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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 정희경

  • 2014-10-16 15:19:21

트렁크를 챙긴 나를 바래다주듯 집앞 버드나무들이 온몸을 흔들어댔다. 미련없이 한여름동안 곱게 키운 잎들을 털어버리고 가진것 없어도 겨울을 잘 보낼수 있다는듯 버드나무는 내가 가는 길우로 얇고도 어지럽게 진지하고도 솔직하게 가을에 타버린 잎들을 수놓았다. 바스락거리면서 부서지는 잎들의 소리를 들으며 내 발걸음의 무개를 알게 되였고 부서지는것은 결코 망가지는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였다.

덜컹덜컹— 나 대신 달려줄 기차는 맨발이여도 발이 시렵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지 않는데 신을 신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기차에 오르면서 춥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눈을 시큰하게 만드는 찬공기는 기차안 사람들의 온기를 만나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서리는 사랑하기 위해 굳어져있고 사랑하기때문에 녹아버린것은 아닐가.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같은 길을 걷는것처럼 서리발 선 창문에 데워진 공기에게도 제 길이 있다는듯 주르륵—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을 타고 흘러버린다. 괴일 곳도 없이 마구 흐르는 공기들은 끝끝내 창문틀을 적시고 간다.

나는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지, 어둠을 바라보는지 알수 없게 그냥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차겁게 흐르는 공기를 보게 되였고 그것을 따라 시선은 손에 고정되였다. 당신이라 부르고싶은 한 사람의 손이 새삼 머리속에 비꼈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스쳤던 손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손을 감싼 크고 따뜻한 손으로 되였고 또 어느 순간부터 두손 사이로 흐르는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나를 놓아버린 손으로 되였다. 사랑은 말도 없이 연두색으로 돋아났다가 숲을 이루겠다고 울창하게 그늘을 드리웠고 곱게 물들여진 어느 가을날 밤에 권태감으로 한잎한잎 애틋이 키운 정을 털어버렸다.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채 기차가 지나간 자리로 한줌 두줌의 락엽들이 흩날리는것을 보았다. 그 락엽들도 어느 한그루의 나무가 온몸으로 진저리를 쳐가면서 떨쳐버린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여운 처지에 놓인 락엽들이 안스러웠고 그것들을 태우고 이리저리로 길을 찾아다니는 바람과 함께 보냈던 로맨틱한 그날의 기억이 빛을 좇으며 다가왔다. 그날은 단추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이 심장을 찔러 나의 온몸을 움츠리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길을 걷다가 동네 놀이터 그네를 찾아 앉았고 그 곁에서 바람이 함께 그네를 타주었던 기억, 그리고 가방에 챙겨둔 시집을 꺼내들자 네루다의 시가 적힌 페지로 책장을 번져주는 바람의 숨소리가 유난히 가벼웠던 기억,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동안 책장에 무겁게 떨어지는 눈물을 바람이 말리고 갔던 기억, 삐걱삐걱 그네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밤, 문득 내 어깨우로 크고 따뜻한 손이 락엽처럼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이에 그 손은 누르지 말아야 할 버튼을 누르듯 나의 한쪽 어깨를 가볍고도 조심스럽게 짓눌렀다. 삐걱거리는 그네소리가 멈춰버렸고 나의 심장도 고장난듯 잠시 멈춰버렸다.

“미안해”

잠든 밤을 깨우는 울음석인 목소리.

나는 메인 목으로 흐느낌을 참으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더 엉망진창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나오지도 않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른쪽에 깊게 패인 보조개 하나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입꼬리가 내려가는 순간 목줄을 타고 곱게 흘러내렸다. 그동안 참고 묻지 않았던 말들을 눈물이 대신 말해주는 순간이였다. 이제라도 알겠으니 그만 울어라는듯 어깨우로 내려앉은 손이 얼음장 같은 내 손우로 따뜻하게 옮겨졌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그 생각이 말없이 전해지는 따뜻함에 녹아내려 다시 사랑을 키우고있었다.

리별의 끝에 늘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있었고 나는 사랑한다는 말도 없이 사랑을 시작할수 있었다. 수만번의 부딪침이 있어야 단단한 돌덩이도 모래알만큼 부드러워질텐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온몸을 떨어버린다. 갈등도 다툼도 모두 사랑의 또다른 모습이였는데 나는 그걸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파놓은 한뼘 깊이의 땅속에서 깊게 뻗지 못한 뿌리끝을 보게 되였고 온몸으로 한뼘 깊이를 묻으려고 락엽을 털어보내는 나무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그 나무에서 나는 위태로왔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듯해서 한뼘어치 쌓인 흙으로 시릴 나무의 발을 덮어주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가을만 되면 무정함을 선보이는 나무를 리해하게 되였다. 한여름동안 키운 정을 털어버릴수 있었던건 뿌리가 든든히 땅을 지키고있었기때문이였고 나무의 진정한 사랑은 잎이 아닌 뿌리에 있었기때문에 앙상함을 드러내는것이 더이상 부끄러운 일로 되지 않았던것은 아닐가?

창문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기억을 부르는 빛에서 조심스럽게 나를 데려왔다. 나는 피곤함을 달래려고 눈을 감았다. 어느새 깊은 밤은 조금씩 래일에 먹혀 새벽으로 되여있었다. 그 새벽에 내가 있었고 내안에 또 당신이 있었고 당신안에 우리의 길이 있어 그 어떤 길고 지루하고 피곤한 밤도 나는 포기할수 없었다. 맨발로 달리는 기차안에서 나는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자라나고있을 한그루의 나무가 온몸으로 진지하게 잎을 털어내는 모습을 보는것만 같아 네루다의 시를 속삭이며 읊어본다.

“내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두 삶을 갖고있다/ 그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 당신을 사랑하고/ 또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사랑하는 리유다.”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나의 얼음장 같은 손을 감싸줄 당신을 떠올리며 나는 행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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