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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마음으로 금현을 뜯는다

국가급무형문화재 가야금 전승인 김성삼교수를 만나

  • 2012-07-02 09:59:08

김성삼교수가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가야금을 가르쳐온지도 어언 36년 세월이 흘렀다. 2011년에 가야금이 길림성무형문화재로부터 국가급무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한두달후면 김성삼교수도 성급가야금전승인으로부터 국가급가야금전승인으로 승인받을 전망이다.

핍박에 못이겨 “량산”에 오르다

어려서부터 악기에 취미가 있어 피리를 불기 좋아하던 김성삼(1955년생)교수는 화룡1중에 진학한후 학교관현악대에 들어가 색스폰을 배우게 되였다.

후에 그는 교향악대에 유독 색스폰이 없다는것을 알고 트럼페트로 방향을 바꾸게 되였다.

1973년 7월, 그는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등교하고보니 뜻밖에도 전공이 가야금으로 바뀌여있었다. 연변예술학교에서 “10년 동란”후 처음으로 민족악기전공을 회복하면서 신입생들에게 민족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던것이다.

자가 어찌 아녀자의 악기를 다룬단 말인가. 김성삼교수는 학부의 배치에 펄쩍 뛰면서 아예 집으로 돌아갈 타산으로 이불짐을 쌌다. 이때 가야금교원인 조순희선생이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그를 찾아왔다. 선생님의 내심한 설복을 거쳐서야 그는 마지 못해 시험삼아 해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김성삼교수는 정작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가야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가야금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악기가운데서 력사가 가장 길고 보급률이 가장 높고 또 우리 민족이 가장 애착하는 악기라는것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애착심은 열심히 배우는 동기가 되였다. 그는 녀자들의 악기라고 가야금을 감추어가지고 다니기도 했지만 배움에서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2학년에 올라가서는 무대에 올라 독주할수 있는 기예를 갖추게 되였고 1976년 졸업시에는 가야금교원으로 학교에 남게 되였다.

주가로 만방의 예술무대에 우뚝

김성삼교수는 1976년 12월부터 1년 1 월간 룡정시 지신향에 공작대로 파견되였다가 1978년 1월에 학교에 돌아온 조순희교원과 함께 12현 5성음계 전통가야금을 23현 7성음계로 개량하는데 성공했다. 1979년 봄, 그는 화룡시문공단 배우들과 함께 상해에서 50여차의 순회공연에 참가하였다. 어느날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있는데 웬 낯선 손님 한분이 그를 찾았다. 상해음악학원에서 고쟁(古筝)을 가르치고있는 하보천교수였다. 교수는 김성삼에게 상해음악학원에서 독주회를 가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그 다음날 아침 그가 상해음악학원 극장에서 독주음악회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하보천교수는 이번에는 그더러 상해음악학원에 며칠 머물면서 연주종목들을 록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는 록음여가에 상해음악학원 악기연구제작실을 돌아보게 되였는데 여태껏 구경해보지도 못했던 다양한 악기선들이 눈에 띄였다. 그런 악기선을 가야금에 장착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가진 김성삼교수는 가야금독주곡을 록음한 대가로 받은 3000원을 되내놓으면서 가야금선 한틀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시기 고쟁개량에 한창이던 하보천교수는 김성삼교수에게 상해음악학원에 남아 공부하는 한편 고쟁개량에 동조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또한 쾌히 승낙했다. 그는 상해탄에서 점점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그는 “상해의 봄”음악회에 참가하여 연주우수상을 수상하고 그해 10월에 있은 전국민족악기개량 평의에서 김성삼교수가 개량에 참가한 “나비식고쟁”은 “중대성과상”을 획득하고 그는 시험연주원으로 상해음악학원에 남게 되였다. 하지만 연변에서도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커 국가민족사무위원회를 내세워 그를 연변예술학교에 “체포”해왔다.

금은 빛을 잃지 않는다

1983년, 김성삼교수는 독주작품 “심청조곡(안국민 작곡)”으로 전국민족악기작품콩클에서 연주 3등상을 수상하고 1984년 5월에는 중국음악가대표단의 성원으로 프랑스, 마로끄 등 유럽공연에 참가하였다. 이때로부터 가야금독주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성삼교수는 선후로 미국, 일본, 조선, 한국 등 나라와 지역들을 돌며 수십차의 개인독주음악회를 펼쳤고 여러 급별의 연주콩클에 참가하여 묵직한 영예들을 따냈다. 그의 연주작품들은 지금까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을 비롯한 60여개 성급 이상 방송매체들을 통해 전국의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김성삼교수는 여태까지 참여한 많은 공연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은 1985년에 있은 미국방문공연이였다고 한다. 그번 공연에서 중국조선족공연팀은 뉴욕, 워싱톤 등 대도시에서 7차례 공연하였는데 공연마다 3000명이 되는 관중들이 극장에 운집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조선인들은 중국조선족이 티없이 깨끗한 민족의 예술을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단서 민족의 얼을 심다

난 30년간, 김성삼교수는 연변대학 음악학부에서 최미선(음악학부 교원, 박사학위 획득), 김소영(한국 한양대 박사과정) 등 수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는데 그중 석사연구생만도 12명이다. 김성삼교수는2001년부터 2009년까지 음악학부의 학부장으로 사업하면서 몹시 다망한 가운데서도 “중국조선족악기개량에 대한 사고”, “조선족예술교육체계 및 양성모식연구” 등 무게 있는 론문들을 국내외 간행물에 발표하였다.

“연주는 한 작품을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작품의 내용을 가슴으로 터득하고 마음의 금현을 튕겨야 관중들에게 시각, 청각, 감각 등 여러 면의 만족을 줄수 있으며 감성의 샘줄로 청중의 감성의 뿌리를 적셔줄 때 비로소 쌍방의 교감이 완성되고 작품은 완벽하게 다시 태여나게 된다.” 이는 몇십년간의 교수와 연주생애에서 쌓은 김성삼교수의 일가견이다.

재 중국음악협회 회원,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 연변음악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하고있는 김성삼교수는 가야금전승인으로 지정되여 책임이 막중하다고 하면서 중국조선족이 살고있는 집거구마다 1개의 가야금기지를 건립하는것이 새로운 목표라고 밝혔다.

김인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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