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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바다

□ 최호

  • 2009-12-02 15:16:00
제목을 “관용의 바다”라고 시적으로 달았지만 이 글의 원래의 제목은 “어머님의 그래, 그래…”다. 세상을 살면서 굳어진 어머님의 “그래, 그래”는 타인과의 마찰을 피하는 정직성이였고 타인에게 관용을 베푸는 화음이기도 했다.

종래로 남과 얼굴 한번 붉히거나 언성을 높인적 없는 어머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래, 그래”로 대방의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었고 상대를 편하게 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을 평화롭게 만들어가군 하신다. 철없던 시절 어머님의 그 무조건적인 순응에 나는 괴이쩍게 생각하기도 했다. 시비가 뻔한것인데도 시비쌍방을 다 옳다고 하시는 어머님의 심중을 알수가 없었다. 왜 우리 어머님은 저렇게도 시비경우가 없으신걸가? 안타까운 마음에 볼부은 소리를 하면 어머님은 여전히 “그래, 그래, 인젠 너도 셈이 드는 모양이구나. 시비가릴줄 아는걸 보니”라고 하신다.

몇년전 1년간을 칩거한 나날이 있었다. 언론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안일과 허영과는 담을 쌓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왔다고 자부했던 나에게는 암울하고 아픈 나날이였다. 이제 택시기사밖에 할일이 없지 않나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님에게만은 나의 그런 아픔을 절대로 알려드리고싶지 않았다. 나를 집안의 “큰사람”으로 아는 어머니에게는 거의 절망적으로 들릴 소식이다. 가족과 친우들에게 단단히 비밀고수를 약속하고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어머님은 지난 세기 50년대 후반에 있었던 반우파운동에서는 우파로, 60년대의 “문화대혁명”시기에는 특무, 현행반혁명분자로 몰려 억울하게 50세를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떠나가신 아버지때문에 밝은 날을 별로 보시지 못했고 혼자 몸으로 올망졸망한 우리 4남매를 키우시느라 허리 펼 날이 없으셨다. 그런 어머님께 효성을 다하지는 못할망정 못난 자식의 아픔까지 나누어갖게 할수는 없었다.

매번 어머님을 찾아뵐 때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칠세라 가슴 조이며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노래부르고 춤추고 고색이 짙은 어머님의 긴긴 이야기들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 내 자식들 다 귀하지만 그래도 이 어미를 자주 찾아주는 “큰사람”이 제일이라며 남들앞에서 늘 나를 치켜세우셨다. 그리고 함께 갔던 친구들에게 시골에서 철따라 나오는 산나물이나 앵두나 오얏 그리고 보기에도 군침이 흐르는 풋옥수수와 정성들여 빻으신 고추가루, 된장따위들을 한보따리씩 만들어 쥐여보내군 하셨다.

그렇게 내 아픈 사연을 감추려고 나름대로 전전긍긍했던 나날이였지만 결국 어머님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어머님이 락루하시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다시 사업에 복귀하게 되자 한걸음에 어머님께로 달려가 새로운 사업터로 발령이 났음을 전했다. 소식을 접한 어머님은 한식경이나 이 못난 자식을 여겨보시더니 마침내 와락 끌어안는것이였다. 그때도 어머님은 “그래, 그래, 맘고생 많았지?”를 되뇌이시며 하염없이 락루하시는것이였다.

그때에야 나는 어머님이 언녕부터 나의 모든 사연을 알고계시면서도 자식의 애끓는 마음에 괜히 상처만 되지 않을가싶어 모르는체했다는것을 알았다. 그날 밤 어머님은 “그래, 그래… 큰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야 배아프게 난 이 에미가 더 잘 알지”를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다 큰 자식을 품에 안고 오래도록 어루쓸어주시는것이였다.

날이 밝아 상경하는 자식을 동구밖까지 바래주시며 어머님은 “그래,그래 큰사람 말이 맞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도 수많이 겪을텐데. 그렇다고 남을 절대 미워하지 말게. 남을 미워하면 그 미움은 자기한테 돌아온다네. 그래서 그냥 고맙게만 생각하시게.” 하면서 시골의 안로인치고는 경지가 높은 말로 당부하셨다.

그러고보니 어머님의 입에 굳어진 말씀인 “그래,그래”는 관용으로 일관된것이였다. 어머님의 관용은 자신에 대한 인내,성찰과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과 겸양, 사랑과 베품에서 비롯된 깊고 넓은 마음의 바다였다.

결혼하여 8년간이나 잉태를 못해 최씨가문의 대를 끊는다는 구박속에서도 “그래, 그래 최씨가문의 대가 끊어질가 근심하는 시부모님들의 마음 오죽하겠느냐” 며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며 감초와 쑥을 뜯어다 손수 달여 수없이 드신 당신, “그래, 그래 맏며느리인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랴”며 자식같은 짜개바지 시동생, 시누이들을 키우다싶이 하여 시집장가 보내신 당신, 지성이면 감천이랬던가, 끝내는 우리 4남매를 세살 터울로 줄줄이 낳아 건강하게 키우신 당신, 당신이 겪은 그 고난의 과정들은 애간장을 녹여내는 설음과 고통을 스스로 묵새기며 감내하며 관용으로 다스려가는 과정이였고 가슴에 품고 삭이고 또 삭여서 마침내 관용의 바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였다.

참으로 어머님의 관용의 바다는 깊고 넓었다.

아버지께서 “현행반혁명”, “조선특무”로 몰리며 거리에서 조리돌림당하고 시골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개조”를 할 때에도 우리 집은 마을회관구실을 하였다. 계선을 나눈다고 “개조대상”과 말조차 건네기 꺼려하던 그 시절에 다른 “개조대상”네 집들은 외로움과 적막감에 싸여있었지만 우리 집에서만은 석유등불밑에서 코구멍이 새카맣게 되면서도 마을사람들이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밤깊도록 웃음꽃을 피웠다. 10여리 길을 걸어 공사(지금의 향)소재지에 가 배급을 타오는 날이면 개눈깔(알)사탕 몇알을 사와도 마을아이들에게 나눠주시는 어머님이시였다. 우리 집을 얕잡아보는 아무개네는 주지 말자고 하면 어머니는 그래 그래 하시면서도 없는게 원쑤지 애들에게 뭔 죄가 있냐며 모자라면 깨물어 쪼개서라도 나눠주신다. 그러하신 어머님때문에 우리 자식들은 마을아이들속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는커녕 개눈깔사탕 한알이라도 얻으려는 동네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였다. “그 집 참 선비집이여…” 하는 동네어른들이 있어 우리는 이집 저집 무랍없이 다니며 누룽지나 감자구이 같은것들을 나누어 먹을수 있었고 탈없이 성장할수 있었다.

세파속에서 어머님의 체구는 해마다 작아져 거쿨진 이 자식이 보듬어 안아도 한품에 들어오는 왜소한 체구의 로구가 되여가지만 당신의 그 관용의 바다는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는가싶다. 세상을 다 품을듯한 관용의 바다의 넓고 깊음은 텅 빈듯하여 오히려 더 충만하다.

요즘 들어 가끔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불쾌한 일을 당할 때면 어머님의 “그래, 그래”를 떠올리며 거칠어지는 마음을 다스려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어느덧 어머님의 “그래, 그래”를 가슴속에 담은 이 자식도 관용의 바다가 되는 련습을 하고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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