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태항산 아리랑과 상무촌의 무명렬사묘 (2)

2022-09-26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의 옛 태항로신예술학교 2층 건물.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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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용대는 한개 총대와 2개 지대로 구성되였는데 지대 아래에는 분대를 두었다. 대원은 약 150명이였다. 1지대는 대체로 ‘조선민족혁명당’의 성원들로 구성되고 2지대는 대체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성원들로 구성됐다. 제3지대는 1939년에 중경에서 건립됐다.

무한함락을 앞두고 조선의용대는 한구를 일본문표어 바다로 만드는 과업을 맡았다. 거리는 뼁끼나 콜타르를 든 전사들, 사닥다리를 멘 전사들, 여기저기 큼직한 표어를 쓰는 전사들로 들끓었다. 거리의 담벽들과 대문, 시계탑과 저수탑, 거리바닥들은 특대 붓으로 문짝 만큼 크게 쓴 표어의 천지로 변했다. 조선의용대전사들은 이틀 낮 이틀 밤의 분전 끝에 “온 한구시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정신적 아성으로 만들어놓았다.”(《홍파곡(洪波曲)》. 인민문학출판사, 1979년 3월 출판.)

10월 25일 무한이 일본침략군에 의해 함락됐다. 조선의용대전사들은 적들이 시내를 전부 점령하기 2시간 전에야 무한시내를 떠났다. 무한에 들어선 적들은 아연실색했다. 온 거리가 표어의 바다를 이루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일본병사들의 계급의식을 환기시키고 반전사상을 고취하는 구호들이였다. 적들은 옹근 사흘을 낑낑거려서야 표어들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곽말약은 후에 자서전 《홍파곡》에서 적들이 “거리에 써놓은 표어를 지울 수는 있어도 머리 속에 박힌 것은 지울 수 없었다.”고 하면서 “무한이 위험을 앞둔 이 시각에 대적표어를 쓰고 있은 것은 조선의 벗들 뿐이였다!”고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무한보위전은 중국항전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역이다. 이 보위전은 하남, 안휘, 호북, 강서 4개 성을 망라한 장강, 회하 류역의 광대한 지구에 미쳤는데 쌍방 직접 참가병력은 150만명에 달하고 사상자가 50만명에 달했다. 그중 일본군 사상자가 20여만명을 헤아린다. 류례없는 이 무한보위전에서 조선인전사들은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이 땅에 피 뿌린 겨레 장병들》, 리광인, 림선옥 저. 민족출판사,  2007년 8월 출판, 제468페지)

조선의용대 2개 지대의 각 분대는 무한에서 철거한 후 여러 갈래로 나뉘여 양자강 남북안의 각 항일전장으로 나가서 주로 일본군에 대한 선동사업과 적군 와해사업을 맡았다. 그들은 직접 전선에 나가 구호전, 연설전 등으로 일본군에 투항 권고 공세를 발동하기도 하고 삐라와 표어 등으로 반전사상을 고취하기도 하면서 대적선전사업을 맹렬히 전개했다. 대적선전사업은 중국항전의 전반 정치사업 가운데의 일부분으로서 ‘선전은 곧 전투’였다.

동욕진 상무촌의 옛 홍복사 단층 건물.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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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는 설립된 2년간 일본문, 조선문, 한어문으로 된 선전책자 5만여책, 삐라 50여만장, 표어 40여만장, 적 의거통행증 1만여장을 인쇄, 발행, 살포했다. 설립된 3년 사이에는 포로 50여명을 교육하여 의용대에 참가시키고 75명 포로를 훈련시켰다. 제1,  제5 전구(战区)에서 활약한 조선의용대는 90만자 이상에 달하는 적의 방송, 문건을 번역해냈다. 각 전구의 조선의용대는 또 단기일본어훈련반을 꾸려 2년간 대적선전간부 6만여명을 훈련시켰다. 일본군 가운데 있던 조선사병들이 의거한 수자는 더욱 많다.

중국의 6개 전구, 남북 13개 성에서 전개한 조선의용대의 대적선전사업은 거대한 정신적 작탄으로 되여 일본군병사들의 반전정서를 크게 증대시키고 적들을 와해시켰다.

이 밖에 조선의용대는 상북회전, 악북회전, 곤륜산쟁탈전, 중조산반소탕전 등 수많은 중소전역에 직접 참가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사이에 조선의용대는 적군 근 500명을 살상시키고 적차량 121대를 까부신 전과를 올리였다. 제2지대는 주로 신사군과 어깨겯고 싸웠다.

