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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기억 쪼각들

□ 김응준

  • 2015-08-04 15:53:08
70년이란 아득한 세월이 굽이쳐갔다. 한때는 점차 아리숭히 망각의 나락에 떨어져가던 기억쪼각들이 근년에 이르러 뼈 아프게 되살아난다. 일본군국주의 유령들이 죽지 않았고 일부 후손들이 공공연히 력사의 진실을 외곡하고 무치한 침략의 력사를 반성하지 않고 극구 새로운 군국주의를 실시함에 반하여 그전날 수난의 목격자이며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분격의 펜을 들지 않을수 없다.

피어린 추억의 노를 저어 요원한 1940년대로 가보자. 나의 고향은 훈춘시의 한 편벽한 마을인 태평구(지금의 해방촌)이다. 향소재지 밀강촌과는 십리 떨어진 한심한 두메산골. 이 백호 동네는 9.18사변 직후 왜놈들의 집단부락정책에 의해 원래 농막골, 상두막골, 노루자리, 하동촌 등지에 산재해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만든 집단부락이였다. 부락 네둘레에 높다란 토담을 올리쌓고 토담 네귀퉁이에는 죄꼬만 또치까를 쌓고 왜놈들이 마을자위단을 시켜 번갈아 보초를 세우며 공산당군대를 잡는다고 떠벌려댔다. 우리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대팔령기슭에 왜놈들의 병영이 둥지 틀고있었는데 놈들은 쩍하면 마을에 덮쳐들어 백성들의 닭, 오리, 돼지, 송아지 등을 채갔고 가을이면 탈곡장에 뛰여들어 방금 타작한 량식을 빼앗아가군 하였다.

산 좋고 물 맑은 동네였건만 가난뱅이마을로 원근에 소문났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네와 아버지네가 개척한 산전 몇마지기 있었건만 왜놈의 주구인 밀강촌의 태지주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사를 지어야 했고 소도 남의 윤두소를 맡아서 부리면서 근근득식으로 연명해나갔다. 어려서 우리네 또래들은 자주 “문둘째”네 집에 모여앉아서 강냉이를 틔워 먹고 감자를 구워 먹으면서 옛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옛적부터 시작하여 무송이 범을 잡던 이야기,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쏴 죽인 이야기, 멀지 않은 대흥구에 혁명근거지가 있고 왜놈들이 붙잡은 항일유격대원을 마대에 넣어 두만강 얼음강물에 처넣었다는 전대미문의 이야기… 그무렵 마을에는 훈춘중학교를 다니는 유식한 청년이 있었기에 많은 이야기는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것이였다.

내가 일곱살때에 겪은 일이 생생히 기억된다. 한번은 겨울철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 건너쪽 미산동(조선 함북 온성군의 죄꼬만 동네)에 사는 친척집 회갑잔치에 갔다 오던 길, 얼음강은 무사히 건넜지만 강가에 있는 밀강경찰서에 이르러 사달이 생겼다. 나의 어머니가 례단 받은 모본단저고리감을 나의 목수건안에 감아넣어 가지고왔는데 그만 발각되였다. 놈들은 그것을 다짜고짜 압수했을뿐아니라 몽둥이로 나의 아버지에게 물매를 안겼다. 코수염을 까칠하게 기른 왜놈경찰의 녕악한 꼬락서니, 너무 겁나서 소름이 오싹 끼치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마을 학교는 대덕소학교라고 불렸는데 4학년까지밖에 없는 초급소학교였다. 내가 아홉살에 입학하니 한 조선인 선생이 첫 과문을 “소, 소나무”, “나, 나무다리”라고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며 혁명이야기들을 들려주었건만 한해가 지나자 그 선생은 어데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일본선생이 와서 조선어는 취소해버리고 일본어만 가르쳐주었다. 기재에 따르면 왜놈들은 우리 동북땅에서 1937년 이후 문화침략으로 본격적인 노화교육을 실시했다고 하지만 너무도 벽지인 우리네 고향마을에선 퍽 뒤늦게야 실시된것으로 알고있다. 우리 담임선생은 히라끼(平木)라는 20대의 청년이였는데 그는 노화교육의 충실한 신도였다. 그는 우쭐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선양하면서 우리더러 매일 “아마데라스오미까미(천조대신)”에게 참배를 드리게 하고 첫마디가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라고 시작되는 국민훈(国民训)을 암송하도록 강요했다. 그 노화교육에 의해 우리네 성씨도 모두 일본식으로 고쳤는데 우리 경주김씨를 모두 “가네모도(金本)”로 고치게 했다. 학교에서는 조선말을 쓰지 못하고 일본어로 일상화를 하도록 강요했다. 만약 누가 조선말을 하게 되면 처벌로 나무패쪽을 안겨주는데 나중에 그 패쪽을 가진 학생이 변소청소나 교정청소를 해야 했다. 규률을 위반한 학생을 선생이 발각하면 교편으로 마구 후려갈기거나 학생들끼리 “다이고삔따(맞서서 서로 대방의 귀뺨치기)”를 하도록 강박했다. 너무나 천진하고 무지하던 우리는 갖가지 수모를 당하면서도 아직 반항은 모르고 머리 숙이고 공부만 했다.

