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원 문명철 (3)

202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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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가 이르렀던 태항산항일근거지의 홍복사. 화북조선청년련합회가 이곳 홍복사에서 설립됐다.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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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지들은 밤이면 야회를 가지면서 넓다란 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그때마다 빠짐없이 울려퍼지는 노래는 <아리랑> 이였다. 아리랑 노래에 호기심을 가진 학교사생들과 마을사람들은 저도모르게 따라 부르며 아라랑의 아름다운 선률에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그러나 중국동지들과 마을사람들은 <아리랑>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면서도 그 뜻은 알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후일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책임자 진광화는 중국동지들에게 조선민요 <아리랑>의 뜻을 보다 잘 알리기 위하여 <아리랑> 노래 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고는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줬다. <아리랑>의 뜻을 알게 된 중국사람들은 조선동지들과 어울릴 때면 언제나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조선동지들에 대한 진지한 감정을 표달하군 했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항일근거지 동욕진 상무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중공중앙과 팔로군을 대표하여 연설을 했다. 팽덕회는 조선동지들의 련합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설립을 축하하고 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동지들에게 숭고한 혁명적 경의를 표하였으며 조선동지들은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를 타도할 때까지 싸워 보다 휘황한 위훈을 세울 것을 희망했다.

설립대회는 항일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했고 련합회의 강령, 선언을 토의했으며 당면한 과업을 포치하고 령도기구를 내왔다. 련합회의 회장에 무정, 부회장에 진광화, 조직부장에 리유민, 선전부장에 장진광, 경제부장에 한득지, 위원에 최창익이였다. 그때 무정이 팔로군 총부 작전과장과 팔로군 포병퇀 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진광화가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지도사업을 맡아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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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후에 머물렀던 계림시 시가원 53번지.(2017년 6월 23일 현지촬영)

때는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41년초였다. 어느 날 한 무리 일제침략군이 상무촌과 그 주변을 돌연 기습했다. 홍복사와 마을에 있던 조선동지들은 재빨리 마을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 덕에 마을사람들은 전부 산으로 피신할 수가 있었다.  조선동지들은 싸움터에서 물러섰지만 이미 두명의 조선동지가 희생된 뒤였다. 마을에서는 리금주(李金柱)라고 부르는 농민 한 사람이 숨졌다. 그러나 조선동지들의 군사엄호를 받지 못한 부근의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마을사람들이 일본놈들에게 살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는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동욕진 상무촌에 이르기 전의 일이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서는 희생된 두 동지를 홍복사에서 멀지 않은 산비탈에 고이 모셨다. 그때로부터 이곳 상무촌의 사람들은 조선동지들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며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자발적으로 조선렬사의 묘지를 관리해나섰다. 그 진두에서 조선의용대 렬사묘를 묵묵히 지켜준 분은 마을의  조은경 로인이였다. 조선동지들이 상무촌에 머무르던 그 나날 조은경 로인은 10대 소년이였는데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셋째 삼촌 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마침 셋째 삼촌 집에는 조선의용대 간부 2명이 숙박하고 있어 그는 늘 조선동지들과 무랍없이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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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봄, 국민당 항일전장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주력이 선후하여 태항산항일근거지 동욕진 상무촌으로 전이하면서 1940년 겨울 적후에서 온 첫패의 조선동지 30여명과 회합하게 되였다.  이렇게 모여든 조선의용대와 조선동지들은 모두 100여명에 달했다. 이들 100여명은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 소속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였는데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 정치지도원은 김학무가 맡았다. 문명철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의 대원이 되였다.

새로 산생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본부를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하고 상무촌과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麻田镇云头底村) 두곳이 조선의용대 동지들의 주둔지로 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대부분 동지들은 운두저촌에 주둔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9년 8월 21일, 필자는 동욕진에서 멀지 않은 마전진 운두저촌에도 가보았다. 문명철 소속 제2대가 한때 머무르던 고장이기도 하다. 운두저촌은 300여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진 마을인데 마을어구에 해묵은 홰나무 한그루가 있어 퍼그나 인상적이였다. 보다 인상 깊은 것은 마을의 서남쪽가에 자리잡은  남각(南阁)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문루(门楼)였다.

