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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두산과 현대판 "탈출기"

□ 류연산

  • 2008-11-20 15: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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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국경절, 눈이 부시게 하늘이 푸르른 날 나는 내두산행(奶頭山行)에 올랐다. 내두산의 울긋불긋한 가을은 서정이 되여 그림처럼, 시처럼, 음악처럼 내 마음을 은은히 울렸다.

콩크리트로 다져진 도시의 인공미속에서 밟히고 구겨진 마음의 주름이 다름이질을 한듯이 반듯하게 펴졌다. 어깨를 지지누르던 짐을 부리운듯 전신이 홀가분하고 가슴을 옥죄이던 탕개를 푼 듯이 마음이 즐거웠다.

내두산에 첫 발자국을 찍은때로부터 꼭 25년이였다. 어떤 날 아파트 창문을 마주하고 눈감고 서 있노라면 어느덧 내 마음은 내두산에 닿아있고 내두산의 낯익은 얼굴들이 고조곤히 모여 한담설화들을 터놓았다. 그럴때면 미풍마냥 귀를 간지르고 열풍마냥 얼굴을 달구고 훈풍마냥 가슴 후련하고 강풍마냥 전신을 오싹하게 하는 백두산 사계절의 천변만화의 절주속에서 무르익어가는 내두산의 풋풋한 인정이 내 가슴을 흥건히 적셔주었다.

백두산 산문(山門)을 코앞에 두고 내두산으로 가는 샛길로 차머리를 돌리는 순간 과객으로 가다오다 들려서 인사 여쭈었던 모습들이 길가의 나무처럼 꿋꿋하고 가을꽃처럼 소담하고 단풍잎처럼 수줍게 비쳐왔다. 차창으로 불려오는 한낮의 따사로운 향기는 어서 오라고 팔 벌려 반기는 내두산 사람들의 입김처럼 훈훈했다.

저만치 두개의 봉우리가 가지런히 바라보였다. 마치도 젊고 풍만한 녀인의 젖가슴처럼 불룩하게 솟아오른 두 봉우리아래, 깊숙하게 꺼져들어간 녀인의 앙가슴과 뉘엿한 배허벅과 같은 언덕에 작은내두산 마을이 위치해있다.

일찍 20세기 2,30년대에 작가 최서해가 살았고 "탈출기"의 현장이라는 설도 있다. 주인공의 이주경로가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서 망망한 평야였다고 하니 소설의 환경은 세전이벌이나 평강벌 어느 곳으로 추정된다. 내두산과 같이 세상과 동떨어진 숲속의 한적한 마을에서 주인공 박씨가 했다는 온돌쟁이, 두부장사가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하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임을 감안하면 결코 내두산에서 최서해가 살지 않았다고 할 만한 근거는 아니다.

마을 뒤산이 왕덕산, 항일련군 왕덕태(王德泰)장군의 이름을 본딴 이름이다. 1930년대 이 고장은 항일유격근거지였음을 미루어서 "탈출기"의 주인공 박군이 탈가하여 왔던 고장이 아닐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뼈가 부서지고 고기가 찢기더라도 충실한 로력으로 살려"고 "최면술에 걸린 송장"처럼 살아온 박군이 "XX단에 가입"하여 "비바람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벼랑끝 보담 더 험한 X선"에 선 리유는 "농사를 지어서 배불리 먹고 뜨뜻이 지내자. 그리고 깨끗한 초가나 지어놓고 글도 읽고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서 리상촌을 건설하리라."(이상은 "탈출기"에서 인용)는것이였다.

금방 대학을 졸업하고 편집이 되여 이곳에 왔을 때 흙벽에 너와지붕의 인가들은 급변하는 세상하고는 동떨어진 먼 옛날 정지된 시간속으로 나를 이끌어갔었다. 내두산은 도막나무로 불 때고 쌀밥 먹고 아이들 공부시키는, 진작 최서해가 꿈 꾸어온 리상촌이였다.

주변 여느 마을에 비해 해발고가 높은 고산지대이면서도 무상기가 길어서 기적같이 벼농사가 가능하고 태고연한 숲속이라서 자연이 풍성했다. 아침에 일어나 꿩탕 생각이 나면 바당문을 펄쩍 열면 꿩이 푸르르 날아 솥 안에 꼰져 박히고 노루회가 먹고 싶으면 빨래 방망이를 들고 굴뚝 쪽으로 가면 노루 한마리가 날 잡아 먹소 하고 머리를 내밀고 섰고 생선국이 소원이면 반두를 들고 개울에 가서 출렁출렁 몇번 댔다 떼면 되고— 사시절 고기 먹고 사는 내두산은 5백년 무릉의 복사꽃숲에 숨어 살아온 도화원과 같은 신기한 마을이였다.

내가 주숙을 했던 집 김씨의 부친은 조선 갑산출신이고 아버지가 이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는 감자장에 새하얀 이밥을 술목이 불어지게 떠서 먹으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헤쳤다.

"우리 마을을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부르는 리유가 뭔지 아시오? 바로 저 내두산 때문이라오. 우리 아버지는 백두산이 머리라고 하면 내두산은 젖가슴과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오. 세상에 에미 젖을 먹지 않고 자란 사람이 어디에 있겠소?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며느리 선을 볼 때 젖가슴부터 보았어요. 가슴 크고 높은 계집이면 아이를 굶길 념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거지요. 내두산은 신령이 깃든 산이라오."