1945년은 더더욱 잔혹한 수난의 해였다. 왜놈들은 대동아전쟁에서 이미 기울어진 운명을 만회해보려고 더욱 미쳐날뛰였다. 놈들은 강제병으로 아직 미성년인 나의 삼촌(김봉학)을 대팔령너머 사만자에 있는 징병훈련소로 끌어갔다. 원래 아무 병없이 튼튼하던 나의 삼촌이 약 반달후에 인사불성이 되여 나의 백부님의 달구지에 실려 집에 돌아왔다. 의사 한 사람, 약방 하나 없는 동네, 다른 마을로 약 한첩 사러 갈수 없는 극빈의 집안, 나의 삼촌은 이팔청춘의 아까운 생명을 왜놈들때문에 잃어버렸다. 퍽 후에 알아낸데 의하면 그 병은 콜레라라는 악성전염병이였다. 그때 항간에서는 몹쓸 “머저리병”이라고 불렀다. 뒤이어 나의 할머니가 그 병이 감염되여 며칠간 앓다가 방금 60세에 저승으로 갔다.

그해 6월초, 나는 달마다 바쳐야 하는 월사금 1원을 내지 못하여 바로 그 히라끼에게 쫓기워 집으로 돌아왔다. 한창 보리고개철인지라 초근목피를 우려먹는 신세에 어데 가 돈을 구하랴. 나의 아버진 속을 태우던 끝에 20여리 떨어져있는 농막골로 참나무버섯 따러 갔다. 구질구질 내리는 찬비를 무릅쓰고 이른아침에 떠나간 아버지는 땅거미 들어서야 버섯도 얼마 따지 못하고 온몸이 물참봉이 되여 집에 들어서자 쓰러졌다. 고열로 몸이 불덩어리 된 아버지는 련며칠 식사를 못하고 자꾸 랭수와 감주를 달라고 볶아댔다. 그리고 혼나간 사람처럼 제 집 방안에 누워있으면서도 자꾸 잠꼬대로 “이게 내 집이 아니야,내 집으로 가겠다”고 웨치는것이였다. 그 증상은 영낙없는 “머저리병”으로서 대단히 불길한 조짐이였다.

그때 이미 큰집에서 세간나있던 우리 집 사립문에도 툰장이 새끼줄을 쳐서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나는 이미 실학하고 집에 갇혀있으면서 어머니를 곁들어 병시중을 더러 했다. 나의 아버지는 이팔청춘에 두만강 량안을 넘나들며 씨름판에서 황소를 겨루던 힘장사로서 동네방네 소문이 높았건만 그 잔혹한 병마앞에서는 너무도 무기력하여 약 한첩 못 쓰고 안달복달 열흘을 앓고 딱 자기의 생신날인 5월 20일(음력)에 33세를 일기로 저주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우리 집에는 관널도 없었다. 나의 백부님 등 혈친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거적에다 두루 말아가지고 서산에 실어다 묻었다. 통행금지령이 내린 상황인지라 제사도 지낼수 없었다. 갓 30대에 미망인으로 된 나의 어머니는 철 모르는 우리 세 남매를 데리고 무정한 병마와 어두운 세월을 저주하며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뒤이어 태여난지 두달밖에 안되는 나의 작은 녀동생도 시름시름 앓다가 숨이 졌다. 통곡과 공포로 가득찬 집안은 막 터질상싶었다.

