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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연변가요 즐겨 부르는 리유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김창근주임에게서 알아본다

  • 2008-05-15 19:58:47
연변인민방송국은 이제까지 “연변가요자랑”을 23회 가졌다. 참여한 과외가수가 276명, 관중수는 1만 3000명을 훨씬 웃돈다. 2006년 3월부터 시작한 연변가요자랑은 해마다 10회씩 열렸고 우리 연변의 각 향과 진에 우리의 노래소리를 울려퍼지게 했다. 살아 생전 처음이라고 즐겁게 찾아오는 관객들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생에 영원히 잊을수 없다는 관객까지 우리 연변노래는 이제 우리 연변의 독특한 땅내음 그리고 나름대로의 독특한 향기와 우리 연변의 후더운 인정을 아우르며 세상사람들의 가슴속을 파고들고있다.

연변인민방송국 “연변가요자랑”을 기획하고 편집, 연출을 맡고있는 음악부 김창근주임은 연변가요자랑이 그렇게도 사람들의 마을을 사로잡을줄 몰랐다면서 우리 연변가요의 매력을 새삼스레 느꼈다고 했다. 연변노래의 매력에 대해 김창근주임은 내가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향수이고 문화적으로도 몸에 밴 선률이기에 더욱 사랑하지 않을가 생각한다고 했다.

연변가요의 전반에 대해 김창근주임은 이렇게 자기의 일가견을 폈다.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연변의 가요는 창작대오가 방대했고 창작자들의 열정도 매우 높아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그런데 지난 세기 중반부터 외래음악의 충격으로 가요계가 서리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재능있는 음악인들이 돈벌이를 위해 외국에 나갔거나 장사길에 들어섰다. 음악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도 자기가 배운 전문직업을 버리고 외국이거나 연해지구에 가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음 훌륭한 작품을 싣던 원지가 적은것이 문제다. 그제날에는 잡지사들이 뒤표지에 연변노래를 싣는 등 지면이 넓었지만 지금은 광고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전문예술잡지도 우리 연변의 새로 창작된 가요에 대해 외면하고있다. 다음 그 다매체의 발달에 따른 피해이다. 그제날 연변인민방송국의 매주일가는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듣는 프로였다. 그러나 지금 그런 풍경을 볼수 없다. 한국위성TV 등의 충격으로 연변노래가 한때 소외당했다고 말하는 김창근주임은 연변가요는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고있다고 했다. 그는 연변이라는 특수한 지리와 인문환경을 꼽았다. 연변노래는 조선이나 한국이 아닌 나름대로의 음악령역을 가지고있는만큼 연변노래를 부르는것은 일종 향수라고 했다.

사람들이 연변노래를 즐겨 부르기 시작하면서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는 연변가요자랑을 기획했고 또 가요창작에 모를 박고 연변노래창작모임도 가지는 등 방송에만 매이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폈다. 지금 연변인민방송국 브랜드프로로 자리매김을 한 “연변노래자랑”은 연변노래외의 가요는 기본적으로 불허하고 우리의 귀에 익숙한 연변노래만을 고집한다. 각 현, 시와 손잡고 연변가요잔치를 펼치고있고 년말에는 금, 은상 수상자들이 최고를 가리는 대잔치도 펼친다. 지금 연변노래하면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옛가요가 첫손으로 꼽힌다. 현재 창작되여 연변인민방송국 매주일가로 방송되고있는 가요도 우리의 삶과 애환을 담은 가슴 훈훈하게 적셔주는 노래가 적지 않다. 이런 가요들을 살리기 위해 김창근주임은 “다시 들어보는 매주일가”, “허설화의 90년대 가요”, “오영란의 4080연변가요”, “안홍천의 연변신작가요” 등 프로를 신설하고 또 우리의 노래만을 고집하지 않고 외국의 음악도 포섭하여 방송으로 내보내고있다.

1989년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한 김창근씨는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작곡리론교원으로 교편을 잡다가 2001년 연변인민방송국에 전근, 그 기간에 중앙음악학원 연수를 거쳐 한국경희대 대학원 음악학 석사를 마치고 현재 연변인민방송국 음악부 주임으로 근무중이다, 그는 선후로 “사랑의 고개”, “구제비둥지”, “어머니소망”, “우리 아버지”, “우리는 하나이기에” 등 노래를 창작했다.

김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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