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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밀차

□ 안수복

  • 2010-03-04 15:54:25
요며칠 음식점 뒤울안에 모아놓은 음식찌꺼기가 감쪽같이 없어지군 했다. 진거리와 7리가량 떨어진 촌에 살며 돼지, 닭, 오리, 게사니… 따위 짐승치기로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구부정한 오십대 사나이가 구겨진 마른 얼굴에 맹랑한 모습을 짓고 허탕을 칠 때마다 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싶은 심정이였다.

“오늘은 어떡하나 이 돼지먹이 도적을 잡아야지…”

어둠이 내려오자 어슬렁어슬렁 검은 형체가 다가오더니 음식찌꺼기를 모아놓은 양철통에서 미리 갖추어온 비닐통에 음식물찌꺼기를 옮겨담는것이였다.

“도적이야, 도적이야…!” 나의 새된 소리에 남편이 손전지를 들고 바람같이 달려왔다. 손전지불빛이 검은 형체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난 그만 깜짝 놀랐다. 90세도 넘는 거동마저 불편한 얼굴이 귤껍질같이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아닌가?

“자네들이 리해하게. 우리 집에는 간경화복수로 앓는 막내아들외에는 아무도 없수다. 바람앞의 초불 같은 아들에게 닭알이라도 삶아주려고 닭 몇마리와 게사니 몇마리를 사놓았는데 먹을거리가 없어서 이 늙은것이 그만 주책없는짓을 했수다….”

돼지먹이 도적을 잡으면 한바탕 혼내려던 나는 불쌍하고 가련한 늙고 쇠잔한 할머니를 대하자 저도 모르게 측은한 감정이 생겨나면서 평생 소여물과 돼지먹이를 떠나지 못했던 친정아버지의 가래토시 같은 얼굴모습이 떠올랐다. 나와 남편은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어느새 할머니가 가져온 비닐통에 음식물찌꺼기를 담고있었다.

그때로부터 할머니는 매일 밀차를 밀고 우리 음식점을 드나들었다. 남편은 조금이라도 할머니를 돕기 위하여 매일 음식물찌꺼기를 할머니가 갖고온 비닐통에 옮겨주는가 하면 큰 눈이 내리면 큰길가까지 눈을 치고 할머니 밀차를 대통로까지 밀어다주거나 집까지 밀어다주는 일이 많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밀차를 밀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파파늙은 할머니와 투정 한번 없이 할머니 밀차를 수걱수걱 밀어주는 남편의 구리빛 얼굴을 대할 때마다 어쩐지 아버지의 밀차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인생이 기구하였다. 두번 혼인에 1남4녀를 두었는데 그나마 병을 달고 사는 자식들로 하여 평생을 허리 펼새가 없었고 시름을 놓을새가 없었다.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내가 중학교에 다닐만 하니 아버지의 보배아들까지 중병에 걸려 연변병원에 일년이나 입원했어야 했었다. 반년이나 입원했던 내가 퇴원한지 겨우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아버지는 생산대 공수를 많이 벌기 위하여 25년 동안이나 생산대 소사양원노릇을 했는데 소에게 박힌적도 있고 소위 “양병”을 얻어 대수술도 했었지만 일년 사시절 생산대 소사양원실을 떠나지 않았다.

1991년 12월, 내가 식당을 시작하자 70 고령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돼지치기를 한다면서 밀차를 마련하고 음식점의 음식물찌꺼기를 날라가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송구스러워 말릴라치면 “도적질하는것도 아니고 친딸의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인데 별소리 다한다”며 운동삼이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밀차는 쉬는 날이 없었다. 당시 투도에는 술공장이 호경기다보니 멜개(술찌꺼기) 로 돼지치기 하는 대붐이 일었는데 아버지의 밀차는 일찌감치 멜개를 퍼올릴 자리를 차지하느라고 꼭두새벽부터 멜개칸에 가 있었는가 하면 채사일이 끝난 마가을에는 채사밭을 돌며 버린 도마도며 무우잎, 양배추뿌리며를 걷어들였다. 지어 장날에는 파장하기를 기다렸다가 채농들이 팔다버린 채소찌꺼기와 농촌아줌마들이 팔다버린 썩은 감자거나 호박 혹은 행인들이 먹다버린 수박껍질, 오이꼬투리까지 빼놓지 않고 주어왔다.

어느때부터였는지 밀차를 미는 아버지께서 헌옷을 뜯은 헝겊오래기로 다리를 동여매고 다니셨다. 알아보니 다리동통으로 밤잠도 설친다는 엄마의 말에 룡정시중의원에 가 교수를 보였더니 좌골신경통이란 진단이 내렸었다. 아버지는 목숨과는 천리라며 돼지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나감과 함께 아버지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에 연변병원에 갔더니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렸다. “대퇴골무균괴사”란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지도 4년이 되여온다.

아버지의 밀차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앞선다.

아버지의 사랑을 당연한것으로만 받아들였던 나, 오늘에야 아버지가 젊은 시절을 엄마와 떨어져 살며 25년간이나 소사양원노릇을 한 그 연유와 80세를 앞둔 고령에까지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돼지먹이 밀차를 끌었던 그 연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아버지 밀차, 아버지의 밀차는 아버지의 인생살이였고 사랑밀차였고 자식들의 삶의 끈이였고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등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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