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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산

□ 허두남

  • 2015-01-29 15:37:59

십년동안 인사불성이 되여 병석을 지키던 작은형님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이미 예약해놓은 길이였고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기다려온 날이였지만 마음은 갈가리 찢어진다. 내가 어려운 고비고비마다 기대여왔던 큰 산은 이제 영영 떠나갔다.

덕재가 모자란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것보다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진것이 훨씬 많다. 나에게 큰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만 해도 몇십명은 되는데 고마운 사람 0순위는 작은형님이다.

1977년 3월초, 작은형님은 해마다 민공판으로 떠돌던 나를 용화향 상화학교에 교원으로 넣어주었다. 작은형님이 그 학교의 교장을 만나서 나를 소개하여 교원으로 넣기로 했을 때 공교롭게 교장이 “제2선”에 물러나고 다른 교장이 부임되여왔다. 늘 운수와 담을 쌓았던 나의 일은 또 꽈배기처럼 탈리는듯했다. 다행히 새로 온 교장은 작은형님에게 호감을 갖고있는 고중후배였기에 작은형님이 나를 소개했다니 흔쾌히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학교에서는 골간교원 한분을 우리 마을에 보내여 나의 정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그 사람도 작은형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는 초중동창인지라 돌아가서 좋게 회보했다. 그때는 학교가 대대의 령도를 받을 때였기에 학교에서 교원을 쓰자면 대대의 비준이 있어야 했다. 대대 당지부서기는 작은형님이 문학창작반에 가서 직심으로 작품수개를 도와줬던 사람으로 “백골이 진토된들…” 하면서 작은형님에게 고마워한 사람이라 내가 가는 길에 푸른 등을 켜주었다. 나는 1년간 상화소학교에 있다가 이듬해부터 향중심중학교에 가서 조선어문교원을 맡았는데 현교원연수학교의 선생님도 아무개 동생이라고 나에게 색다른 관심을 베풀었다. (형님은 문화혁명때 투쟁 맞는 그 선생에 대해 남처럼 모질게 굴지 않고 전처럼 존경했던것이다.) 이렇듯 나는 곳곳에서 작은형님이 쌓은 덕을 입군 했다.

사람들은 작은형님을 법 없이도 살 착하고 본분을 지키는 사람, 어디 가나 제 앞의 일을 열심히 하는 부지런하고 사업형 사람이라고 생각할것이다. 내 마음속의 작은형님은 매우 강의하면서도 쎈치멘탈한 사람이다.

우리 형제는 책 한권을 쓰고는 한바탕 앓군 한다. 작은형님은 연변작가협회 1등상 수상작품인 상, 하편으로 된 아동장편소설 “엄마 찾는 아이”를 쓰고나서 몸이 몹시 좋지 않았었다. 그때 작은형님은 (오래잖구나…) 생각하고 써놓은 장편원고를 다그쳐 정리했을뿐 아니라 이미전에 발표했던 원고들을 책으로 묶으면서 더 바삐 돌아쳤다. 아마 다른 사람 같으면 귀찮아서 팽개쳤을것이다.

작은형님이 스무살쯤 되였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주낙을 놓다가 낚시가 발등에 박혀서 여려 사람이 붙잡고 빼낸적이 있다. 낚시에 살덩이가 뭉청 묻어나왔는데 그날 주낙을 돌각담속에 처넣어버린뒤 다신 고기잡이에 손대지 않았다.

작은형님은 66년도에 고중수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다가 1968년도에 고향에 돌아와 농사일을 하게 되였다. 문화혁명이 아니였더면 작은형님의 생활궤적은 완전히 달리 그어졌을것이다. 대학을 순탄하게 졸업했을것이고 농촌녀자를 안해로 맞아 그 사이에 겪은 숨 막히는 생활고도 없었을것이다. 물론 문학창작에서도 더 많은 성과를 냈을것이고… 지금 와서 이런 상상을 하는것은 형수님에게 죄스럽고 조카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지만 이건 사실이다.

형님이 고중을 졸업할 때 나도 초중을 졸업했는데 작은형님이 고향에 돌아와 함께 일을 하게 되니 좋아서 입이 귀밑에 걸릴 지경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작은형님의 속은 지옥 그 자체였을텐데… 작은형님이 고향에 갓 돌아와서 쓴 시가 있다. 앞부분은 지금도 내 머리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어제 학교를 졸업하고 전원에 돌아왔더니

