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라이프

내 기억속의 신풍촌

□ 최기자

  • 2009-12-22 18:39:07
진달래광장으로부터 공항에 이르기까지의 신풍촌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이다. 옹기종기 들어앉았던 초가집들과 어쩌다 눈에 뜨이는 단층벽돌집들은 오간데 없고 무연하게 펼쳐졌던 논밭은 한자락도 찾아볼수 없다. 그 자리에 고층건물들이 자리다툼이나 하듯 줄줄이 들어앉았는데 말이 신풍촌이지 촌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가끔 기차로나 뻐스로 신풍촌을 지날 때면 아련한 추억속에 잠기게 된다.

어렸을 때 난 드문드문 신풍촌에 놀러 가군 했다. 1대에 우리 해주 최씨 고모가 계셨기때문이다. 비록 친척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해방전 21살 나이에 조선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연길에 온후 처음 알게 된 해주 최씨여서 친오랍누이처럼 지냈다. 그때 아버지나 할머니를 따라 신풍에 다녔었는데 할머니는 신풍을 사득촌이라 했다. 지금 내가 소중히 보관하고있는 중화민국 38년 9월 20일 연길현인민정부에서 발급한 우리 시집의 가옥소유증에는 연길현 연길시 용성촌이라 했고 같은 해 6월 30일 동북행정위원회에서 발급한 토지소유증에도 용성촌으로 된걸 보면 신풍으로 이름이 고쳐진것은 1949년후인것 같다.

그때는 뻐스가 없었던 때라 연길서시장에서 신풍 1대까지 걸어가야 했다. 여름이라면 몰라도 눈보라 윙윙 몰아치는 한겨울에 십리 길을 걸어간다는것은 어린 녀자애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이팝(입쌀밥)이 내 발길에 날개를 달아주었던것 같다. 그때 고모집에서 먹은 입쌀밥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서 군침이 스르르 돈다. 새하얀 입쌀을 한술 푹 떠넣고 두세번 숟가락을 빨지 않으면 밥알이 숟가락에 붙어나올 정도로 찰지였다. 지금은 이런 밥을 죽어도 먹어볼수 없다. 물론 옥수수밥만 먹던 애가 어쩌다 먹어보는 밥인것도 있겠지만 밥이 그토록 맛이 좋은것은 벼종자도 벼종자려니와 유기농사를 지은데 더 큰 원인이 있었던것 같다.

사실 신풍은 유명한 벼육종가 최죽송어른으로 소문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인민정부 농업부에서 명령을 발포하여 '1951년농업애국풍산모범을 장려'한 그가운데 이 사가 벼풍산모범호조조로 당선"되였다. 그리고 1952년 3월 28일 《동북조선인민보》에 발표된 "최죽송호조조에서 증산계획을 세운 경과"라는 제목의 오태호선생님이 쓰신 보도를 동년 4월 《인민일보》에서 전재함과 아울러 편집자의 말을 달아 전국 각지 호조조, 농업사, 로력모범들에게 최죽송호조조의 이 경험을 학습하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힘입어 신풍촌은 해해년년 과학영농, 유기영농으로 벼산량을 높였다. 그때 신풍촌은 시내 가까이에서 석탄불을 때며 입쌀밥을 먹을수 있고 문화생활이나 경제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아 총각들이 이마를 튀기며 색시를 맞아들이는 곳이였다.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나가 농민이 된바엔 신풍으로 시집(신랑은 갓 대학졸업이고)을 가는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나나 우리 부모의 마음이였던것 같다. 황차 내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고장이 아니던가.

