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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명

□ 김정권

  • 2015-09-24 08:55:58
지난 7월초, 백초구중학교 75년급 동창회에 앞서 나는 우리 동창들동아리(微信)에다 녀자들의 별명을 씨앗으로 붙여 그 형체와 성격에 걸맞게 달아 올렸다.

복순-아몬드, 순자-호박씨, 옥춘-오이씨, 예란-군밤, 경숙-은행, 진숙-잣씨, 춘금-돼지감자 등등…

모두들 재미있다고 하면서 남자들의 별명은 왜 없는가 하기에 나는 그 즉시로 남자들의 별명을 달았다. 웃자는게 목적인만큼 남자들의 성기에 비유해 이름의 첫 글자를 붙여 달았다.

언식-언감자빛 소시지, 흥식-흥분하는 소시지, 종률-종을 치는 소시지, 향춘-향기로운 소시지, 성우-성스러운 소시지, 용길-용맹스런 소시지 등등...

그리고 나에게는 누구든지 마음대로 별명을 달아보라 했더니 모두들 우스워 죽겠다면서 나의 별명도 잇따라 뜨는것이였다.

정권-정이 많은 소시지, 정권-정말 맛있는 소시지, 정권-정신 나간 소시지,

나는 세번째 별명, 즉 “정신 나간 소시지”에 눈길이 딱 멎었다. 다음 순간 그 별명이 참 나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끔 제정신이 아닌 때가 있는 줄을 잘 안다. 특히 술을 좋아하다보니 폭음을 하면 꼭 사고를 치고 집으로 들어온다. 며칠전에도 문학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오다가 인행도 길바닥에 넘어져 면상이 장마당이 됐다. 마누라와 딸애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청승을 떨었지만 나는 얼굴 보이기가 창피하여 급급히 침실로 들어가 잠적해버렸다.

이튿날 나에게는 곧장 별명이 붙었다. “김더대!”였다. 하긴 벌써 세번째로 얼굴을 벗겼으니 그런 별명이 붙을만도 하였다. 전날에는 몰랐지만 이튼날엔 팔다리가 다 쑤셔나길래 보니깐 발끝이고 무르팍이고 손등이고 팔꿈치고 죄다 찢겨져 딱지가 거멓게 앉아있었다. 마누라는 또 바가지를 긁으며 “발끝이구 손끝이구 다 벗긴게 그 끝(?)은 왜 안 벗겼는가.” 하기에 나는 “그것만은 조물주가 제일 안전한 곳에 딱 배치해놓았기때문에 절대 무사하오. 그렇채쿠 그게 만약 이마에나 볼, 턱에 붙었더라면 코밑은 안 상할수 있었는데.”라고 했더니 마누라가 그 큰 입을 다 벌리고 웃는 통에 나도 덩달아 같이 웃었더니 코밑에 말라붙은 딱지가 갈라지면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치니 마누라는 더구나 집안이 떠나가라고 마음대로 소리치며 웃어 잦히는것이었다. 그러면서 “저번에는 면상에 도라지꽃이 피였더니 오늘은 마른 코밑에 장백산폭포가 생겨나고 눈덩이에는 코스모스가 붙었구먼. 다음에는 아마 장미꽃이 피겠지?” 하며 놀려대도 나는 고양이 락태상이 되여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한것은 그전의 별명이 “더대나그네”였으니 이번에는 글자수를 줄여 제법 성을 붙여 세 글자로 부르니 그야말로 “민족풍격”이 농후하다고 봐야겠다.

“유취만년”이라고 그처럼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보니 마누라의 입에서 옛날 별명이 아니 나올수 없다. 내가 마누라하고 살면서 제일 처음 가진 별명이 “36원”이였다. 그 별명의 유래를 말하자면 세월을 거슬러 20년전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날은 외지에서 온 동창생 둘과 술을 마시게 되였는데 온 저녁 술을 퍼마시고 마지막에 양꼬치구이집에 갔는데 동창생들은 내가 술을 정신없이 퍼 마시니 자기네는 더 못 마시겠다며 집에서 나왔다. 내가 결산을 하자고 보니깐 주머니에 돈이 텅텅 비여있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나는 “아불싸!”했으나 이미 늦었다. 때는 휴대폰도 없을 때여서 먼저 나간 동창들을 부를수도 없었다. 나는 할수 없어서 나의 단위를 알려주면서 래일 돈을 가지고 와서 물면 안되겠느냐고 사정했지만 한족주인은 에누리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생면부지인 손님에게 외상으로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창피스러운대로 집 전화를 알려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주인은 다짜고짜 전화를 하면서 당장 와서 돈을 물라고 불호령을 내리는것이였다. 얼마 안 있어 마누라가 택시를 타고 와서 돈을 물어주는데 그저 말없이 돈만 받아 챙기면 되련만 굳이 마누라에게 나를 가리키며 “저런 사람하고 다 사느냐?” 해도 나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이튿날부터 마누라에게 “체조”를 당한건 물론, 고스란히 “36원짜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별명의 유래를 후날 딸에게도, 나의 동생들앞에서도 “저네 형님은 눅거리오. 내 36원에 한족사람에게서 사왔소.” 하여 집안에서 크게 웃음이 터진 일도 있었다.