무한이 함락된 후 국민당 장개석정부는 수도를 중경으로 옮겼다. 중일전쟁이 대치단계에 들어서자 국민당은 제1차 반공고조를 일으키고 도처에서 공산당소멸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조선의용대전사들은 이태 남짓한 동안 중국의 항일싸움터를 전전하는 가운데서 소극적으로 항일하고 적극적으로 반공하는 장개석의 진면모를 똑똑히 보아냈다.

제1지대와 제3지대는 1940년 10월에 중경의 총대부를 찾아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태항산항일근거지와 혁명성지 연안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이는 팔로군중경판사처에서 사업하는 주은래 동지의 지지를 받았다. 이와 더불어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이고 총부 포병퇀 퇀장인 무정도 갓 설립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로민 등 적지 않은 동지들을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이끄는 조직사업에 내세웠다.

1940년-1941년 봄 사이 각지에 분산돼있던 조선의용대의 전사들은 륙속 락양에 집결하여 황하를 건너 태항산근거지로 갈 준비를 다그쳤다. 소수의 동지들이 소북, 회북, 산동 등지의 신사군부대에 남았을 뿐이였다. 몇달 동안의 천신만고 끝에 조선의용대의 다수 전사들이 네개 패로 나뉘여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들어섰다.

몇달 동안의 천신만고 끝에 다수 전사들이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네개 패로 나뉘여 선후하여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진출했다. 박일파(薄一波)가 지도하는 ‘산서청년항적결사대’ (山西青年抗敌决死队)가 선참 연도환영에 나섰다. 태항산 팔로군총부 소재지 료현 동욕(桐峪)에 이르자 팔로군총부와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동지들이 뜨거이 맞아줬다.

당년 동욕진 상무촌에 머무른 태항로신예술학교 부분 사생들.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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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41년 6월 초순의 어느 날 오전, 날씨는 그날따라 유난히도 맑게 개였다. 동욕거리의 자그마한 광장에서는 조선동지들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 전사 김학철의 회고에 따르면 “대회에 참가한 것은 팔로군 총사령부 직속의 각 기관일군들외에도 일본인, 윁남인, 필리핀인 등이 있어서 마치 무슨 국제적 대회와도 같았다. 그 집회를 가진 목적은 우리들 즉 국민당통치구역에서 봉쇄선을 돌파하고 해방구로 들어온 조선청년들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였다.”(김학철. 《중국의 광활한대지 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196페지)

조선의용대 100여명 남녀 대원들과 팔로군 장병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인들처럼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광장은 박수소리, 노래소리로 들끓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진석련(陈锡联) 려장이 축사를 했다. 이어 385려 선전대에서 환영회를 위해 준비한 문예종목을 무대에 올렸다.

선전대원들은 일매지게 짧은 의복을 입은 것으로 조선녀성들이 입는 저고리를 대체하고 천을 몸에 두른 것으로 조선녀성들의 긴치마를 대체하였다. 그들이 조선인민의 투쟁생활을 그린 문예종목을 무대에 올리자 조선동지들은 흥분된 나머지 무대에 뛰여올라 <아리랑> 등 노래를 부르고 조선춤을 추며 어울려 돌아갔다. 환영대회가 끝난 후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와 팔로군 정치부 주임 라서경(罗瑞卿), 129사 사장 류백승, 정치위원 등소평 등 지도동지들이 조선의용대동지들을 따뜻이 만나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중국 전장에 피 뿌린 ‘조선의용대’(浴血中国战场的“朝鲜义勇队”)>. 중국넷. 2008-02-18)

조선동지들의 마음은 한없이 부풀어올랐다. 그들은 팔로군 129사 사부로 안내되여 129사 등 팔로군부대에서 활동하는 조선동지들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1941년 6월에 이르러 네패로 나뉘여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진출한 조선의용대 동지들은 팔로군총부의 통일적인 배치로 환영대회 후 부근의 상무촌으로 옮기였다. 상무촌은 큰 마을로서 이 마을에는 조선의용대 동지들 먼저 태항로신예술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동지들은 거의가 연해안일대의 대도시들에서 왔고 지식인들이였다.