깊은 밤 꿈속에서 가슴 저리여 일찍 깨였노라

첫사랑의 귀한 련인 꿈에 만났거니

노래도 말도 없이 그림같이 지났을뿐

형님보다 다섯살 손아래인 나였지만 작은형님이 누구를 두고 썼으리란것을 알수 있었다. 남평에서 함께 고중에 붙은 동창생, 아이들이 성모마리아 같다던 얼굴이 동그랗고 마음씨 착한 그 녀자였을것이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 녀자를 두고 말을 비치니 작은형님은 “그리 나이 많은걸…”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는것 같았으나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작은형님이 자신 없어 그런다고 단정했다. 작은형님은 책을 각별히 아껴서 동생들인 우리도 다치지 못했지만 그 녀동창생만은 례외였다. 주말에나 방학에 함께 와서 책장을 뒤지는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때의 나의 눈이 적중했다는것은 몇십년이 지난뒤에 밝혀졌다. 어느날, 형수님이 작은형님이 어느 녀자와 만나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말을 하기에 내가 “xx이지?”라고 물었더니 옳다고 했다. 우리 형제는 이런 면에서 숙맥이다.

형님이 없으니 우화시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곳이 더는 없다. 전엔 한마디라도 천금 같은 말을 들을수 있었는데…

나의 첫 우화시집을 보고 “이건 너무 산문화했구나.”

두번째 우화시집을 보곤 “문자는 더 여물었다. 그렇지만 책은 첫번째것보다 못하다.”

세번째 책을 보고는 “동요처럼 쓰려고 애썼구나.”

네번째를 보고는 “전개시키지 못하는구나.”

다섯번째 책부터는 보지 못했다. 인젠 영영 못 보게 되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직도 더 개혁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물어보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나? 암담하다. 하지만 나는 꼭 과정을 전개한 조선의 우화시와도 다르고 성인상대로 쓴 라퐁텐과 끄릴로브의것보다도 다른 나의 우화시를 만들것이다. 작고 깜찍한 도리를 담은 유모아동시로 만들련다. 이것은 작은형님앞에 다지는 맹세이다.

작은형님이 인생과 문학에서 내가 기대여온 산이였기에 작은형님에 대한 나의 숭배 또한 남달랐다. 소학시절과 초중 때 나는 작은형님이 비망록일기를 쓰니 따라 일기를 썼다. 작은형님이 명시들을 수첩에 베끼니 나도 10권 넘게 베꼈다. (지금도 보관하고있다.) 그리고 작은형님이 하는대로 어휘도 수첩에 베끼고 속담도 베끼고 격언, 명구도 작은형님이 적은것을 다 베껴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구절들이 많다. “첫 삼년 배울적엔 하늘땅을 쥐락펴락, 다시 삼년 배울적엔 한걸음이 어렵도다.” “청춘의 머리는 차야 하고 심장은 뜨거워야 하고 손은 부지런해야 한다.”

형님은 고중 다닐 때 3전씩 하는 국도 먹지 않고 식비를 절약해서는 그때 조선에서 정기적으로 출판했던 한책에 2,3원씩 하는 《세계문학》을 주문해서 사군 했다. 《쉑스피어희곡선》, 《돈키호테》, 《하이네시선》… 그때 산 책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책장을 지키고있다. 만약 나도 그때 기숙사생활을 했더라면 엄마오리뒤에 따라가는 아기오리처럼 작은형님을 본받아 국을 먹지 않고 책을 샀을것이다. 나는 엉덩방아 찧는 동작까지 흉내 낼 지경으로 꼭 작은형님의 그림자였다. 꼬부랑글씨도 천하옥필인줄 알고 애써 따라 익혔다. 어이없는 고심으로 나의 글씨는 작은형님것과 짝퉁처럼 닮아버렸다. 내가 작은형님을 따라 하지 않은 일은 딱 한가지이다. 5만개의 어휘를 장악하겠다고 다졌던 작은형님은 사전을 통으로 외우려는 욕심에 《조선어소사전》을 하루 한장씩 찢어내서는 외우고 구겨서 버리군 했는데 나는 찢을 책도 없거니와 또 책이 아까워 그것만은 따라하지 않았다.

큰형님이 사유가 빠르고 활달하고 달변이라면 작은형님은 속이 깊고 참을성 있고 겸손했다. 작은형님은 날 한번도 때린적 없다. 몇살 차이나는 형제사이 동생을 한번도 때리지 않은 형은 별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자란 촌에서는 그렇다. 아마 다른 애들은 형에게 여러번 맞아봤을것이다.

문학창작에서도 작은형님은 형제들중에 더 재능있었다.

