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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인 사

□ 오설추

  • 2007-07-19 22:28:41
[아리랑수필음모작]

1

점심시간에 부페식인 류학생식당에 가보면 재미나는 풍경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주방앞에 밥과 찬을 차려놓기 위해 놓여진 식탁이다.

식탁북쪽켠에는 주방아줌마들, 남쪽켠에는 한국학생들이 줄느런히 서있다. 학생들은 밥을 뜬후 골을 꾸벅 숙이며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식사를 마친후에도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간다. 그런데 중국학생들은 와 식사를 해도 고개를 꾸벅이기는커녕 눈도 꺼벅이지 않는다.

하긴 나부터도 주방일을 하는 아줌마들에게 언제 한번 곱다랗게 인사해준적이 없으니… 이런 린색한 인사에 아주 면역이 돼버린 아줌마들로서는 준것 없이 친절한 한국애들의 인사가 적게 주고 많이 먹으려는 속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것이다. 그래그런지 공연히 목에 힘을 주며 입도 뻥긋 안해준다.

2

위만주국시기 아버지가 일하던 만선일보사의 숙사문지기는 산동뜨내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로인을 어른으로 깍듯이 대접하며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꼭꼭 인사를 드렸단다.

그때 서너살이였던 큰오빠와 큰언니도 아버지본을 받아 꼭꼭 인사를 드렸는데 맨머리바람으로 나왔다가도 그 로인만 보면 집안에 들어가 모자를 쓰더란다. 인사할 때는 아버지처럼 모자를 벗으며 해야 하는줄로 알았던 모양이였다.

일본이 투항하자 잠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폭도들이 3층인 우리 집까지 올라왔는데 급해난 아버지가 어머니더러 못을 거꾸로 박은 널을 타고 뒤창아래로 도망치라 하더란다. 하지만 해산달이여서 배가 남산만한 임신부가 그 대못 하나를 믿고 아래층으로 허망 내려갈수는 없었다. 바로 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 문지기로인이 나섰다 한다.

장춘에서 빠져나온후 우리 집은 연길에 와 자리잡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옆집에 사는 사람도 산동뜨내기출신이였다. 그런데 그런 뜨내기 눈에도 우리 조선인들이 우습게 보이는지 우리 집 창문앞에 굴뚝을 세워놓고도 성차지 않아 올리막인 우리 마당에다 도랑까지 파놓는것이였다.

아래집은 같은 한족이여서 건드리지 못한다는 리유에서였다. 그 뜨내기마누라는 전족(缠足)인데다가 90도로 꺾어진 허리병신이여서 공용변소에 갈수 없었다. 그래 일을 본다 하면 대낮에도 도랑 첫머리에 앉아 일을 보기 일쑤였다.다 해결하고나서는 구정물 한통을 와르르 쏟아놓는데 그러면 온갖 오물들이 호호탕탕하게 우리 마당에 흘러들군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언제 한번 군소리 없이 그 뜨내기만 보면 《따거, 니호우?》(형님, 안녕하세요?) 하고 살갑게 인사를 해주는것이였다.

20년이 지난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 혼란하던 세월에 집집마다 대수색을 당했는데 바로 이런 아슬아슬한 판에 역시 산동뜨내기네가 우리 집을 막아나섰다.

그 마누라마저 구십도로 꺾어진 허리중력을 마다하고 온종일 우리 집 문앞에 지키고 앉아있었다. 똥오줌을 내갈기던 그 출신 좋은 산동이웃으로 하여 폭도들이 우리 집 문앞에 얼씬도 못했다.

3

우리 민족의 인사성은 이렇듯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있었다. 그 생명력의 핵심이란 곧바로 인사성 본유의 속성인 인간평등으로서 민족을 초월한 사랑의 힘이였고 무궁한 생명력을 자랑한것이다. 이 생명력에 의해 산동출신 문지기 로인이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들을 구할수 있었고 이 생명력에 의해 무지막지하던 이웃녀인까지 우리 동네 사람들을 돌봐줄수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풋풋하던 인정들이 말라가고있다. 우리 식탁의 풍경은 점점 살벌하게 변해가고있었다. 이불거죽에 풀을 먹인듯이 뻣뻣해지는 남쪽켠의 아줌마들은 더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고 갑니다》 하던 인사소리도 모기소리처럼 힘이 빠지고 약재처럼 귀해가고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을 표시하던 그 맑던 인사가 점점 삭막해지고 말그대로 소닭보는 풍경이 출현되였다.

《잘 먹겠습니다.》하는 인사에 《그래 부모슬하 떠나 고생하는구나 많이 먹어》 하는 정이 묻어나는 인사로 화답할수 없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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