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원 문명철 (4)

2022-08-29

청장하쪽에서 보는 조선의용군 주둔지 하북성 섭현 중원향 중원촌 전경.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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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대회에서 군구 진부(副)참모장과 정치부 왕부장은 전체 장병들에게 문명철의 완강하고 영용한 전투정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업작풍, 불요불굴의 혁명절개, 계급적 우애정신, 군중과 련계하는 모범적 소행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태항산근거지의 《항일일보》에서는 특집을 기획,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의 책임자 김세광의 글도 실렸다. 5월 17일자 연안 《해방일보》는 신화사 진서북 16일 발 통신을 내면서 전서북 각계에서 조선혁명전우 문명철 동지를 추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943년 6월 6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청년혁명학교 세 단체에서는 태항산근거지에서 또 문명철, 김산륜 두 렬사를 위해 추도대회를 가졌다. 관련 기사는 1943년 6월 18일자 연안 《해방일보》에 보도됐다. 연안에서 문명철 관련 소식을 지켜본 윤봉(윤복구)은 일순 비통에서 헤여나지 못했다.

윤복구가 큰언니라고 부르는 풍력은 윤복구 소속 지부서기로 뒤늦게야 복구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였다. 사실 윤복구와 문명철은 사랑다운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새겨두고 있을 뿐이였다. 풍력언니는 윤복구에게 정식으로 오홍상(吴洪祥)이라는 청년을 소개해 주었는데 오옥상은 민월감(闽粤赣)변구에서 선출되여온 당의 제7차 대표대회 대표이고 중공민월감성위 청년부장 겸 영정(永定)중심현위서기였다. 영정은 오늘의 복건성 영정현을 가리킨다.

연안시절 윤복구는 이름을 윤봉으로 바꾸었다. 1944년 8월 우리 나이로 22살인 윤봉은 남편으로 될 오홍상(吴洪祥, 1914ㅡ2005)과 소속 당지부에 결혼신청을 했고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받았다. 이듬해 1945년 4월 23일에는 남편 오홍상이 연안 양가령의 중앙례당에서 열린 당의 제7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해방전쟁시기 오홍상은 화중군구 소속 제4종대 제12사 정위로 활동하다가 1949년 8월 17일 복건 복주가 해방된 후에는 선후하여 공청단복건성당위 서기, 중공룡암지위 제1서기, 중공복건성당위 조직부장, 부서기, 서기, 부성장, 제5기 성정협 주석을 력임했다. 윤봉은 복건성 부련회에서 부장, 부주임, 주임으로 활약하면서 복건일보에 는 회고문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93년 8월 복건성부련회 주임직에서 물러나 후의 어느 날 윤봉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文正一)이 복주 서호호텔에 묵으면서 윤봉을 찾는다는 통지를 받았다. 서호호텔에 도착하니 문정일은 인사하며 렬사 문명철을 아는가고 물었다.

이렇게 연안시절 이름 윤복구를 윤봉으로 고친 옛 문명철의 련인은 뒤미처 문정일이 한국에 갔다가 문명철 렬사의 후손으로부터 문명철 렬사의 묘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정일을 비롯한 중국내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모두 문명철이 어디에서 희생되고 어디에 묻혔는가를 알지 못했다.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군 본부가 자리잡았던 하북성 섭현 중원향 중원촌 원정사 바깥 모습.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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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은 문정일을 만나면서 문명철 렬사의 후손들 뜻대로 문명철 묘소를 찾아내고 그의 유해를 찾아 한국에 보내는 것을 자신의 미룰 수 없는 책임으로 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지지로 복건성당위에 보고했다. 성당위 부서기 림개흠(林开钦)은 중한 두나라 인민의 친선왕래를 알리는 력사의 견증이라면서 기꺼이 비준지시를 내렸다. 그해 1993년 11월에는 문명철의 조카인 한국 김환종(金皖钟)으로부터 문정일 선생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면서 련속 두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후 김환종한테서 또 몇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편지에서 김환종은 윤봉을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자기를 윤봉의 아들로 간주하였다. 정이 넘치는 편지들이였다. 그때에야 윤봉은 문명철의 본명은 김일곤(金逸坤)이고 다섯 형제자매에서 넷째이며 문명철이 희생된 후에는 큰형 김유곤(金裕坤)에 의해 김유곤의 맏아들 김환종이 문명철의 아들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1993년 그해 윤봉은 이미 70세라서 멀리 산서에 가 문명철의 묘소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윤봉의 작은 사위 진지겸(陈智谦)이 국외에서 돌아와서 이 일을 알게 되였고 처음으로 태원으로 날아갔다. 진지겸이 찾은 곳은 산서성 민정청과 당사연구부문이였으나 그들은 문명철을 근본 모르고 있었다.

