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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환상의 메아리

□ 홍천룡

  • 2015-09-17 14:50:29
요즘 꿈얘기가 많아지고있다. 젊은이들은 창업에 대한 꿈을 토로하고 어르신들께서는 장수꿈을 연구하시고 녀인들은 미인꿈에 귀여움을 떨구요, 사나이들은 “평화”의 꿈을 꾸고들있다.

꿈이란 현실이 아닌 현실을 동반한 환상이다. 환상이기에 현실과의 거리가 멀고 좀 아득하게 보이거나 아슴푸레하게 보인다. 꿈이 묘한것은 그 아득한 거리감과 아슴푸레한 시각감을 조절할수 있는 공간을 이루어주기때문이다. 이런 공간적인 플랫폼조절에 의해 꿈과 현실의 류사성법칙이 작용하여 그 어떤 정신력을 격발시키기도 한다. 례컨대 “엊저녁 꿈에 꽃을 보았더니 오늘 그 녀자를 만난거야!”라는 식으로 꽃과 녀자는 “곱다.”는 류사성으로 꿈과 현실의 거리감을 줄여줌과 동시에 그 어떤 가능성과 희망으로 신경세포를 자극해주는것이다. 그외에도 동시성, 의인성 등 여러 가지 법칙에 의해 꿈과 현실이 서로 짓이겨지고 반죽되면서 꿈속에 현실이 있고 현실속에 꿈이 있게 될 때가 많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다 비현실적인 환상을 부여시키고 신앙할 때가 있게 된다. 그러한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현란해보인다. 헌데 꿈을 깨고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너무나도 검고 먼지처럼 부옇게만 보인다. 그야말로 천지현격이여서 비교가 안되는것이다. 비교가 안되니 꿈은 꿈대로 꾸고 현실은 현실대로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현실이 비참하면 꿈을 좀 작작 꾸고 좀 자그마치 보따리꿈이나 꾸어야 될수록 그 격차를 줄일수도 있을텐데 많은 사람들의 많은 경우에는 이와 정반대로 되는 현상이다.

한 시골 마을의 밤이다. 푸대죽에다 삶은 감자 두알을 먹은것이 배에 차지 않아 소년은 초저녁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낮에 소여물을 써느라 채 하지 못한 숙제도 있지만 전기가 없는 골안이라 등잔불을 켜야 하겠지만 아버지가 성냥개비와 기름을 랑비한다고 급한 일에도 엽초 한대 태울 시간내에만 켜게 했다. 시골의 밤은 여름에도 그렇게 길어질수 밖에 없었다. 숙제를 할수 없었기에, 책을 볼수가 없었기에 소년은 늘 뒤뜨락 오얏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하늘의 별과 달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융단을 펴놓은듯한 밤장막에 깊게도 박히고 얕게도 박혀서 수없이 총총 반짝이는 별들을 다 헤여보려고 여러번 시도해보았지만 번마다 헛수고에 불과했다. 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달, 달은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허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는 초저녁이면 당금 팔을 쑥 내밀면 차디차게 만져질것만 같기도 했다. 헤아릴수 없는 별들, 만져질것만 같은 달, 그 별과 달이 소년을 환상의 꿈나라로 끌고 들어가군 했었다. 꿈나라로 들어갈 때마다 너무나도 눈부시고 찬란한 장면들이 펼쳐지군 했었다. 그래서 “야—” 하고 감탄이 나갔고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였다. 그 감탄육성과 비음에 젖은 흥얼거림이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가면서 천고의 고요함을 깨뜨리며 멀리멀리로 퍼져나가는듯, 사라지는듯 하더니 웬걸, 다시 공간을 타고 되울림으로 은은하게 들려오군 했다. 밤안개에 젖었는지 새벽이슬에 젖었는지 그 울림은 늘 음울한 저음으로 변해있었다…

그 울림, 그 메아리의 울림이 음울하고 슬펐기에 소년의 허파를 촉촉이 적셔주며 주린 창자를 달래주었고 기나긴 시골의 밤과 더불어 기나긴 환상의 터널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하였다. 환상의 꿈속에서 작곡되고 편곡되여 울리는 메아리는 자연의 바람소리와도 달랐고 동물들의 울음소리와도 달랐다. 왜서 달랐을가? 소년은 해석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달랐을가? 소년은 설명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만 환상속에서 느껴보는 감각뿐이였다.

