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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양의 척도

□ 남명철

  • 2015-09-10 14:56:19

겸양이란 겸손, 겸허, 사양, 공경 등과 동의어로서 아는체 하거나 잘난체하는 티가 없이 남을 존중하고 양보하는것을 이른다. 누구나 어릴적부터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훈시의 하나가 아마 사람은 교오자만하지 말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항상 례의 밝아야 한다는것이였을것이다. 겸양은 성숙된 인간의 미덕이고 수양이며 어떠한 사회발전단계에서도 고양돼야 할 주선률의 하나인것만은 틀림없다.

겸양은 인간사회생활의 일종 경계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이 겸양의 자세가 부족한것은 물론 오히려 타인의 겸허한 처사를 우습게 보고 덤비다가 코를 깬 사례들을 종종 볼수 있다.

춘추시기 진나라의 진문공이 초나라 군대와 성고에서 접전했을 때 일찍 망명시절에 초나라 왕에게서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저 군사를 삼사나 후퇴시텼다. 일사란 오늘의 30리로서 군사대렬이 한번에 전진하는 거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초나라의 대장 성득신은 진문공의 저자세의 뜻을 오히려 두려움에 물러서는것이라고 얕보고 마구 덤벼들었다가 대패하여 자살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유래된 성구인 “삼사를 물리다” (退避三舍)라는 전고는 오늘날 사양하고 먼저 물러서는 례의적인 자세를 이르는 대명사가 되였다.

양보하고 물러서는데도 각자 나름의 리유가 있다. 전국시기 조나라에는 문신에 린상여가 유명하고 무신에는 렴파가 뛰여났다. 린상여는 강대한 진나라 왕앞에서도 지혜롭고 용기있게 화씨옥을 되돌려왔고 조나라왕을 모시고 민지에서 진나라왕과 회동했을 때에도 나라의 위엄을 지켜낸 공신이다. 렴파는 린상여가 혀끝이나 능란하게 놀려 자기와 동등한 반렬에 서는것이 몹시 내키지 않아서 언제든 린상여를 직접 만나면 톡톡히 망신 주리라 별렀다. 린상여는 이 말을 듣고 늘 렴파를 피해다녔는데 주위의 사람들과 부하들이 영문을 알수없어 불만을 표하자 린상여는 “강대한 진나라가 조나라를 넘보지 못하는것은 렴장군과 내가 있기때문인데 이제 렴장군과 충돌이 생기면 나라에 불리할가봐 그러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흔쾌한 남아였던 렴파는 자기의 소견이 좁았던것을 크게 뉘우치고는 웃통을 벗고 매를 때릴 때 형구로 쓰던 광대싸리대를 한짐 짊어지고 린상여를 찾아가서 사죄하였다. 여기에서 유래된 “매를 지고가서 용서를 빈다(负荆请罪)”라는 전고는 겸양의 리유와 그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지난세기70년대 초반에 돈화 모 농촌마을에서 발생한 진실한 이야기이다. 이 마을에는 언제 흘러들어왔는지 딱히 알수 없는 60여세의 왕씨라는 늙은 홀애비가 살고있었는데 종일 가야 묻지 않으면 말 한마디 없이 수걱수걱 시키는 일이나 하고 남녀로소 가릴것 없이 만나면 먼저 길을 비켜주는가 하면 막돼먹은 인간들이 시까스르고 놀려먹어도 개의치 않는지라 모두들 그를 멍청이 반편쯤으로 치부하고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어느 겨울날, 왕홀애비가 땔나무 한발구를 꽉 박아싣고 마을에 들어서는데 철없는 집체호의 몇몇 젊은이가 길을 막아나섰다. 당시에도 식수조림을 강조하고있어 잡목외에는 팔뚝보다 더 굵은 나무는 찍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촌민들이 땔나무를 할 때 좀씩 굵은 가지가 섞이는것은 보편현상이라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금방 문화대혁명초기의 무법천지 란리통을 겪으며 반란기질에 물든 철없는 집체호의 몇몇 젊은이들이 정책위반이랍시고 어눌해 보이는 왕홀애비의 땔나무를 몰수하여 가지려고 꼼수를 부렸다. 늙은 왕홀애비가 자기의 손자벌됨직한 젊은이들에게 아무리 사정하고 도리를 따져도 아예 들은척만척하였다. 나중에 젊은이들은 듣기 거북한 쌍욕과 발길질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 평소 온화하기만 하던 왕홀애비가 “이런 막돼먹은 놈들이구나.”라고 소리치면서 화다닥 손발을 날리는가 싶더니 둘러싸고 방자하게 원숭이 놀리듯 하던 여섯명의 젊은이가 거의 동시에 눈바닥에 나뒹굴었다. 하향지식청년들이 구타당했다니 정치적문제인지라 공사혁명위원회책임자와 현지식청년관리판공실에서 득달같이 달려와 정황을 조사하고는 왕홀애비를 끌고가서 심문한 결과 누구도 몰랐던 내막이 드디여 수면우에 떠올랐다. 워낙 왕씨는 해방전 북평의 유명한 무술대사의 두번째 제자였다. 십여년의 간고한 수련을 거쳐 여라문명 되는 제자들이 재간을 거의다 익혔을 무렵 스승이 마지막으로 한가지 묘기를 가르쳐주었다. 즉 흉폭한 상대를 만나 생명이 위급한 순간에 대방을 단 한방으로 작살낼수 있는 묘기였는데 평소에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오금을 박았다. 그런데 수제자가 스승이 없으면 자신이 북경일대의 무술 일인자가 되리라는 욕심에 리성을 잃고 스승에게 한방 강타를 안기는데 절대절명의 순간에 로련한 스승에게 방어의 비책이 있을줄이야. 천둥같이 노한 스승은 그 수제자의 두다리를 박살내서 쫓아버리고 나머지 제자들도 해산시켜버리면서 누구도 금후 자기의 제자라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 말것이며 조용히 지내라는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홀몸이였던 왕씨는 스승의 훈시를 명기하고 그후 이리저리 떠돌며 살다가 해방이 될즈음에 돈화의 오지에까지 흘러들어 왔던것이다. 사실이 밝혀지고 집체호 젊은이들도 별로 상한 곳이 없었으므로 이 사건은 왕홀애비를 며칠간 구류하는것으로 흐지부지하고말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같은 사물에 대한 시각도 예전과 많은 변화가 생긴터에 겸양의 척도 역시 다시 조명해 보는것이 십분 필요한듯싶다.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자기 일에 맞다드는 자세는 용기이고 책임이다. 하지만 안하무인, 자고자대, 오만방종 같이 일정한 척도를 벗어나면 질적인 변화를 가져와 자기가 맡은 배역안에서의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더구나 상대방의 겸허한 태도와 사양하는 처사를 만만하게 보고 과도한 욕심에 어거지를 부리는 사람은 필연코 크게 되돌려 받게 되여있다.

