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태항산 아리랑과 상무촌의 무명렬사묘 (1)

2022-09-19

조선의용대 무한 한구 설립 기념사진.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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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이고 포병퇀 퇀장인 무정의 발기와 지도로 태항산항일근거지 산서 료현(오늘의 좌권현) 동욕진 동욕촌(桐峪镇桐峪村)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가 열렸다. 설립대회에는 팔로군총부 포병퇀 퇀장으로 화북땅에서 일본침략군과 싸우고 있던 무정과 진광화 그리고 리유민(李维民), 장진광(张振光), 로민(鲁民) 등 21명이 참가했다. 그들은 거개가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하고 화북항일전선에 진출한 조선청년들이였다.

설립대회에 앞서 무정은 등씨 성을 가진 조선사람을 하남에서 활동하는 로민에게 보내여 로민과 리극(李克)이 하남대표의 자격으로 설립대회에 참가하게 된다는 것을 알렸다. 이날의 설립대회를 두고 로민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회의 참가자가 많지 않았지만 진동남의 각 단체와 학교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축사를 드리고 축기를 보내여 우리를 고무격려한 데다가 대표들 저저마다가 혁명의 중임을 짊어진 자각과 긍지가 한가슴 뿌듯하였기에 대회는 자못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2, 3일간 승리적으로 거행되였다.”(주: 로민. <청춘시절의 추억>,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43페지)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 입구 모습.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로민의 회고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의 정경을 요약적으로 알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그날 설립대회의 기분 속으로 젖어들게 한다.

이튿날인 1월 11일,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중공중앙과 팔로군을 대표하여 설립대회에서 연설을 했다. 팽덕회는 조선동지들의 련합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설립을 축하하고 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동지들에게 숭고한 혁명적 경의를 표했으며 마지막으로 조선동지들은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를 타승할 때까지 싸워 보다 휘황한 위훈을 세울 것을 희망했다.

설립대회는 련합회강령—‘목숨으로 일본침략자의 통치를 뒤엎으며  중국인민들과 더불어 공동으로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투한다.(誓志推翻日本侵略者统治,与中国人民共同为民族解放而奋斗)’를 통과했다.  무정이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행동강령에 대해 전문연설을 하였다. 연설의 골자요약문은 세가지로, 로민의 회고에 그대로 나타난다.

첫째, 간부양성에 모를 박아야 한다.

둘째, 중국 경내의 여러 조선혁명단체들을 통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화북의 20만 조선동포를 항일투쟁에로 뭉쳐세워야 한다.

회의대표들은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와 무정의 연설문을 놓고 뜨거운 토론을 벌리면서 “지금은 여러 조선혁명단체가 탁상공론이나 분파투쟁을 그만두고 실천적이고 단결된 전투성과로써  항일의 절박한 문제들에 해답을 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주: 로민. <청춘시절의 추억>,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43-144페지)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지나는 큰길가에 세워진 조선동지 '순국렬사전적비'.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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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대회는 계속하여 항일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면서 련합회의 강령, 선언을 토의했으며 당면 과업을 포치하고 지도기구를 내왔다. 련합회 회장에 무정, 부회장에 진광화, 조직부장에 리유민, 선전부장에 장진광, 경제부장에 한득지(韩得志), 위원에 최창익(崔昌益) 등이였다. 무정이 팔로군포병퇀 퇀장이였기에 련합회의 구제적인 조직령도사업은 진광화가 틀어쥐였다. 리유민은 팔로군 129사 적후공작부(师政敌工部)에서 활약하다가 무정의 도움으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 전근되여 진광화를 도와나섰다.

설립대회 결속 후 무정은 로민을 본 련합회 하남분회 회장으로 임명하면서 락양에 파견했다. (주: 로민. <청춘시절의 추억>,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44페지)

무정 회장이 로민에게 맡긴 과업은 1938년 10월에 무한 한구에서 설립된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조직 지도하는 영광스러운 과업이였다. 로민외 련합회의 적지 않은 동지들이 무정의 지시로 조선의용대를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이끄는 조직사업에 나섰다.