환영대회가 열린 그날 저녁무렵은 날씨가 너무 좋아 김학철 등 서넛은 상무촌 입구를 흘러내리는 시내가를 거닐며 즐기였다. 그러던 그들은 역시 시내가를 산책하는 태항로신예술학교의 몇몇 녀학생들과 마주치게 되였다. 그녀들도 거의가 다 대도시에서 온 학생들이였다. 김학철 일행은 당시 널리 불리우던 선성해의 가곡 중에서 한대목을 골라가지고 먼산을 바라보며 열창했다.

ㅡ안해는 랑군을 전선으로 떠나보내네

그런데 대도시 단련을 거친 그녀들도 여간내기가 아니였다. 그녀들은 꼬물만치도 수집어하는 티가 없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아주 당당하게 나왔다.

ㅡ어머니는 아들더러 일본놈을 물리치라시네

김학철 일행은 손을 바짝 들고말았다. 과시 그녀들은 신입생인 조선의용대원들의 선배였다. 조선의용대가 동욕진 상무촌에 진주한 날의 에피소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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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동욕진 동욕촌으로 가면 단층집으로 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탄생지ㅡ벽돌기와집을 볼 수가 있다. 1941년 1월 동욕진 동욕촌회의 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동욕촌과 이어진 탄리촌(滩里村)을 거쳐 3킬로메터 밖 동욕진내 상무촌으로 활동지대를 옮겼다. 그제날 태항산항일근거지였던 산서성 료현, 즉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은 1500년의 유구한 력사를 간직하면서 전국의 문명촌으로 이름난 력사문화촌과 홍색문화촌, 민속문화촌으로 불리고 있다.

1939년 7월 5일, 일본침략군이 세번째로 산서성 료현(辽县,오늘의 좌권현)을 강점할 때 현성의 동남 32킬로메터 거리에 위치한 곳에 료현의 제3구에 소속된 동욕촌은 탄리촌과 이어진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남으로 가서 보이는 상마전촌(上麻田村)과 하마전촌은 제4구에 소속된 큰 마을이였다.

제3구와 제4구에 소속된 50여개 자연촌은 동욕촌과 마전촌 보다는 작은 편이지만 마을마다에는 우리 팔로군 기관과 부대들인 제129사, 사부, 중공북방국, 태항구당위, 진기로예변구림시참의회(晋冀鲁豫边区临时参议会), 진기로예변구정부, 팔로군총부 위생부, 로신예술학교 등 부문들이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주요 구성부분을 이뤘다.

그중 상무촌을 보면 마을 뒤로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웅장한 바위산이 자리잡고 바위산 아래에는 규모가 상당한 불교사찰 홍복사(洪福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9년 8월 21일, 필자는 태항산항일근거지 현지답사차 촌의 동쪽 변두리에 위치한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찾았다.

그제날의 홍복사는 보이지 않고 꽤나 길다란 단층집 하나만 달랑 남아 북방의 손님을 맞아줬다. 당년 일본침략자들이 불살라 버린 결과였다. 오늘의 단층집은 그대로 불교의 절로 리용되고 있었고 절 정문가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시절의 홍복사는 비교적 컸기에 조선동지들에 앞서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도 자리잡았으며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전선총부 주요 지도자들도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상무촌에 진주한 100여명 조선의용대 동지들은 먼저 홍복사의 수십칸의 방에 거처를 잡았다.

무정은 생기로 넘치는 이들 100여명을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소속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하고 화북지대내에 여러 무장선전대를 두어 태항산항일근거지 군민들 반‘소탕’과 긴밀히 배합하면서 팔로군부대들과 협동작전하도록 하였다. 새로 편성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대적선전가운데서 표어 등을 쓰는외에도 <애련(爱莲)>, <조선에 딸이 있어(朝鲜有女儿)> 등 극을 만들어 공연하면서 근거지 군민들의 한결같은 환영을 받았다. 화북의 《신화일보》는 조선동지들의 항일활동을 수차 기사화하군 했다.

  그해 1941년 8월 무정은 또 동욕진 상무촌에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을 꾸리고 항일무장투쟁에 어울리는 군사간부 양성에 착수했다. 교장은 무정, 부교장은 진광화, 교무위원은 최창익과 석정이 맡아 나섰다. 무정은 그때 포병퇀 퇀장이지만 또 화북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들의 수령인물로서 자주 틈을 내야 했다. 당중앙과 중앙군위, 팔로군총부에서 무정에게 준 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