문루의 바람벽에는 항일의 피어린 나날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써놓은 “왜놈의 상관놈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등 여러 구호들이 눈에 띈다. 이런 항일구호들은 오랜 세월속에 퇴색했지만 흰색을 새롭게 덧칠해 잘 보였다. 운두저촌에서도 조선의용대가 부르는 <아리랑> 등 조선노래가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문명철 등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전이한 지도 어언 두어달이 되였다. 문명철의 녀자친구 윤복구는 팔로군총부 정치부에 소환되였다. 그 후 1942년 5월의 반소탕 때 윤복구는 또 연안행에 오르면서 문명철을 다시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인연을 소중히 여긴 문명철은 인편에 연안의 윤복구에게 포도당칼슘주사약을 보내기도 했다. 그 시절로 보면 그 주사약은 아주 귀한 약이였다.

문명철은 페병에 시달리면서도 자기에게 차례진 귀중한 주사약을 윤복구에게 보냈다. 복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보여지는 대목이다. 1994년에 윤복구는 문명철 희생 51주기를 기념하면서 추모글 <잊지 못할 전우>를 썼는데 그때 윤복구는 복건성 부련회 주임, 당조서기, 복건성 제6기, 7기 인대 상무위원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연안시절 윤복구는 말그대로 문명철의 소식을 다시 듣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문명철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그후 연안에서 강생이 벌린 ‘실족자구하기(抢救失足者)’운동이 잘 알려주고 있다. 이 운동에서 윤복구는 국민당통치구에서 왔다는 것과 조선의용대 전우 문명철과의 련인관계로 하여  이른바 ‘실족자’로 락인되여 전문심사를 받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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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연안은 말 그대로 남자가 많고 녀자가 적어 남녀청년의 비례가 약 10:1을 이루었다. 그만큼 녀자들이 적으니 연안이란 이 특수한 환경에서 녀자들은 남자들이 추구하는 목표로 되였다. 윤복구의 주변에도 늘 청년남자들이 돌며 그녀에게 호감을 표했다. 그래도 윤복구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윤복구를 보고 소속 방직부의 지부서기 풍력(冯力) 언니는 남자는 나이 들면  장가 들기 마련이고 녀자도 혼령이 잡히면 시집가기 마련인데 왜 남자를 만나려 하지 않는지 리해하지 못했다. 이에 윤복구는 자기에게는 남자벗이 있다고 속심을 터놓았다. 지부서기 언니는 남자벗이 누군가고 물었지만 윤복구는 아직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었다. 윤복구는 문명철과 헤여져 연안으로 온 후 포도당칼슘주사약을 받았을 뿐 그 후 한번의 련락도 없었으니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덧 시간은 살같이 흘러 1943년이 되였다. 이해 5월 28일 연안의 《해방일보》 1면 톱기사에는 <진서북 각계 조선혁명전우 문명철 동지를 추모>란 기사가 실리였다. 기사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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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 마을에는 오늘도 그제날 조선의용군이 쓴 구호가 보이고 있다.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문명철 동지는 진서북 모 분구에서 사업하며 적대투쟁의 최전선에서 적진을 드나들다가 4월 14일 불행히도 100여명 적들의 사면 포위 속에 들었으나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중국 동지와 함께 포위를 헤치다가 적들과 격전을 벌리며 몇몇을 살상하였다. 마지막 탄알이 떨어진 역경 속에서 최후의 수류탄을 적에게 던지였으며 자기도 수류탄의 폭발 속에서 영광스럽게 순국하였다.

《해방일보》 기사를 본 윤복구는 놀라마지 않았다. 문명철은 일찍 윤복구가 영웅패장역을 맡았던 단막화극 <최후의 수류탄 하나>의 영웅패장처럼 행동하면서 “윤동지가 맡아나선 영웅패장은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나 역시 영웅패장과 같은 경우라면 용감하게 희생될지언정 절대 적들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라던 맹세를 실천했었다. 윤복구는 이같이 졸지에 자기의 친밀한 전우이며 사랑하는 조선오빠인 문명철을 잃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다시 문명철의 얘기로 돌아와서 근 5개월간의 간고한 이동과 투쟁을 거쳐 조선의용대 북상대오는 팔로군 전선총지휘가 있는 태항산항일근거지 진동남 동욕에 이르렀고 1942년 7월 오늘의 하북성 섭현 섭성진 중원촌에서 조선의용군으로 재편성된 후 문명철은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 대원으로 뽑혀 적후 무장선전활동의 진두에 나섰다.

