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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계시록

—리 광 학

  • 2009-12-22 18:39:49
연길시교 인평촌 뒤마을 부르하통하 제방언제에서 북쪽제방 기슭으로 부르하통하강물이 동으로 흐르고 북쪽 광산동 골짜기 골물이 흘러내려와 합치는 합수목에서 서쪽으로 백여메터 되는곳에 연변료양원이 오붓하게 자리를 잡고있다.

료양원 서북쪽 대문가의 언덕모서리에 지난 세월 쉼없이 흐르던 작은 샘터 하나가 있었다. 이곳을 먼 옛날부터 백석약수터라 불렀다. 이 샘터에서 맑디맑은 샘물이 솟아올랐는데 그 맛이 시원하고 달콤하여 지나가던 길손들도 걸음을 멈추고 납작 엎드려서는 시원한 약수를 마신다.

60년대 개구쟁이시절 나는 이 약수터 부르하통하 남쪽마을인 인평촌에서 살았다. 찌는듯한 한여름이면 나는 큰애들의 뒤를 졸졸 따라 부르하통하에 뛰여들어 물장구를 치며 무더운 더위를 피하군 하였다. 그러던 한번은 큰 애들의 꼬드김에 마음을 크게 먹고 어벌차게 부르하통하를 건너가 약수터를 찾아 샘물을 실컷 마시였다. 그리고는 샘터에서 시간가는줄을 모르고 한나절이나 장난 치다 강을 헤염쳐 돌아와보니 강가에 벗어놓았던 팬티가 잃어졌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던 일이 지금도 기억된다.

겨울철이면 우리 개구쟁이들은 부르하통하 강물이 얼기 바쁘게 썰매, 스케트를 타며 즐겼다. 정신없이 놀다보면 한겨울에도 갈증이 나고 그러면 약수터를 찾아 시원한 샘물을 마시군 하였다. 샘물은 겨울에도 얼줄 몰랐다. 샘물에는 민간에서 "상골"이라 불리는 새우 같은 벌레들도 헤여다녔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짙게 감도는 하얀 서리와 김이 가관이였다.

그후 70년대에 나는 고중을 졸업하고 고향마을에 돌아왔었는데 생산대의 밭이 부르하통하 제방언제 강안에 있다보니 늘 그 곳 생산로동에 참가하였었다. 우리 젊은 또래들은 일하다 쉼참이면 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강을 건너 약수터를 찾아 샘물을 마시였다. 기실 내가 살던 앞마을에도 5~6메터 땅깊이에 물뽐프를 박고 식수를 해결했는데 수질이 비교적 괜찮았지만 약수터의 샘물에 비하면 비할바도 안되였다.

약수터의 샘물이 수질이 좋아 주정부에서 1983년에 이곳에 연변료양원을 짓기로 하고 터전을 잡았다. 그로부터 이 료양원은 사회에 공헌이 특출한 사람들에게 료양터로 제공되였다. 료양원 입주자들은 자연늪에서 낚시를 즐겼고 버드나무 우거진 유보도에서는 산책하며 약수터의 시원한 샘물을 마셨다. 근방의 회사나 단위들에서도 봄가을 들놀이때도 이곳을 즐겨찾았다.

그러던 90년대 중반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 약수터 샘물을 명표 부랜드로 격상하고 광천수공장을 이곳에 앉히였다. 그리고는 대량적으로 약수를 뽑아냈다. 광천수공장에서 생산한 약수는 비닐통에 포장되여 연길시내는 물론 타지방에도 수없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몇년인가 줄기차게 샘물을 뽑아내자 엄마의 젓줄기가 마르듯 샘물줄기가 마르더니 종당에 영영 솟아오르기를 멈춰버렸다. 자연의 섭리를 어긴 결과였다.인간들의 과욕에 노하여 샘줄기가 심술을 부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무차별 물자원개발로 인하여 빚어진 악과이다. 소문이 무성했던 백석약수터 샘물이 마르자료양원의 이미지도 저락되였다. 점차 사람들의 발걸음도 드물어 졌다. 약수터는 썰렁하고 스산하기 짝이 없다.

무릇 세상만사에는 모두 도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이 약수터 샘물을 사랑하고 아끼며 분수에 맞게 퐁퐁 솟아오르는데 만족하고 솟아오르는 량만큼만 받아 마시면서 자연의 혜택을 누리였다면 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연의 순리를 고히 지키고 그에 순응했더라면 약수터샘물은 지금도 퐁퐁 솟아올라 세세손손로 후세사람들에게도 복을 전했을것이다.

백석약수터 샘물은 우리의 시야에도, 기억속에서도 소리없이 영영 사라져버렸지만 샘물은 가면서 우리들에게 많은 계시를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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