보다 더 위태로웠던 일은 그 별명을 가진 3년후의 어느날이였다. 그날 술은 어떻게 마셨는지도 별로 기억이 안 나고 어쨌든 친구들 같이 술을 마시고 택시에 앉아 집으로 온다는게 그만 제집을 잘못 알려줬는지 후에 알고보니 내가 쓰러져 누운 곳이 내가 사는 집에서 백메터 거리나 되나마나한 뒤골목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길옆에 쓰러져있는데 길 가던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 앉히고 집전화를 알려달라 하는데 좀처럼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긴 수자 기억이라면 소학교 산수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둔재여서 그런지 수자라면 보기도 싫어하는 나였다. 그렇게 한참을 찬바람을 맞으며 조금은 정신이 들어서야 겨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더니 역시 고마운 한족분이 공공전화로 나의 집에 전화해서 마누라를 불러냈던것이다. 그때 별명이 또 하나 붙었는데 바로 “로숙자”였다. 그리고 가정에서 사상 처음으로 황패경고를 받는데 이르렀다. 그 일이 있어 십여년을 용케도 무사고로 넘겨왔더니 마누라 말처럼 이제 정신이 좀 드나했는데 지난해에도 그와 상사한 일이 또 발생했던것이다. 그날 저녁도 마지막으로 동창 몇이서 술을 마시였는데 정신없이 퍼 먹고 딴엔 택시에 앉아 오다 택시 값을 치러주면서 동창생을 실어다주라고 부탁하고 내릴 때까지만도 온전했는데 웬걸 한 50메터쯤 걸으니 갑자기 아래다리가 국부마취한것처럼 맥이 없어서 그만 물앉고 말았는데 도무지 일어설수가 없었다. 흐리멍덩한속에서도 집과의 거리는 불과 200메터가 되나마나 하다는 감각은 있었기에 좀 앉았다 가려고 하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것이였다. 그제야 또 무슨 일을 칠것 같아서 휴대폰을 꺼내 집에다 전화를 했는데 번호를 잘못 눌러 도저히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번 역사질을 해봤지만 그 상이 장상이였다. 그러다 겨우 마누라 전화번호를 누르자니 더구나 생각이 깜깜하였다. 딸아이의 전화번호도 매 마찬가지였다. 식구들 번호를 저축해놨기에 애초에 암기도 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지금도 식구들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다시 련락처를 이리 뒤지고 저리 뒤지다가 겨우 딸아이의 전화번호를 누를수 있었다. 드디여 통화가 되였다. 그때 나의 기쁨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이였다. 나는 똥 낀 놈이 성 낸다고 다짜고짜 “내가 길에 앉아 일어나지 못하니 당장 니 에미를 보내라!”고 호통을 치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였다. 마누라가 달려와서 “이 나그네 정신 있슴까? 이번에는 또 어디를 벗겼슴까?”라고 하니 그래도 이번에는 큰일이나 한것처럼 “오늘은 안 벗겼소. 아직 정신이 좀 있길래 미리 방지하느라구 저를 불렀소.”라고 했더니 마누라는 “아이 벗긴게 큰 자랑임다!” 하는것이였다. 나는 마누라에게 부축 받아 오면서 하도 늦은 밤이여서 길가에 사람들이 없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이튿날에 또 다른 별명이 붙었는데 이번에는 “김싸처(제동)”였다. “싸처”가 자꾸 풀린다고 그렇게 지었나보다. 그깟 별명 같은건 너무 많아 이젠 류행가처럼 들린다만 경고를 안 받고 그저 “반칙”으로 처리하니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술에 취하면 하루가 행복하고 사람에 취하면 평생 행복하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아마 술에 먼저 사람에 취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은 나는 집에서나 가문에서는 별로 술을 안 마신다. 술버릇 잘못 잡은 동생 하나가 있어 형제간에도 술상에 마주 않지 않았고 가끔은 집에서도 반반한 안주감이 생겨야 맥주 한병 정도 마시는게 고작이다. 그런데 일단 밖에 나가기만 하면 술이 맛이 있는게 별일이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으면 취토록 마시고싶어진다. 물론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먹으면 더욱 마시고싶고, 그렇게 쭉 마시다보면 세상이 녹두알만해서 입과 손과 목소리를 다 동원해서 집안이 떠나가게 요란을 떨어댄다. 그처럼 술만 잘 됐다하면 과격한 나를 누가 좋아하련만 그래도 받아주고 리해해주는 친구들이기에 술에 감정을 더 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일찍 술상에서의 원칙을 세웠는데 술 마시고 절대 누구하고 걸고들지 않기다. 하지만 취한 놈이 알게 뭔가? (나발 같은 소리! 퍽이나 그렇기도 하겠다.)

이제 좀 자제를 해야겠다. 술이 취하면 실수는 애기 엄마 기저귀나 다름없으니 우리 마누라 말처럼 나이 60을 먹고도 코밑을 벗기고 다니면 부끄럽지도 않겠는가? 하는 훈계 아닌 훈계를 명심해야 할것 같다. 그리고 상처가 빨리 아물라고 매일 알로에를 다듬어주는 마누라와 눈덩이와 코밑을 벗기고도 살겠노라고 밥상에 마주 앉은 내가 꼴불견이고 퍽도 꺼림직하련만 그래도 한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어주는 가족에 고마워지는 나를 새삼 다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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