동욕진 동욕촌은 화북조선청년련합회 탄생지로 된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은 중국땅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가들로 말하면 일대 사변이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항일을 지향하고 중국공산당을 지향하는 조선의용대의 조선동지들을 우리 팔로군부대가 피로써 개척한 태항산항일근거지에로 전이하도록 조직하고 이끄는 전략적 결책ㅡ력사적인 혁명적 결책을 내린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선의용대란 어떤 성격의 의용대이고 언제 어디에서 조직되였을가, 본문은 동욕진 동욕촌에서 설립된 화북조선쳥년련합회에 앞서 조선의용대의 자초지종을 밝혀보려고 한다.

1937년 11월과 12월, 상해와 남경이 일본침략군에 선후하여 함락된 후 남경의 국민정부와 중앙당부는 중경으로 철퇴하고 국민당 당정군의 요인들은 거의 다 무한에 몰려들었다. 각 야당의 수령들, 문화계의 지명인사들도 거의다 무한에 모이고 상해, 남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해방동맹, 조선청년 전위동맹 등 여러 조선인정치단체들도 무한으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했다.

1938년에 이르러 중일 전면전쟁이 두번째 해를 맞이하고 화북, 화동대지는 련이어 일본군의 철제 아래 놓이게 되였다. 그에 따라 항전의 수도-무한은 가을 후의 잘 익은 과실과 같이 외롭게 매달려 수시로 땅에 떨어질 처지에 놓이였다. 1938년  6월 12일, 일본천황 히로히또(裕仁, 1901-1989, 일본국 제124대 천황)는 륙군성에 중국전장인 한구를 진공하여 가을이 다가올 때 싸움을 끝내라고 지령을 내리였다.

6월 18일, 일본대본영에서 제119호 대륙령을 내려 한구전역을 발기했다.(주: 탕중남 등 주필. 《일본제국의 흥망》, 세계지식출판사, 1996년 3월 출판.) 이날 참모총장도 대륙령에 좇아 제161호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중국화중파견군 선봉 나미타(波田)지대가 안경(安庆)을 공격하여 무한회전의 서막이 도꾜명령보다 앞서 열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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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보위전은 피할 수 없었다. 6월 5일, 국민정부 최고군사회의가 무한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은 중국 정부에서 륙, 해, 공 3군 도합 123개 사, 100여만명이 무한 변두리에서 일제침략군과 결전하여 중국전장의 전쟁국세를 돌려세우기로 결정했다고 명령했다. 세인의 눈길은 동방 두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일대결전에 모이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1938년 6월 중순 무한 우회포위전략에서 좌절을 당하게 되자 25개 사의 대병력을 수륙 다섯갈래로 풀어 무한에 대한 정면 진공을 개시했다. 국민당의 남북 두 전선은 패배의 운명에 떨어지고 장강의 요새들이 련이어 붕괴되였다. 항전의 수도—‘대무한을 보위하자’는 국민당당국의 함성이 터지자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조선인혁명자 100여명이 무한보위전에 떨쳐나섰다. 조선청년전위동맹에서는 ‘조선청년전지봉사단(朝鲜青年战地服务团)’을 무어가지고 중국인청년들로 조직된 ‘중화민족해방선전대’의 대원들과 더불어 가두로 나갔다. 그들은 가두에서 연설을 하고 항일 가무와 연극을 공연하고 삐라를 살포하는 등 형식으로 항일선전사업을 드세게 벌렸다. 경비원천이 없게 되자 이불을 뜯어 흰 이불 안으로 만화, 표어 등을 썼다. 그들은 하루 한끼 얻어먹으면서도 선전고동사업을 늦추지 않고 무한인민들을 항전에로 불러일으켰다.

10월에 들어선 뒤 무한은 갈수록 지탱하기 어렵게 되였다. 4개월 남짓한 무한보위전은 기울어지는 대세를 돌려세울 수 없었다. 국민당의 당정군요인들은 앞다투어 꼬리를 빼고 시민들은 소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에서는 북상항일을 주장하면서 연안으로, 적후 근거지로, 항일싸움터로 달려가 일본침략군을 무찌르자고 주장했다.