겸손은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신중함을 말하지만 결코 비굴함과 연약무능과는 완연히 다른 개념이다. 일전에 한국에서 장모라는 교수가 수하의 일군을 때리고 욕하기를 밥먹듯이 할뿐더러 인간의 배설물까지 먹게 강박한 사건이 보도되였다. 물론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만도 못한짓을 저지른 변태적 모습이 가증스럽지만 문명사회에서 그러한 학대를 목석처럼 당했다는 노예적인 사고방식 또한 리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겸손은 단지 인간관계의 준칙을 말할뿐만 아니라 자연생태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까지도 포함하고있다. 공업사회의 략탈성적인 생산활동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표수의 70% 지하수의 40%이상을 오염시켰고 생태수위는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인류는 자연을 존중하지 않는 대가를 톡톡히 되돌려 받고있다.

교만과 방종이 란무하는 곳에서 한점의 겸양이 밤하늘의 새별처럼 빛을 내고 희망을 잉태한다면 겸양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서의 일점 교만과 방종은 옥의 티처럼 더욱 또렷해지게 된다. 흔히 양보하고 한발 물러서는 겸손한 사람이 결코 지적수준이 낮거나 계산이 밝지 못해서가 아니라 한발 물러서 넓은 시야로 하늘의 높음과 대지의 광할함을 감지하기때문이다.

겸양은 일종 수양이고 삶의 지혜이며 인간의 기본도덕이기도 하다. 세상의 변화가 전광화석 같고 하나로 되여가는 지구촌에서 인간의 생활양식이 갈수록 풍부해지더라도 례의, 도덕 배려 겸양 사랑과 같은 문명의식은 결코 생활의 자연일상에서 배제할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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