열몇살 될 때 늘 아이들을 모아놓고 즉석동화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었는데 온 하루 이어대도 끝이 없었다. 아무 곳에 대만만큼 큰 짐승이 있다는 은식이형의 옛말보다는 차원이 달랐다. 밤에 작은형님이 지어내는 귀신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자꾸 안으로 들어앉으면서도 온몸이 귀가 되여 듣군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땐 옛말속 귀신이 뛰쳐나올것 같아 퇴비장과 변소를 흘끔흘끔 보면서 반달음을 놓는다. 《3형제작품집》을 만들면서 보니 작은형님은 아동소설보다 동화에 무척 재능이 있었다. 늘 호인이 되는것이 습관되여 소설에서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쓰지 않는 탓이다. 언어가 풍부하고 생동성과 재미를 문학작품의 생명으로 여기는 작은형님은 동화를 정말 눈에 띄게 잘 썼다. 나는 다시한번 그제날 아이들을 모아놓고 즉흥이야기를 꾸며대던 작은형님의 재능이 그대로 있었구나 느꼈다. “거짓말나라 국경선”, “담배대왕”, “칠동이의 변신술” 같은 동화를 몇편이라도 더 썼더라면 하는 생각에 아쉬웠다.

형님은 문학에서 쟝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뭐나 능란하게 썼다. 나는 문학에서 한 쟝르를 뚫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작은형님은 문학이란게 원체 편과인데 그안에서 또 편과를 하겠냐며 무엇이나 다 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작은형님의 주장에 끝까지 왼고개를 틀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적어도 연변이라는 이 특정된 지역에서는, 이 보잘것없이 작고 독자가 너무나도 적은 곳에서는 작은형님의 말대로 하는것이 옳다는것을 절감했다.

형님은 남달리 부지런한 사람이였다. 통신학부공부를 할 때도 남들은 서로 답안을 베끼며 응부했으나 작은형님은 못 봤던 책들을 볼 기회로 삼고 열심히 공부했다. 어디 가나 맡은 직업에 심혈을 몰붓는데다 생활고때문에 진이 많이 빠져서 나이에 비해 겉늙었던 작은형님은 퇴직하면 한번 시름 놓고 글을 쓰리라고 별렀건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직을 한달 앞두고 쓰러졌다. 작은형님에게 십년만 시간이 있었다면 정말 많은 글을 썼을것이다. 병석에 누워있은 십년만 가졌어도 좋은 글을 얼마나 썼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작은형님을 무르익은 열매를 주렁주렁 단 글나무로 보고있다. 하지만 나는 작은형님을 시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많이 허비하고 재능의 십분의 일도 꽃피우지 못하고만 아까운 천재라고 말하고싶다.

형님의 문학재질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던 동창생인 리태학은 작은형님에 대해 “발자끄와 어깨를 겨루겠다던 봉남이 졸아들고 졸아들고 해서 인젠 아무거나 쓰면 글인가 한다”고 통탄했다. 작은형님이 태학이의 말처럼 “아무거나” 쓴데는 작은형님으로서의 고초가 있었다 . 혼자서 다섯 식구를 먹여살리고 아이들 셋을 공부시키자니 적은 로임으로 너무도 벅찼던것이다. 원고료 한푼이라도 벌어서 생활비를 보태려는것이였음을 나는 잘 안다.

형님은 중풍을 맞기 한달전 내가 놀러갔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져있었다. 나더러 제발 가지 말고 하루라도 더 같이있자고 했다. 후에 생각하니 그때 이미 머리속에 이상이 생긴것 같다. 사람이 변하면 좋지 않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 말인가보다. 작은형님의 간청을 듣지 않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던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였다

형님이 병석에 오래 누워있으면서 나는 차츰 작은형님을 잊어갔다.

어느날 새벽, 꿈에 작은형님을 보고 깨여나서 작은형님이 언제 세상떴던가 아무리 궁리해도 생각이 안났다. 그러다가 내가 작은형님을 언녕 잊고있었구나 하고 개탄했다. 나는 기실 작은형님이 어서 죽기를 바란셈이다. 형수님이 작은형님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지만 난 차라리 작은형님이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다. 우리를 보면 숨차하고 손을 잡는걸 봐 좀 아는듯했다. “너 왔니?” 말도 못하고 자리가 배기니 돌려눕혀달란 말도 못하고 고통뿐이였을텐데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낫겠다고 생각했다. 리지로는 그러했으나 감정으론 아니다. 형수님에게서 전화가 오면 꿈틀 놀랐다.

작은형님은 지금쯤 다른 세상에서 큰형님을 만났을것이다. 너희 형제는 만나기만 하면 다투느냐며 어머니께서 혀를 차시던 때처럼 인사를 주고받기 바쁘게 문학쟁론에 열을 올리고있으리라. 오늘은 어떤 테마를 가지고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있을가? “하이퍼시”가 예술적깊이가 있는 참신한 신생사물인가, 얼토당토 않은 잠꼬대인가를 두고 티격태격할가? 아니면 최근 《연변문학》에 실린 어느 풋내기작가의 소설을 두고 옥신각신할가? 언젠가 나도 작은형님들곁으로 가면 막상막하로 열변하는 두 작은형님의 주장을 눈을 꺼벅거리면서 듣다가 나의 졸견을 내놓으며 한몫 끼여들리라. 이곳에서 늘 그랬던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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