우리 시집마을은 신풍 3대인데 60년대초 주은래총리가 다녀가신 마을이다. 그때 주은래총리는 마을에서 제일 잘 지었다는 김재수목수할아버지네 집에 머무르시고 다음으로 중요한 수행인원들은 우리 시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미국의 흑인령수 로버트월리암도 우리 시집에 머물렀었다. 우리 시집은 1946년에 지은 집이라고 한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느 해인가 동제대학인지 하는 학교에서 두세 사람이 와 집기둥이며 서까래며 온돌을 비롯하여 집안팎을 자세히 관찰하고 집안 네 구석의 온도를 측정해가면서 잘 지은 초가집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도 집을 괜찮게 지은것 같다. 그런데 시어머니 홀로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집이라 생활이 여간 궁핍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의 제의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집의 재봉틀을 들어다놓고 다른 집의 모범단이부자리를 가져다 얹어놓는 등 "행복"하고 "부유"한 모습으로 꾸몄다고 한다. 진정 우리 시집 물건이란 알뜰하기로 소문난 시어머님께서 가마니를 짜 하나 둘 사들인 찬장안의 이쁜 그릇들과 찬장우에 층층이 아슬아슬 올려놓은 크고작은 소래 그리고 찬장옆에 큰것으로부터 작은것으로 줄느런히 세워놓은 반들반들 윤기나는 오지독들이였다.

주은래총리가 다녀가신후부터 국내외 손님이 오면 농촌이라면 무조건 신풍이고 신풍이면 의례 3대였다. 그리고 신풍 3대라면 김재수할아버지네 집과 우리 집이였다. 내가 시집을 온후 이 집에서 맞은 손님중에는 우리 나라의 위대한 수학가이신 화라경선생, 송임궁지도자 그리고 이름모를 미국녀성, 향항손님, 일본손님, 또한 기억할수 없는 손님들도 여럿 된다.

특별히 귀한 손님이 온다 하면 마을은 잔치집이다. 손님 하나에 층층이 붙어오는 사람들로 마을은 대번에 들끓는다. 마을길은 언녕 깨끗이 쓸려있고 우리 집은 고부가 밤새 씻고 닦고하여 알른알른 윤기가 돈다. 찰떡, 두부, 순대 그리고 도라지, 더덕, 고사리 볶음은 물론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갖출만한 음식은 모두 갖춰진다. 물론 동네 아낙네들이 다른 집에서 음식을 만든다. 길어야 한시간을 좀 넘기는 손님접대가 끝나면 수고한 인원들이 남은 음식들을 먹어주는것으로 막이 내려진다. 외국사람이란 조선사람만 볼수 있었던 70년대 농촌새색시가 미국이나 일본사람을 만나고 무술영화에서나 볼수 있었던 향항사람들을 만나니 희한하고 신기함과 더불어 조심스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들의 손을 잡던 때가 어제 같은데 세월은 벌써 40년이 흘러갔다.

신풍촌은 비록 내가 태여난 고장은 아니지만 나의 20년 인생이 고스란히 스며든 곳이다. 이곳에서 난 엄마가 되고 늦깎이 학생이 되고 교원, 편집, 그리고 소위 문학인이 되였다. 1970년대, 내가 신풍에서 문예공연자료랍시고 긁적거릴 때까지만 해도 연변의 한다하는 문화단체들에서 창작하거나 공연한 다음이면 신풍촌에 내려와 농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군 했다. 연변가무단 연변화극단(그때는 연극단을 화극단이라 했다), 주, 시문화관, 연변문예(지금의 연변문학) 등 문학, 문화예술 단체들에서 수시로 농촌에 내려와 현지창작도 하고 빈하중농들의 의견도 듣고 창작학습반도 열면서 농촌문화사업을 적극 도와나섰다. 신풍문예선전대는 이와같은 문화예술단체들의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단단한 실력을 갖춘 농촌문예선전대로 활약할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예선전대에서 시, 가사, 막간극, 삼로인, 재담과 같은 작품들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할수 있었다.

밭도 농민도 없는, 현대화한 고층건물들로 도시경관을 이루고있는 오늘의 신풍, 내 기억속의 신풍촌은 이제 색갈이 바뀌였다.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