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라이프

산다는 일

□ 남명철

  • 2010-03-11 18:53:16
우리 말 속담에 “밤잔 원수없고 날샌 은혜없다”는 말이 있다. 뜻인즉 세월이 흐르노라면 사무치던 원한이나 가슴을 녹이던 은혜라도 점차 담담해지고 잊혀지고 퇴색해진다는 소리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공식에도 례외는 있는가보다.

때는 전례없던 문화대혁명 후반기 소학교를 다니던 나는 조부께서 해방전에 촌장을 한두해 지낸 “력사문제”의 덕을 톡톡히 입고있었다. 가문의 맏이로서 구학을 배워 선비소리를 들으셨던 조부님은 대바르신덕에 촌로들의 추천으로 성남촌에서 촌장을 몇해 지냈었다.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자기 밭이나 집을 갖추지 못하여 계급성분이 빈농으로 획분되고 촌장을 지낸것도 정부로부터 일반적 력사문제로 결론지어졌지만 소위 문화대혁명이란 미친 바람이 터지니 잡귀신으로 몰리여 여지없이 투쟁당하고 온 가족이 시달리였다. 하다보니 나는 늘 동네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았고 선생님들께서도 몰리워대는 천덕꾸러기였다. 더구나 소학교 졸업학년이 다 되도록 “홍소병” 즉 지금의 소선대조직에 들수 없는것이 나에게는 큰 설음이였다. 평소에 공부나 로동도 남보다 못지 않게 하고 심성까지 착해 빠지다보니 천진무구한 아이들이 조직선거를 할 때면 당연히 표수가 적은것이 아닌데도 매번 그 우리 집의 “력사문제”때문에 미끌어떨어지군 하였다. 그래서 집에 와서 울며불며 하소연하면 아버지는 말없이 애꿎은 담배만 피우시고 어머니는 돌아앉아 우시곤 하셨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때 부모들의 마음이야 오죽 아팠으랴…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당시 지신공사(지금의 룡정시 지신향) 당위서기 사업을 하시던 김봉윤씨를 만나서 “어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제쳐두고 아이들까지 도무지 고개를 들고 살수 없으니 아예 흑룡강 깊은 오지에라도 이사가서 이꼴저꼴 안보고 살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시였다. 인품이 후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김봉윤씨는 “세월이 이런게 좀 참고 지내게, 학교의 일은 내가 말할테니 기다리게” 하고서는 퇴근하시는 길에 학교에 들려서 혁명적 경각성이 매우 높으신 교장선생님께 “가정과 교육할수 있는 자녀를 갈라봐야 한다”고 이야기하시였다. 당시 로선 지엄하신 당위서기께서 지시하신터라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오매불방 바라던 “홍소병”에 제일 꼴찌로 가입하게 되였다. 그래도 좋아서 싱글벙글 하는 나를 서글픈 눈매로 바라보시던 부모님의 처연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세월이 썩 흐른 팔십년대말의 어느날 당시 룡정시림업국 국장으로 사업하시던 김봉윤씨를 만나서 문안인사를 올리면서 어릴 때 홍소병에 들던 얘기를 꺼내게 되였다. 김봉윤님은 사람 좋게 허허 웃으시며 “그런 사소한 일을 지금도 기억했나? 나는 잘 생각나지도 않는데…”라고 하시였다.

친척이나 지어 형제자매들까지도 계급계선을 가르느라 래왕을 단절하고 이웃끼리도 소닭보듯하던 야박한 세월에 공정한 말 한마디 선뜻이 해주는이가 몇이나 있었으랴…

이미 고인이 되신 김봉윤과 그 “사소한 사건”은 35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가끔씩 떠올라 차붓한 인간지정을 감지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산다는 일이다.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