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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짚신으로부터 구두에로

□ 김응준

  • 2007-03-16 15:41:57
나는 짚신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고있다. 더 어려서는 아버지가 삼아주는 짚신도 신어봤지만 아버지를 여읜후에는 저절로 짚신을 많이 삼아 많이 신었으니 정이 들만큼 들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삼아준 미투리(삼신)도 신어보았고 어머니가 만들어준 헝겊신도 좀 신어보았지만 어린 시절 어린 발을 보호해준 주요보호자는 짚신임에 틀림없다.

나의 고향은 두메산골이라 소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으므로 5, 6학년을 10리밖에 있는 향중심소학교로 통학해야 했다. 겨울이면 일요일마다 집에 들어앉아 짚신 두어컬레 삼아내야 한주일간을 통학할수 있었다. 논이 없는 우리 집에는 벼짚도 없는지라 마을에 두어집밖에 안되는 벼농사하는 집에 조짚을 갖고 가 벼짚을 바꾸어다가 말끔히 추려 누기를 차분히 한 다음 새끼를 꼬아 날을 량쪽 발가락에 걸고 짚오래기를 씨실로 이어가면서 꽁꽁 조이던 일, 두어컬레 삼고나면 손이 얼벌하고 때론 손가락에 물퉁이, 피멍이 지던 일, 덜 추운 날이면 짚신을 아껴 오래 신으려고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걷던 일, 반세기 흘러간 오늘에도 새록새록 눈앞에 떠오르며 무디여진 이내 가슴을 친다. 그제는 고닲은 눈물의 삶이였건만 오늘은 그지없는 향수에 젖어 떠올리는 추억의 쪼각들은 예쁘기도 하다.

내가 짚신에서 최후로 초탈한것은 1950년 훈춘2중에 입학해서부터이다. 처음 운동화라는것을 신어보는 기쁨 둥둥 날상싶었다. 기재에 의하면 운동화나 고무신 같은것이 지난 세기 20년대부터 반도에 있기 시작했지만 우리같은 시골사람, 가난뱅이에겐 퍽 뒤늦게야 차례졌던것이다.

내가 진짜 새 구두를 신어보기는 1962년 장가들 때이다. 훈춘2고중에서 교편을 잡은 때였건만 나라가 3년 재해를 방금 겪은 간고한 시기였는지라 나의 가정 셈평도 두칸짜리 초옥에서 살면서 혼례식양복도 사입지 못하고 한 친구의것을 빌어입던 기구한 신세, 대학교시절의 막역지우 리해산씨(연변대학 교수)가 연길에서 사보낸 좋은 구두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친구가 자기의 반달로임 30원을 들여 정성 다해 사보낸 귀중한 선물이였다.

나에게 제일 좋은 구두가 있게 된것은 1997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미국에 사는 맏딸의 요청으로 두번째 시카고 교외에 가 체류했다. 서양의 제일 큰 명절인 12월 25일 성탄절을 앞두고 쇼핑고조가 일어나는무렵 나는 딸애를 따라 시카고의 이름난 구두상점으로 갔다. 세계에서 이딸리아구두가 제일 좋다는것을 알고 딸애는 나더러 무조건 이 명표의 구두를 골라잡으라 했다. 그래서 산것이 120딸라의 빨간색 단화였다. 이 구두는 모양새도 예쁘거니와 발이 편안하고 가죽이 좋아서 이미 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해진 곳이란 없다.

사랑스러운 딸은 병마를 못이겨 먼저 타계했지만 나는 이 구두를 신을 때마다 딸의 지극한 효성을 잊지 않고 되새겨보며 가끔 짚신을 신고 다니던 고난의 동년, 재난의 소년시절을 추억의 하늘에 떠올리며 발걸음에 채질한다.

우리는 대격변의 시대에 살아왔다. 우리의 이 세대에 와 수천년 신어내려온 짚신의 력사에 노오란 종지부 찍고 짚신은 박물관이나 민속촌에 걸려있는 유물로 되고 구두의 시대는 재빨리 전진하여 본토의 제품뿐만아니라 세계의 소문높은 명표까지도 신을수 있는 개방의 세월, 초요의 언덕에 이르고있으니 어찌 상전벽해라 이르지 않을수 있으랴.

좋은 구두를 신되 짚신의 공로와 고난사는 잊지 않고 더 분발하여 더 먼데로 달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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