그날 밤 나는 바깥주인하고 그 아들하고 웃방에서 잤다. 새벽잠이 없는 나는 그날 새벽에 밖으로 나왔다. 먼동이 터오며 동녘 하늘로부터 부잇한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어둠속에 묻혀 거뭇한 형국으로 마을을 지키고 섰던 내두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녀인의 호함진 젖무덤과 귤빛 젖꼭지가 클로즈업 되어 눈앞에 나타난것 같았다. 마치도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단잠에 든 아이마냥 마을은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아직 불빛이 흐르지 않는 집집 따뜻한 구들에는 한조각의 땅을 소유하고 그것을 괭이로 갈고 씨를 뿌리고 생명의 재생을 보는것을 락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단잠에 들어있었다.

이집저집에서 꼬끼요 하고 수탉이 홰를 쳤다. 태고연한 수림은 별안간 기운을 얻어 우렁차게 설레였다. 잠을 깬 새들이 가까운 나무가지에서 지저귀고 짐승들의 온갖 소리가 먼 숲에서 울려왔다. 마을에서는 컹컹 개가 짖고 꿀꿀 돼지가 울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소. 제 아무리 고귀한 황제라도 사흘만 굶겨놓으면 거리에 나가 구걸을 하게 마련이라니깐. 농업은 젖가슴과 같소. 그래서 문화대혁명 그 모진 세월에도 우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내두산에 제를 지냈지라우."

자연의 협화음속에서 주인의 말이 노래가 되여 울려왔다.

나는 내두산을 례사로운 눈으로 바라볼수가 없었다. 그 봉우리는 한폭의 그림이였고 한수의 시였고 한편의 음악이였다. 깊은 숲속에 살면서 별과 달과 해와 동무해온 이 마을 농부들의 창작이였다. 그들은 붓 대신 쟁기를 들고 종이 대신에 대지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작곡을 하고 있었다.


2

불과 몇해전까지만 해도 흙길이였는데 지금은 마을까지 포장이 되여있었다. 너와집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죽어라고 짖어대던 개 한마리도 얼씬대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을 잤던 김씨네 집을 찾아갔다. 마당에 풀이 무성했다. 집을 비운지 오래된듯 문짝은 떨어져나가고 옷장하며 식장하며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사람이 손이 닿지 않은 물뽐프는 빨갛게 동농이 올라있었다. 쫓기듯 페가(廢家)를 나왔다. 그리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곳에 거뭇한 옷차림의 사내가 우두커니 서있다가 나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그는 명월구에서 왔고 일년에 헥타르당 700원을 주기로 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버리고 간 땅을 붙인다고 했다. 내가 금방 들어갔다가 온 집을 가리키며 어디로 갔는지 모르냐고 물었더니 대체로 도시로 가지 않았으면 한국으로 갔지 않겠는가고 되물어왔다.

십년전에 들렸을때만 해도 로인들은 돌아가시고 아들내외가 열 다섯살난 아들을 데리고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젊은내외는 비바람 막아주는 작은 집이 있고 분여받은 경작지에 가축이 있는데 이 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에 있느냐고 삶에 만족했었다. 아버지세대에는 소라고 하면 가축으로만 알았지 목축업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그러나 자기는 농사도 하고 목축도 하고 그 수입으로는 먹고 사는 데는 별로 걱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애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현성으로 류학을 보내야 하는데 그때가 근심이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라며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는데…

나는 왕덕산을 에돌아서 내두산 집단촌으로 갔다. 1939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집단부락으로 너와집은 한채도 볼수 없고 지금은 40여호의 벽돌기와집으로 된 새마을로 변모되였다.

집도 좋고 길도 골목까지 포장이 되었지만 마을은 십여년 전에 비해 오히려 썰렁한 분위기였다. 40대가 되여보이는 한 사람을 보고 물었더니 원래 60여 호가 살았는데 한집 두 집 떠나들 가고 마을에는 총각들 하고 로인들만 남아서 지킨다고 했다. 학생이 없어서 학교도 페교가 되였단다.

농업에 대한 국가의 혜택이 날로 커가고 쌀값도, 고기값도 날따라 오르고 있는데 농토를 버리고 떠나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닌가는 나의 말에 그 사나이는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나는 최서해의 "탈출기"를 다시금 머리에 떠올렸다. 박군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친구의 충정을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리유인즉 정애(情愛)가 있는 사람으로 목숨 같은 내 가족이 유린 받는 것을 차마 볼 수만 없기 때문이였다.

"탈출기"에서 김군은 집을 떠난 박군한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판 "탈출기"는 부의 창출을 겨냥한 "탈촌기"다.

귀로에 오른 나의 시야에 안겨온 내두산이 의미하는것은 그 아버지의 농사만도 아니고 그 아들의 농업과 목축업만도 아니였다. 하나는 농업과 목축업을, 다른 하나는 가공업과 류통업을, 하나는 농촌을, 다른 하나는 도시를 먹여 키우는 젖가슴으로 나란히 솟아있었다.

연길—내두산 거리는 갈수록 가까워져 지금은 3시간, 불원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2시간으로 좁혀진다. 바야흐로 농촌과 도시는 하나로 어울려서 농촌은 도시를, 도시는 농촌을 떠나서 살수가 없는 샴쌍둥이가 될것이다. 산업화는 공동체의 해체를 불러오고 민족전통문화의 소실을 불러오지만 이는 과정이다. 이런 진통은 해가 뜨는 래일을 향약할것이다. 식어가던 나의 마음에어느덧 따스한 온기가 솟아났다.
2008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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