당년의 《해방일보》에서도 렬사의 희생된 지점을 밝히지 않았기에 산서성 당사연구부문에서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진지겸은 복주의 집으로 돌아간 후 1943년 5월 18일 연안 《해방일보》를 거듭 검토하다가 신화사의 기사에 주의를 돌렸다. 진지겸은 이미 리직한 원 국가민위 부주임 문정일에게 련락하여 북경의 신화사 총사를 통해 문명철의 희생지점을 알아줄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의연히 추도회 지점 뿐이고 희생된 지점을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진지겸은 락심하지 않았다. 그는 두번째로 태원행에 올랐다. 1994년 음력설 이후 출국했다가 귀국길에 북경을 경유하면서 모 군사부문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통해 1943년 4월 14일 문명철과 그의 전우들이 적들과 격전을 벌린 곳ㅡ산서성 흔현 흔오구(忻县忻五区)를 찾아냈다.

산서성과 흔주시 민정부문의 방조하에 찾아낸, 당년 문명철이 희생된 전투가 벌어진 곳은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黄龙王沟村)이였다. 알고보니 당년 문명철 일행이 적들과 벌린 전투는 흔현 합색향 경내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이고 희생자는 문명철 등 도합 3명이였다.

진지겸은 황룡왕구촌에서 당년 력사의 견증자와 렬사 유체를 묻은 두 로인 그리고 전투지점을 답사하는 가운데서 끝내 문명철의 희생경과를 듣고 진실한 묘소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문명철의 자세한 희생경과와 묘소는 이같이 우리 조선족이 아닌 머나먼 고마운 이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당년 문명철 일행이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며 싸우던 황룡왕구촌 타라산(陀罗山)의 모습.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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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시침을 1943년 4월 14일로 돌려보면 이날 새벽 날이 희붐히 밝아올 때 팔로군 사복무장공작대원인 문명철 등 일행 4명은 하루동안의 긴장한 활동을 마치고 황룡왕구촌 맨 뒤켠에 있는 촌민 소근해(苏根海)네 집으로 들어갔다. 소근해의 형 소근무(苏根武)는 팔로군 흔오구의 양성대상인 데다가 이집은 들어오거나 퇴각하기 편리한 우점을 가지고 있었다.

문명철 등 넷은 흔오구에서 활동한지 어언 넉달이나 되고 소근해네 집을 여러번 드나들었기에 사람이나 주위환경에 대해 비교적 익숙한 편이였다. 이들 네 사람중 문명철은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 조직위원이고 팔로군 간부인 호이명(胡以明)은 호남성 태생으로 30세 좌우였다. 이 밖에 팔로군통신원 류명량(刘明亮)은 산서성 태생이고 17세였으며 리동지(老李)로 불리우는 지방간부는 30여세로 알려졌다.

이들 팔로군 사복 무장공작대원들이 활동하는 황룡왕구촌은 100여명 인구를 가진 산간마을로서 팔로군 흔현 흔오구 관할구역에 속했다. 실상은 적아교체구역이여서 당지 사람들에게 문명철은 장동지로, 호이명은 호동지로, 지방간부는 리동지로 통했다. 문명철 등이 집안에 들어서자 소근해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좁쌀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죽이 다되고 식사를 서두를 때였다. 총창을 꼬나든 왜놈 몇이 갑자기 두번째 문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근해가 먼저 적정을 발견하고 소리치니 모두들 자리를 박차고 구들에서 뛰여 내렸다. 통신원 류명량이 먼저 창턱에 놓은 수류탄 하나를 집어 도화선을 당긴 후 두번째 대문에 던졌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왜놈 몇놈이 꺼꾸러졌다. 그 사이 문명철 등 넷은 담장을 넘어 서하구기슭의 봇나무 숲속에 들어섰으며 서쪽을 향해 달렸다. 리동지가 제일 앞에서 달리고 그 뒤에는 류명량과 호동지가 따랐으며 맨 나중에 문명철이 달리면서 동지들을 엄호해 나섰다. 페결핵을 앓고 있던 문명철은 몸이 허약했지만 자기의 직책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날 동원된 왜놈과 괴뢰군은 도합 200여명이였고 두 갈래로 나뉘여졌다. 문명철 등은 앞쪽 적들의 포위는 헤쳤지만 뒤쪽 적들의 포위는 헤치기가 어려웠다. 적아쌍방은 어느덧 서하구쪽 세갈래 갈림목에 접근했다. 이곳은 골짜기가 불시에 90도로 꺾어지는 지세여서 적아쌍방은 대방을 발견하기 어렵다. 류명량이 적들을 발견했을 때는 적들과의 거리가 20메터 밖에 안되였다. 류명량은 수류탄을 던져 적 몇놈을 쓰러눕혔다.

