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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넙적고무신

리광학

  • 2011-06-17 08:38:19
째지게 가난했던 60~70년대 내가 살던 고향마을 중장년들은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그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하얀 고무신의 그 모양새를 빌어 “넙적고무신”이라고도 불렀다.
큰 아버지께서도 마을의 행사나 동네 나들이에 하얀 넙적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 어릴적 나는 명절때에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웃동네에 계시는 큰아버지를 모시러 자주 다녀왔다. 그때 큰아바지는 늘 한복차림을 하셨는데 중절모에 하얀 두루마기와 우가 너르고 아래가 좁은 바지를 입으셨다. 그리고 양말목에 좁은 바지가랭이를 질끈 집어넣고 하얀 넙적고무신을 신으셨다. 그리고는 그 차림새로 우리 집에 오셨다. 원체 키가 크고 우람진 체구에 코수염까지 기른 큰아버지의 한복차림은 그렇게도 멋져보였다. 지금도 눈을 감고 큰아버지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 그 영상이 또렷이 안겨온다.
한생을 농부로 살아오신 아버지도 례외가 아니셨다. 아버지는 동네 마실을 다니실 때도 늘 하얀 넙적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하얀 넙적고무신을 신고 동네 어느 군일집에 가셔 술을 폭 마시고 거나해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튿날 이른아침 술이 깨신 아버지는 하얀 넙적고무신이 바뀐것을 발견하였다. 한짝은 얼마전에 산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였고 한짝은 이미 밑바닥이 닳아버린 동네 어느분의 낡은 하얀 고무신인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나를 깨우시고는 당장 동네를 돌아다니며 바꿔오라고 하셨다. 잠을 덜 깬 나는 눈을 비비면서 밑바닥이 닳은 하얀 넙적고무신 한짝을 들고 온 동네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며 찾았다. 헌데 하얀 넙적고무신을 신는 동네분들이 많았던지라 쉽게 찾을수가 없었다. 한참 동네를 돌던 나는 신을 찾지 못한채 풀이 죽어 그대로 돌아오는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해 아버지는 짝짝 고무신으로 여름과 가을을 지나 보냈다. 밑바닥이 닳아 물이 새게 되자 신바닥에 옥수수 껍질을 펴고 다니셨다.
이듬해 바가지를 긁어대시던 어머니가 시내 장마당에 갔다 오시면서 또 아버지에게 햐얀 넙적고무신 한컬레를 사오셨다. 이튿날 아침 어디에선가 매캐한 탄내가 나기에 살펴보니 아버지가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때며 아침밥을 짓는 사이에 가느다란 쇠줄꼬챙이를 얻어다 새로 산 하얀 넙적고무신에 자신의 이름자를 그려놓는것이였다. 그래서인지 다시는 고무신발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하얀 넙적고무신은 어른들이 농사일에 즐겨신은 신발이였다. 아버지도 하얀 넙적고무신을 신고 일밭에 나가셨다. 일밭에 가서는 꼭 밭머리에 하얀 넙적고무신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맨발바람으로 일을 하셨다. 하얀 넙적고무신이 때가 지거나 더러워지면 길가의 소로지잎을 뜯어 문지르고 도랑물이나 소래에 물을 받아서는 하얀색이 돋아오를 때까지 씻었다.
아버지는 하얀 넙적고무신은 발에 신으면 참 편하고 편리하다고 하셨다. 하얀 넙적고무신은 연한 고무에 밑바닥이 평평하여 좀체로 발이 부르트는 일이란 없었고 길을 걷다가 흙모래가 들어가면 신을 신은채로 발뒤축을 살짝 빼고 흔들흔들 하면 금시에 털어버릴수 있었다. 여름날 작은 물도랑을 만나면 시끄럽게 신을 벗을 필요없이 바지가랭이만 슬쩍 손으로 걷어올리고 신을 신은채로 물에 벌렁 들어가도 별문제가 없었다. 비가 와 질척거리는 마을길에서도 고무장화가 귀했던 시기는 넙적고무신이 최고였다. 간혹 진흑탕물이 넘쳐나 하얀 넙적고무신에 들어오면 물에 헹구면 그만이였다. 나도 어릴적 급히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어벌크게 자주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을 작은 발에 질질 끌고다니다 아버지의 눈에 띄우면 혼쌀이 나군 하였다.
하얀 넙적고무신은 씻기도 쉽고 마르는 시간도 빨랐다. 그 시절 사우나처럼 찌는듯한 삼복철이면 아버지는 오전내 생산대 일을 끝마치고 땀을 뻘뻘 흘리다가도 집문 앞 도랑을 찾아 도랑물에 몸을 헹구고 하얀 넙적고무신에 도랑물을 듬쁙 채운채로 절그덩절그덩거리며 집마당에 들어서군 했다. 그리고 신을 벗어 툭툭 물을 털어버리고 바자에 걸어놓는다. 그러면 점심식사를 마치기전에 물기가 없어지며 재빨리 마른다.
80년대초 아버지는 갑자기 중병에 걸리셨다. 하여 늘 발이 퉁퉁 붓기면서 평소에 신던 하얀 넙적고무신에 발이 꼴똑 넘쳐나 몹시 불편해하셨다. 이를 본 어머니가 너무도 안스러워 앞마을 공급판매합작사에가 원래의 고무신보다 조금 더 큰 하얀 넙적고무신을 사드려서야 편해졌다.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다. 그후 아버지는 세상을 뜨기전까지 줄창 그 고무신을 신으셨다.
그후 세월이 흘러 80년대말과 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마을의 로인들이나 중늙은이들 거의 모두가 하얀 넙적고무신을 즐겨 신었었다. 하여 밭머리에서나 동네분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면 쉽게 하얀 넙적고무신이 눈에 띄였다.
헌데 농촌산업화의 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에 의하여 고향마을의 논농사가 사라지고 밭을 다루는 농호들이 점차 줄어들고있다. 그래서인지 하얀 넙적고무신도 줄어들고 사라져가고있다. 몇년전 어느해인가 촌민위원회 기바꿈사업일군으로 고향마을에 갔었다. 마침 어느 농가에서 회의가 진행되였는데 출입문 마루에 촌민들이 벗어놓은 신발들이 수두룩이 널려있었다. 대부분 시체에 맞는 구두나 려행용신발이였고 하얀 넙적고무신은 한컬레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리고 고향의 거의 모든 농호들이 농사를 짓지 않고 있었다. 그분들은 분명히 농민들이였지만 또 실질은 농민들이 아니였다. 그대신 그제날 헝겊신을 즐겨신던 외지분들이 마을의 논과 밭을 차지하고 스스럼없이 꿈을 익혀가고 있었다.
요즘 그 어느 시골이나 벌방 어느 곳을 가도 우리 민족의 하얀 넙적고무신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웬지 오늘따라 그제날의 하얀 넙적고무신이 하냥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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