 큰데서 조선동지들 뿐만 아니라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도 자리잡았으며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전선총부 주요 지도자들도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에 앞서 진광화 등 조선동지들이 이곳 상무촌 홍복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40년 겨울로 알려진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아닌 연안 등지에서 온 30여명 조선동지들이 첫패로 된다. 그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로신예술학교 등 사생들이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늘 다양한 만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