류명량이 두번째 수류탄을 던지려고 할 때 적탄에 머리를 맞았다. 그러나 적들이 맹렬한 화력으로 문명철과 호이명을 골짜기안에 제압했기에 그들은 류명량한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류명량은 희생되였지만 문명철과 호이명은 약 30메터 거리를 두고도 어쩔 수 없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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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신속히 남구쪽으로 후퇴했다. 호이명이 앞에 서고 문명철이 뒤에 섰다. 남구 약 50메터 지점에서 적들의 화력에 의해 둘은 갈라지게 되였다. 그러다가 호이명이 희생되고 문명철도 탄알이 떨어졌다. 그의 수중에는 수류탄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적들은 대방이 전부 죽은줄로 알고 총창을 꼬나든채 문명철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찰나 문명철이 벌떡 일어나서 손에 총을 든채로 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적들은 문명철의 다리에 총을 쏘았다. 문명철은 쓰러지고 권총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두 다리에서는 선지피가 마구 쏟아졌다. 적들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자 문명철은 류창한 일본어로 소리질렀다.

“너희들 왜놈들은 조선과 중국에서 피비린내나는 폭행을 저질렀다. 너희들도 처자와 나라가 있으면서 왜 중국에 와서 폭행을 감행하느냐? 위대한 중조 아들딸들의 항일사업은 정의적이다. 인류의 진보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적들은 일시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어 일본군관이 저자를 끌어가라고 소리 지르자 한무리 왜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때라고 문명철은 품에서 마지막 수류탄을 꺼내 도화선을 당기며 적들한테로 굴러갔다…

조선 전우 문명철의 빛나는 최후, 그 희생지는 우리가 처음 알게 되는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黄龙王沟村)으로 전해진다.

중국 동지들에게 조선 전우로 불리운 문명철은 희생된 후 지금의 산서성 흔주시 흔현 합색향 황룡왕구촌 동산에 묻혔다. 그로부터 50여년 동안 당지에서는 문명철의 묘소를 잘 관리해왔고, 50여년이 지나 문명철은 그의 중국 전우이고 련인인 윤봉과 그의 작은 사위 진지겸, 여러 부문의 도움으로 황룡왕구촌을 벗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을 진지겸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보고하고 한국의 보훈처에도 알렸다. 한국 보훈처에서는 관원 두사람을 파견하여 중국 현지에서의 확인을 거쳤다.

1995년 6월 중국 외교부에서는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 문명철 렬사의 유해를 한국에 이장하는 것을 동의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드디여 1996년 10월 22일에 진지겸과 한국 김환종, 한국 보훈처의 두 관원 그리고 산서성 3급 민정부문의 사람 도합 10여명이 산서 흔현 황룡왕구촌으로 향했다. 이튿날 오후 중국땅에서 장장 52년이나 묻혀있던 문명철 렬사의 유해는 골회로 되여 한국 김포공항에 이르고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졌다. 문명철 묘소 그곳엔 문명철 등 혁명렬사들을 기리는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무렵 한국의 김환종이 복건 복주에 가서 ‘이국 모자’의 상봉을 이루었다. 잇달아 김환종의 19세 아들 김지수(金志洙)가 윤봉 부부의 도움으로 복건사범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했다. 2004년 봄에 진지겸 등은 윤봉의 부탁으로 한국 대전에 가서 문명철 렬사 묘소를 배알하고 전라남도에 가서 김환종 일가를 찾아보았다. 김환종의 딸 김수정(金秀婷)도 윤봉의 지지와 복건성 정부의 특별비준을 받아 학비 면제로 복건사범대학 해외학원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