7월에 잡아들어 나도 그 무서운 콜레라에 걸려 쓰러졌다. 고열로 일주일간 볶은 뒤 병세는 차도가 있었다. 근데 통행금지 당한 애들과 같이 낚시 하러 갔던 나는 조심하지 않아 물에 빠지는통에 2차병(우린 그때 “재병”이라 불렀다)에 걸렸다. 어지간히 지난후에야 들은 말이지만 원래 2차병에 걸리면 영낙없이 100%가 죽는다고 했다. 나는 완연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7월 초순부터 약 한달 동안 나는 제정신 없이 사선에서 오락가락하였다. 8월초 쏘련홍군이 진공해들어오고 일본군이 패배해 도주하느라 하늘에 비행기가 란무하고 대팔령일대에서 총포소리 요란하게 울렸다지만 나는 전혀 무감각 상태였다. 마을사람들은 분분히 먼 산속으로 피난가고 온 동네는 거의 비다싶이 되였다. 어머니는 나의 아우와 녀동생을 친척에게 달아 피난 보내고 홀로 집에 남아서 나를 지켰다.

“다 죽은 애를 끌어안고있지 말고 어서 산을 갑세. 산 사람이야 살아야 하는 법이니…” 남들이 나의 어머니를 보고 호의로 권유했다.

어머니는 한 친척의 충고를 듣고 우리 집안 땅바닥에 판 김치움에다 나를 눕혀놓고 큰 함박을 덮어놓았다. 그리고 피난 가려고 집문턱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섰다. 상기 숨결이 실오리만큼이라도 붙어있는 애를 두고 차마 떠날수 없다는 량심의 호소였다. 그 생사판결의 란리판에 어머니는 자기 목숨을 바치더라도 이 아들을 살려내자는 그 거룩한 모성애로 모든 간난과 위험을 이겨냈던것이다.

내가 완전히 상실했던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한것이 바로 “8.15”, 일본이 투항한 그 이튿날이였다

“얘야, 너 다시 살아났구나! 저 비행기 소리 들리지? 마우재(쏘련홍군)들이 비행기랑 땅크랑 몰고 들어와 왜놈들을 쫓아냈다. 이게 바로 해방이란다…”

의식이 되돌아서는 첫 표징이 바로 멀었던 귀가 열려지는 그 감각이였다. 나는 그제야 어머니의 간곡한 위안의 목소리를 알아들었고 아우와 녀동생도 따라서 기뻐하는 웃음소리를 들을수 있었고 지붕우로 저공비행하는 비행기의 굉음도 들을수 있었다. 그후 점차 까까중이 되였던 나의 머리에 새 머리카락이 생겨났고 새하얀 백지로 변했던 기억력도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마련했던 열새베수의를 뜯어서 다시 적삼과 바지를 지어주었다. 항간에서는 자기 수의로 다시 옷을 지어입으면 장수한다는 말이 돌고있었다. 비록 미신의 말 같지만 바로 험악한 사경을 겪어낸 사람은 어지간한 고난도 겪어내수 있다는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고싶다.

나는 참말 칠성판에 올랐다가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났다 .그 재생의 희열 바다에 비기랴, 하늘에 비기랴. 나는 친구들과 같이 놀다가도 쏘련홍군을 보기만 하면 “우라(만세)! 우라!”를 높이 부르며 환호했다. 그무렵, 우리 어린이들은 쏘련홍군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우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해방의 종소리였다. 참말 해방이 좋았다. 극악무도한 왜놈의 철쇄에서 벗어난 우리 인민은 나라와 땅의 주인이 되고 우리 어린이들도 왜놈의 잔악한 식민지노화교육에서 벗어나 자기 말과 자기 글을 배우는 자유를 얻어 좋았다. 천지개벽의 해방에 더없이 감격한 고향의 인민들은 마을이름까지 “해방촌”이라고 개명했다.

해방직전에 살인마처럼 휘몰아치던 그 콜레라란 잔혹한 전염병때문에 우리 마을에서는 수십명이 무고히 목숨을 잃었고 나의 가정에서는 왜병 강제훈련소에 끌려가 병든 삼촌으로부터 나의 할머니, 아버지, 누이동생 넷이나 귀중한 생명을 상실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물론 이런 손실을 우리 겨레나 우리 나라가 치른 수백만인, 수천만인의 참중한 대가에 비한다면 창해일속에 불과하겠지만…

아무튼 이는 한번밖에 없는 생명의 상실, 무고한 피의 교훈이므로 그 천추의 한을 죽어서도 잊을수 없을것이다.

위대한 항일전쟁 및 반파쑈전쟁 승리 70돐 기념일이 바야흐로 다가오고있다. 우리가 그 치욕의 수난, 참중한 손실, 피어린 력사를 잊지 말고 이미 궐기한 승세에 따라 미쳐 날뛰는 군국주의의 야망에 맞서 더욱 분발한다면 나중에 가서 사악은 필패하고 정의는 필승할것이라고 굳게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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