그때 주은래는 무한팔로군판사처 책임과 국민혁명군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조선혁명자들의 형편과 요구를 깊이 헤아린 주은래는 전위동맹의 동지들에게 다른 조선인단체들과 련합하여야 한다고 지시하면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할 것을 건의했다. 조선동지들과 국민당측에서도 같은 의향을 내비쳤다. 주은래는 나이 많고 병약한 동지들과 녀성들이 먼저 연안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국민당 관할구역에 남아 사업할 것을 희망하는 한편 사람을 보내여 연안에 가있는 조선젊은이들이 돌아오도록 하였다.

조선의용대를 건립할 데 관한 창의는 중국공산당의 지지와 국민당정부의 비준을 받았다. 1938년 10월 10일 중국 관내의 첫 조선인항일무장대오- ‘조선의용대’가 한구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무정이 팔로군총부 포병퇀 퇀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설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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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주은래는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설립식에 참가하였으며 <동방  피압박민족과 해방투쟁(东方被压迫民族与解放斗争)>이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보고에서 사회혁명과 민족해방과의 관계 등 적잖은 문제들을 언급했는데 절주가 흐르고 쇠소리가 쟁쟁한 주은래의 목소리는 조선의용대전사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들은 주은래의 연설을 단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주은래는 연설하다가도 강의한 의지와 슬기로 빛나는 눈으로 가끔 조선동지들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그의 연설은 강소 북부 사투리가 다분히 뿜기였다. 그래서 자신의 한어를 못 알아들을가 봐 선후 두번이나 “다들 내 말을 알아들을 만합니까?” 하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주: 김학철. <나의 전우들>,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97페지)

조선동지들이 모두가 일제히 “알아듣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은래는 비로소 시름을 놓고 연설을 계속하는 것이였다. 장장 두시간에 걸친 주은래의 연설은 조선동지들을 내내 격동 속에 잠기게 하였다.

이날 국민혁명군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郭沫若)도 참석했다. 그는 시까지 읊어 조선의용대의 설립을 축하해주었다.

조선의용대는 반무장성격을 띤 선전부대이다. 이 선전부대의 주요과업은 적군와해 선전사업과 중국인민의 항일적극성을 고무격려하는 것이였다. 10월 13일 오후 7시, 한구시(汉口市)청년회단에서 700여명이 참가한 성대한 오락모임을 가졌다. 청년회단에는 “중조 두 민족은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동북의 중조항일련군을 옹호하자!”라는 두폭의 커다란 프랑카드가 걸려있었다.

오락모임은 조선의용대에서 부른 <민족해방가>, <자유는 빛난다> 등 노래와 4명 합창 <아리랑>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시아동구제협회, 동자군, 한구시후원회 선전대대, 3.8녀성가창대 등 9개 단체에서 선후하여 노래와 연극 등 다채로운 공연을 선물했다.

조선의용대의 한 녀전사도 적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내용의 조선민요를 불렀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음과 원한을 그대로 담은 노래는 청중들의 심장을 마구 허비였다.

조선의용대에서 마감으로 연극 《두만강변》을 공연했다. 막이 열리면 강변의 한 낮은 산언덕 우에서 한 처녀가 어머니와 함께 왜놈감옥에 갇힌 지 1년 남짓이 되는 아버지를 기다린다. 처녀의 오빠는 백두산의 유격대장이다. 바로 이 시각에 오빠가 거느린 유격대가 처녀의 집이 자리잡은 이곳에서 왜놈을 족치며 나아가는데 오빠가 그만 적탄에 맞아 쓰러진다.

처녀는 결연히 총을 잡고 원쑤들을 추격한다. 늙은 어머니도 딸의 뒤를 따른다. 이어 동지들이 노래 <최후의 결전>을 부르며 대장의 시체 옆을 지나간다. “그대의 영향은 영원히 민중의 가슴속에 살아있으리라!”라는 절절한 웨침소리가 관중들의 가슴을 울린다.

연극 《두만강변》은 오락모임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오락은 끝났으나 “중조 두 민족은 단결하자!”, “동방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 구호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