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광채를 발산하는 주옥같은 단시 한수, 명상의 늪에서 회오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는 신변잡기 한편 그리고 허구한 날 밤을 지새며 공략하는 마라손 소설 한부…… 그런 매 하나의 문학작품들은 작자의 피타는 로고가 편자의 투철한 형안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오성의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존속하게 되는것이다.
작자가 창작하는데에도, 편자가 편집하는 데에도, 독자가 독서를 하는데에도 공통으로 필요되는 “공구”가 있어야 하는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전”이다. 나에게도 그런 공구서적이 하나쯤은 있으니 거기에는 잊을수 없는 사연이 슴배여있다.
상세기 70년대 말기라고 기억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이 두 이웃사촌은 황해바다라는 지척이면서도 묘연한 주랑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소 닭 보듯이 서로서로 불신과 반목으로 지내는 처지였었다.
그즈음 여기 항간에서는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중국동포들에게 기증하는 갖가지 한국책들을 사사로이 갖고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흘러간 옛노래”의 카세트테프들도 암암리에 나돌면서 그 귀맛좋은 한국류행가들이 불려지고있었었다. 당시 아마추어음악애호가로서 시문련음악가협회의 회원인 나는 그 눈물나게 욕심이 동하는 “가요반세기”란 노래책을 퍽 얻고싶었던지라 큰맘 먹고 그 방송국에 엽서를 띄웠었다. 과연 몇달이 지나 두툼한 소포를 받아안았었다. 무지무지하게 큰 보물을 얻은듯한 기분으로 단숨에 소포를 헤치고보니 그만 빵꾸난 튜브처럼 혼신의 김이 푹 빠지는것이 아니겠는가.
“오라는 딸은 아니 오고 외통 며느리만 온다”더니 오매불망 학수고대하던 노래책은 아니 오고 금성판 “국어사전”이라는 공구서적이 눈을 딱 감고 아웅하며 나오는것이였다. 락망이였다. 그렇게 서운할수가 없었다. 금시 끓어번지려고 부글거리던 비등점이 대뜸 꽁꽁 얼어붙는 빙점으로 추락한것이였다. 화김에 그것을 어느 구석에 처박아버리고 다시는 그 노래책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말았었다…… 그후, 어느땐가부터 성급대형문학지인 《장백산》잡지에 한국추리소설가 김성종의 추리소설 “제5의 사나이”가 련재되고있었다. 한겨레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서로간에 색다른 나라인만큼 한국이란 이 자본주의국가의 사회물정과 인심세태를 적라라하게 펼쳐내는 작가의 그 핍진한 글속 황홀경에 푹 빠져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글속에 범람하고있는 외래어 변종의 낱말들이 성가시기 그지 없었다. “보리방아 찧을 때면 시어미 생각난다”고 그때에야 비로소 십여년간 새까맣게 잊고있었던 그 국어사전을 들추어냈다. 쓸모없이 버려졌던 물건이 대뜸 진중한 보물로 승화하는 순간이였다.
이제부터 그 외래어 낱말의 뜻을 터득하면서 그 글을 읽어가는 감응은 무어라 형언할수 없을 지경이였다. “공구서적”의 중요성을 그때에야 비로소 절실하게 느끼게 되였던것이였다.
“사전”이란 휘황찬란한 광채를 산발하는 구슬이 가득 차넘치는 “옥합”이요 우리의 표준화한 언어를 집대성한 보물고이다. 거기에는 낱말과 토씨 등 우리 민족 언어의 원소들이 청청한 하늘의 총총한 잔별처럼 들어있음으로써 우리의 언어를 규범화하는데 유조하고 문학창작을 하는데 일체를 제공하고있다. 근근히 마흔개의 자모로 형성되는 우리의 언어가 그다지도 풍요롭고 다채로우며 현란한줄을 짜장 몰랐었다.
여직껏 책을 보면서 사전도 없이 어림짐작으로 보아넘겼을뿐인데 진정으로 지은이의 안광으로 읽고보니 문장의 뜻이 그렇게도 감미롭고 활연하게 안겨오는것이 세상 별일만 같았다. “아는것이 힘이다”고 했다. 배워야만 했다. 그 백사장의 모래알 같이 많고 많은 사전속의 낱말들을 내 머리속의 소프트웨어에 가장 빨리 인풋하는 첩경은 바로 독서였다. 독서는 가장 신나는 엔조이였고 또 나의 일체이기도 했었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문화가 광풍노도마냥 연변대지를 충격하고있는 그 와중에 나는 저도 모르게 문학이라는 이 미지의 세계에 점진적으로 젖어들고있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돌풍은 모질기도 하고 무자비하기도 했다. 한때는 내노라 으시대던 국영기업들이 된서리를 맞으며 도미노와도 같이 련쇄반응을 일으키며 무참히 파산을 당했고 와중에 내가 몸을 잠그고있던 기업도 도산의 변두리에 이르게 되였었다. 이제 이미 반백에 이르고 또 문학에 취향을 달리한터라 아무 미련도 없이 결연히 퇴직을 고하고야말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주내의 극빈촌의 극빈호들을 찾아 취재를 하며 농촌 각지를 편답하는 일이였다. 퇴직금이 전부의 경비였다.