어느 날 문명철 소속 무장선전대는 최전방 선전사업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적들의 포위에 들었다. 싸우다가 포위된 곳은 한 농가 안이였다. 그는 농가의 창문을 리용해 반격하다가 천정을 뚫고 지붕 우로 나가서 놈들을 따돌렸다. 그러다가 마을 끝에서 왜놈 한명이 나타나 총창으로 그를 막아나섰다. 문명철은 태연하게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놈의 가슴패기를 겨누었다. 왜놈이 일순 당황한 틈을 타서 문명철은 그놈을 제끼고 마을을 벗어났고 무장선전대 대원들과 함께 무사히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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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모 분구에 파견되여 사업하다가 문명철은 아군의 10여배에 달하는 적들의 포위에 빠져들었다. 극히 불리한 사태에서 문명철은 전우들과 더불어 맞불질로 적들을 쓸어눕혔으나 결국 탄알이 다 떨어졌다. 적병이 들이닥치자 문명철은 빈총을 적의 가슴에 들이댔다. 적병이 깜짝 놀라 주춤하는 순간 문명철은 날쌔게 그자의 총을 나꿔채여 그자를 찔러죽이고 무사히 피해버렸다.

이같이 문명철은 남달리 용감하고 침착하고 기민하여 온 진동남일대 군민들 속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떠올랐다. 1942년 5월에는 진동남반소탕전역에서 적을 소멸하고 기관총 9정을 로획해 대공을 세우기도 했다.

1942년 9월에 문명철은 진서북으로 가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의 조직위원을 맡아나섰다. 1943년초에는 팔로군 진서북군분구에서 사업했다. 진서북 분맹이나 진서북군분구 때나 주로 적후 선전사업에 종사하며 사선을 넘나들었기에 문명철의 건강은 나날이 못해갔다. 조직과 동지들이 휴식을 수차 권해도 그는 항일의 최전선에서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던 1943년 4월 14일 아침, 문명철이 다른 2명의 팔로군동지와 함께 적후의 한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때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의 돌연 진공에 맞다들었다. 적들은 2개 대로 나뉘여 포위공격을 들이댔다. 일본군의 전위대가 마을을 지나가는 걸 본 문명철 등은 그냥 마을에 숨어있을 수가 없었다. 마을 뒤의 골짜기로 달려갔지만 이번에는 적의 후위대와 마주쳤다.

오직 적들과 완강하게 결사적으로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적 수십명을 살상하는 사이 탄알이 다 떨어지고 두 팔로군동지도 희생되였다.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린 문명철은 마지막 수류탄 한개를 적들에게 던지고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어느 한 글에서는 마지막 남은 탄알 한방으로 자기의 생명을 마감지었다고도 한다.

문명철은 생전에 이름난 하모니카수이면서도 시도 곧잘 썼다. 1942년 11월에 쓴 <승리를 위하여>란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마지막 돌격나팔소리가 울리기 전에

사랑하는 중한의 아들딸들이여

모든 힘 다 바쳐 싸우자

1943년은 우리에게 주리니

광명하고 찬란한 봄을…


해빛 넘치는 찬란한 새봄을 바라는 문명철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러나 문명철은 그토록 바라던 찬란한 새봄을 보지 못하고 태항산근거지에서 쓰러졌다.

  조선전우 문명철의 희생소식이 전해지자 진서북 각계에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5월 4일에 진서북 군구주둔지에서는 ‘조선혁명전우 문명철 렬사 추도대회’를 장중히 열었다. 진서북 각계 및 조선독립동맹총부, 진서북, 진찰기, 진동남 각 분맹, 재중일본인반전동맹 진서북 지부에서 모두 조의를 표하면서 주련, 화환, 전보를 보내왔다. 이날 묵도와 김세광의 렬사 략력 및 희생경과보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