소년은 음악에 대해 몰랐고 노래소리도 별반 들어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예술의 감화를 받으며 심신을 도야시키지 못하고 자랐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들을수 있는 리듬적인 곡조래야 동구밖 개울가와 논밭으로부터 울려오는 개구리들의 대합창이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자갈사태가 쏟아지듯 요란했고 방문을 꾹 닫으면 자장가인양 요요하게 귀가를 간지럽혔다. 그러다가 유선방송이 집집의 처마밑에 가설되면서 “사회주의 좋다”라는 노래소리가 대합창으로 들려왔을 때 소년은 얼마나 격동되였는지 모른다. 그처럼 명랑하고 박력 있는 선률에 전신을 부르르 떨기도 했었다. 그해 보리고개를 넘으면서 마을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두 아기가 영양보충도 하지 못한채 류행성질병에 걸려 죽고말았다…

소년은 크면서 문학명작도 적지 않게 독파했고 노래도 많이 배웠고 세계명곡도 가끔 들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법칙이 아닌 법칙적인 정감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져들고있음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돌아설수도 없게 되였었다. 문학도 비극적인 작품에 빨려들고 노래도 슬픈 선률에 빠져들군 했다.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작품들, 가슴을 차분히 적셔주는 선률들, 눈물속에서 울부짖는 주인공들의 비명이 가슴속에서 울렸다가 다시 메아리로 울리며 뇌리를 칠 때면 전신이 찢겨나가는 처절함을 느껴보고 끊어질듯 마는듯, 스치는듯 마는듯, 아리고 쓰려나는 바스음에 목구멍이 말라들 때면 애절함에 가슴을 푹 잠궈놓고싶어진다. 가난에 쪼들릴수록 욕망은 더 커지고 운명이 비참해질수록 희망이 더 커지고 모든것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꿈은 더 커진다.

일반적으로 서양음악을 감상하다가 보면 늘 심정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바로크음악의 최고봉을 이룬다는 바흐의 고전기악곡을 들어보면 역시 음울한 기분에 빠져들고 차이콥스키의 “비창”이나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을 들어보면 역시 비장한 심정을 금할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세계명곡도 음악적선률로 인간의 가장 비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비애에 잠긴 현실속에서 현실의 비분으로 씻기는 미래의 환상세계를 상상해볼수 있게끔 했다.

폭풍전야의 해변가, 천년바위를 들부시며 포효하는 물보라, 트럼펫고음이 빼주는 번개불뢰성에 반주되는 관악대의 일사분란한 기세, 다뉴브강의 굼실거리는 물결소리, 폴란드대초원에서 구름떼처럼 하얗게 흐르는 양떼무리, 바이올린고음이 요요하게 뽑아내는 비단자락 찢겨 날리며 반주되는 현악대의 도고한 자세, 시베리아의 기나긴 봇나무숲을 끝없이 지나가는 군인들대오… 음악의 흐름을 따라 고저장단강약의 리듬의 률동속에서 련상되는 장면들이다. 몇백년, 몇천년 찬란하게 꽃피워온 문화의 꽃봉오리속에서 왜서들 전쟁을 벌려 포연이 자옥한 비참세계를 만들어내는것일가? 그 비참세계도 역시 음악속에서 막을 올렸다가 음악속에서 막을 내렸었다. 막을 내린 다음부터는 그것이 되울림으로 되여 시대라는 벽에 부딪치면서 변성되여 왔다.

소리, 윈시적인 소리는 야만의 울부짖음이였고 정리된 소리는 문명의 부름이였다. 야만의 울부짖음은 대부분 강자의 소유였고 문명의 부름소리는 대부분 약자의 호소였다. 약자의 호소였기에 언제나 비에 젖어 애절함을 토로했다. 그 애절함이 선량한 마음들을 적셔주면서 공명을 일으키고 그 심장마다에서 굽이치던 공명이 다시 메아리로 울려 더욱 부드럽고 온화한 공간을 이루어주게 되는것이다. 그 공간속에서 또한 원래의 그 실감나던 원성을 다시 들어볼수가 있고 고운 원래의 형태를 다시 볼수가 있어서 감동을 금할수 없게 한다.

오늘 이 밤에도 총총한 별무리들 사이로 밤이슬에 푹 젖어 가늘어진 그 어떤 메아리가 끊어졌다가는 이어지면서 아득하게 들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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