문호개방을 하면서 중국은 크게 몸살을 겪고있었다. 특히 우리 조선족사회는 그 진통이 극한에 달하고있었다. 글소리 랑랑하던 농촌학교는 쑥대밭의 페허가 되여 무너져가고 있었으며 마을은 텅텅 비고 우리가 일군 문전옥답은 전부 남의 차지가 되여있었다. 농촌마을 그 어디서나 아이들은 학교문을 나서기 바쁘게 시내로,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심지어 초로의 아낙네들마저 보기 드문 실정이였다. 마을에는 단지 장가를 들지 못한 로총각들과 이래저래 버림을 받은 홀아비들만이 카인의 후예인양 한숨만 쉬며 술에 불리여 신세타령을 부르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있는 형편이였다.
“이렇게 펀히 앉아있다가는 굶어죽는다. 떠나야지. 떠나야 해. 이 고장에서 번신하는 날이면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이다.”
가난을 저주하여 향리를 떠나가는 사람마다 하는 푸념 같은 소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한국으로 간다,일본으로 간다, 로씨야, 싸이판으로 간다며 출국붐에 휘말려들었다. 단란하던 가정은 하루 아침사이에 해체되고 아이들은 버림을 받고 로인들은 의지가지할 곳이 없게 되였다. 참담한 현실이였다.
과연 제 고장에서는 잘살수가 없는걸가? 우리의 출로는 정녕 출국밖에는 없단 말인가?
아니였다. 그것만이 아니였다. 남이 내놓은 농토를 임대받아 다면적으로 농경을 하거나 시장경제에 핀트를 맞추어 공예작물을 재배하든지간 하여튼 본 지방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그 무엇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호로 탈바꿈하면서 갑부로 부상하는 실례도 허다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고향을 건설하며 “서쪽에서 해를 떠올리는 시대의 영웅”들도 우후죽순처럼 용솟음쳐나오고있었다. 그들은 남먼저 빈곤에서 해탈되였을뿐만아니라 촌민들을 이끌어 공동치부의 한길에서 박차를 가하고있었다.
그때쯤에도 연변 각지를 돌아보느라면 여봐라는듯이 땅을 차고 일떠서는 일매지게 아담한 문화주택 농촌마을들이 차창밖에서 줄느런히 흘러가고있는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국가에서 빈곤부축사업에 크게 살손을 대면서 농촌의 개혁개방사업도 희망의 서광을 맞이하고있는것이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면서 취재를 하는 한편 농촌의 개혁개방을 테마로 한 문학창작을 하면서 나는 내가 몸소 이문목견하고 피부로 감지한 연변농촌조선족사회의 현황을 핍진하게 그려내야만 할 사명감 같은것을 절박히 느끼기도 했었다.
문학창작이란 짜장 사활을 내건 고행이였다. 그 사활속에서 그 국어사전은 구세주와도 같았다. 그 에버러지작용이 컸다. 거대한 물체를 움직여주는 이 지레대의 작용이 없었더라면 마라손식 글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은 공구가 하지 사람이 하는것이 아니다. 사람은 본능적이면서도 사유적인 로동을 우선적으로, 육체적인 로동에서는 공구를 수요로 하기때문이다. 아무리 이름난 명공인 로반이라 할지라도 도끼, 톱, 대패 등 갖가지 공구가 없이는 고대광실이 아니라 오두막집도 지을수 없다. 한치의 베를 짜자 해도 베틀이 있어야 하고 고기를 잡자면 그물이 있어야만 한다. “애비 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는 못 산다”는 말도 있다. 소도 “생명을 가진 공구”라는 역설적인 속담이다. 문학창작에서 공구서적이 없이 글쓰기란 운운할 여지도 없는 일이다.
작가는 갖가지 문학쟝르중의 어느 한가지를 선택하여 그것을 테마라는 금실과 형식이라는 은실로 꼬아가면서 “옥합”속에 가득 들어찬 현란한 구슬들을 자기의 창작 설계에 가장 적중하는것으로 골라 꿰는 과정이다. 어떤 양식과 색상의 구슬을 고르는가는 바로 작가의 창작기교이며 어떻게 꿰는가는 또한 창작저력이다. 문학작품이라는 이 현란한 정신사치품은 이렇게 창작되여 독자들에게 읽혀짐으로써 또다시 정신식량으로 전환되는것이다.
그러고보면 그 사전은 하늘이 나에게 하사하신 “장중지보(掌中之寶)”임이 틀림없다. 하늘은 아마도 나에게 “가요반세기”란 흘러간 옛노래책이 아닌 “국어사전”을 하사하여 음악이 아닌 문학을 권장함으로써 후반생에 글농사를 하도록 점지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는 그 고마운 마음을 각근한 노력에 담아 수수한 들꽃이나마 그중에서도 청초하고 미려한 꽃 몇송이를 소담하게 피워보려는 열망으로 매일 글과 동무하면서 여생을 그나마 보람차게 보내고있는것은 아닐가. 그저 국어사전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은 손때가 묻고 보풀이 일어 초라해진 “옥합”이지만 그속에 담긴 오색령롱한 “진주”와 “구슬”만은 현란한 광채를 발산하며 영원할것이라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