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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은혜

  • 2011-08-12 09:25:12

올해도 8.15로인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해마다 이날이면 연길에 살고있는 우리 3형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명절을 보낸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올해 로인절을 쓸쓸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강진이 발생하고 쓰나미까지 덮친 대재앙의 그날 세상을 하직하셨다.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볼가 이 글을 쓴다.

어머니는 6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삼촌집에 얹혀 살았다. 삼촌네 역시 째지게 가난했던지라 철이 좀 들자 어머니는 닥치는대로 무슨 일이든 다하셨다고 한다. 남의 집 애도 봐주고 밥도 해주고 허드레일까지…… 어머니의 동년시절을 그렇게 고달프고 힘든 나날의 련속이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17살 꽃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우리 5남매를 낳아 키우셨다.50~60년대의 중국은 아주 힘든 시기였다. 어머니는 초봄에 풀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물을 뜯어다 식량에 보태고 가을이면 이삭주이 거기다 해마다 돼지도 길렀다. 식량도 모자라는 세월이라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찌꺼기로는 돼지먹이를 해결할수 없어 시내의 친척집이나 친구집에 독같은걸 맡겨놓고 뜨물을 받았는데 거의 날마다 동이를 이고다니면서 뜨물을 받아다가 돼지를 키웠다.내 기억에는 막내동생을 임신해 몸이 만삭인 어머니가 공원가의 친구집에 가서 뜨물을 이고오던 모습이 또렷이 남아있다.

어머니가 하도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간덕에 우리 남매들은 배고픔을 모르고 그 고난의 년대를 무난히 넘길수가 있었다.

남동생 둘은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어머니는 날마다 빨래를 했고 밤늦게까지 등불을 낮추어놓고 앉아 바느질을 했다.한잠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한 모습이였다.

문화대혁명을 학교에서 겪은 우리 4남매는 모주석의 “농촌은 광활한 천지로서 거기에는 할일이 많다”는 호소를 받들고 선후하여 농촌으로 내려갔다.

부모의 슬하에서 근심걱정없이 자란 우리는 너나없이 가는 농촌이라 기분이 잔뜩 들떠있었지만 두 자식을 이틀사이에 그것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곳이라 여긴 농촌으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그날 가슴을 부둥켜안고 쓰러졌다고 한다. 썩 후에야 안 일이였지만 마침 마실을 오셨던 동네분들이 어머니를 밀차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니 망정이지 그때 우리는 하마트면 어머니를 잃을번 했다.

내가 농촌에 내려간지 보름정도 지났을 때 어머니가 집체호로 찾아오셨다. 어떤 곳에서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근심되여 밤에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오셨을 때 마침 내가 식사당번이엿다. 그때 우리는 녀자애 둘이 한주일씩 번갈아가며 밥을 했는데 집에서 부엌일을 해보지 못한 우리는 밥을 태우지 않으면 설구군 했다. 게다가 젖은 땔나무가 불이 잘 붙지 않아 여간 애타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보고만 있던 어머니가 저녁에 우리들을 앉혀놓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무가 젖었으니 방법을 대여 말리워야 아침밥을 제때에 지어 일군들을 먹여 일하러 보낼수 있지 않겠니. 저녁에 아궁이의 불이 다 꺼지면 장작을 아궁이안에 서려놓아라. 그러면 밤새 나무가 아궁이의 화기에 말라 아침밥을 하기 쉬워질거다.”

그후로 어머니의 말씀대로 나무를 아궁이에 셔려놓고 가마목에 널어말리고 했더니 밥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1977년 대학입시가 시작되자 녀동생과 남동생이 대학에 입학했다.동생들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아들고 울안에 들어서자 암으로 투병중이시던 아버지와 내성적인 성격에 얌전하기만 하시던 어머니는 마당에서 둥실둥실 춤을 추셨다.

“우리 집안에 대학생이라니? 대경사로구나!”라고 하시면 대견해하시던 아버지는 동생들이 대학을 마치는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그후로는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다니던 가두공장이 문을 닫다보니 생활비라야 아버지 단위에서 나오는 30원이 고작이였다.어머니는 굶어죽는한이 있어도 자식들이 학업을 마치게 해야 한다면서 남의 애들을 두셋씩 맡아보아 생계에 보탰다.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나니 줄줄이 태여나는 손자손녀 역시 어머니의 손길을 떠날수 없었으니 어머니는 그 고생을 락이라고 하시며 달갑게 여기셨다.손군들이 대학입학시험을 칠 때에도 어머니는 점심밥을 맛나게 지어놓고 길목에 서서 기다리면서 학교문앞에는 가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젊어서 남편까지 앞세운 운도 없는 로친네가 입학시험장소에 나타나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손군들이 시험을 잘 치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손군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공부도 한결같이 잘해 모두가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 나가 세계에서 이름난 회사에 입사하자 어머니는 손군들 자랑에 세월 가는줄 몰랐다. 그때가 어머니에겐 생전에 제일 행복한 순간들인것 같다.

자식을 낳아키워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내가 어머니가 되여 자식들을 외국에 떠나보낸 지금 어머니의 정이 새삼 더 그립다.

어머니 사랑을 어미거미에 비유하기도 한다. 어미거미는 새끼거미들이 까나면 새끼거미들의 먹이로 자기 몸을 통째로 내맡긴다. 새끼거미들이 달려들어 살을 뜯어먹어도 어미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달갑게 서서히 죽어간다. 나중에 새끼거미들이 다 떠나고나면 어미거미는 빈껍데기만 남는다. 찢어진 거미줄에 걸려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는 어미거미의 빈 껍데기가 부모의 신세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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