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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지문

□ 리태근

  • 2015-10-15 15:02:33
나는 식지손가락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생전에 빚문서에다 숱한 지문을 남기시였다. 생산대에서 년말총화를 할 때마다 화로불을 안고서 독한 담배를 피우며 한숨 쉬는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측은하던지… 아버지는 회의를 하고 돌아오면 식지손가락에 뭐가 묻었는지 춤을 퉤퉤 받으며 끝없이 문질렀다. 그럴때면 어머니는 새해는 돼지치기를 해서 묵은빚을 몽땅 청산하자고 아버지를 위안했다. 그런데 해마다 돼지를 내 새끼처럼 애지중지 키웠건만 정성이 모자랐는가? 분배돈은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다. 빚진 놈이라고 술을 먹지 말라는 법은 없단다. 아버지는 외상술에 기껏 취해서 당장 목재판으로 간다고 야단이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란다. 그까짓거 산판만 잘 만나면 당해에 청산한다고 큰소리 빵빵 쳤다.

아버지는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기전에 이불짐을 메고 목재판으로 갔다. 목재판이란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웬일인지 누구든지 한반만 갔다 오면 사람도 소도 겨릅대처럼 여위는게 이상했다. 그래서 후레자식이 아니면 목재판에 보내지 말라고 했던가. 목재판에 갔다온 소는 그래도 두병(콩깨묵)을 먹이며 춰세웠건만 겨릅대처럼 말라버린 아버지는 드러누워도 보조량 한냥 없었다. 소는 죽여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도 반반한 비석 하나 남기지 못하는 게 땅 파는 농민의 팔자란다

빚진 놈은 겨 묻은 똥싼 개처럼 간곳마다 손가락질 받았다. 설날에 이삭주이를 해서 떡을 쳐도 새벽에 창문에 헌이불을 걸고 가만히 쳐야 했다. 어쩌다 싸리부업해서 새 옷이 차려져도 숨겨두고 입어야 했다. 생산대에서 소고기추렴이 있을 때면 남들이 고르고 나머지 뼈다귀만 차례져도 찍소리 한마디 못했다. 누룽지에 어쩌다 새하얀 밥알이 묻어나도 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어쩌다 새 왕바신(솜신)이 생기면 감춰두고 신었다. 빚때문에 자식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인들 오죽했으랴. 그래서 해마다 목재판을 두고 야무진 꿈을 꿨는지 모른다. 목재판에 자원하는 다른 원인은 선불금을 내다 쓰는 멋이 아닐가? 그런데 선불금을 타는 날이면 반창고를 가락지처럼 바른 식지손가락을 쳐들고 어색하게 너털웃음을 웃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해마다 손꼽아 기다리던 생산대총결때면 우리 집은 불을 끈 숯가마처럼 숨이 콱콱 막힌다. 설마 올해는 좀 낫겠지? 설마 설마 기다렸건만 분배돈은 둘째치고 영문 모를 빚문서에 숱한 지장만 찍어댔다. 남들은 분배돈을 탔다고 기뻐 야단인데 우리 집은 초상집이였다. 또다시 외상술로 화풀이하던 아버지가 버릇처럼 식지손가락을 구멍 난 무릎에 정신없이 문지르다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손을 감추는게 아닌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주먹을 펴보니 식지손가락이 없어졌다. 아니 손가락이 왜 없습니까? 목재판에서 집재를 하다가 잘리웠단다. 당장 하늘땅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아버지가 빚문서에다 끊어진 손가락으로 지장을 찍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가?

늦가을 첫눈이 내리는데 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아버지가 어쩌다 웃는 모습을 보았다. 알고보니 생산대에서 우리 집 집터를 비준했단다. 옛날 소외양간바닥에 온돌을 놓아서 봄이면 부엌에 물이 차고 여름이면 비가 새는 땅굴집을 당장 개변한단다. 해마다 집터를 신청했지만 고슴도치 오이 따 지듯 빚이 많다고 비준하지 않았었다. 내가 농촌에 돌아오자 로력이 불어났다고 비준했을가. 봄이면 간장물이 질질 흐르고 여름이면 구데기가 그네 뛰는 땅굴집을 당장 허무는 기분이다.

이듬해 나는 생산대의 대장으로 당선되였다. 화는 쌍으로 오고 복은 쌍으로 오지 않는다고 집터를 떼놓고 집재료를 준비하느라고 바삐 헤매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내기철을 못 넘기고 사망하였다. 내가 생산대 호주로 되니 차마 내 집 타령을 할수 없었다. 야무진 새집 꿈은 이렇게 무산되고말았다. 아버지가 도왔는가? 하느님이 도왔는가? 아버지가 사망되던 그 이듬해에 대풍이 들었다. 일년총결때 사원들이 생전 처음 분배돈을 타고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생전에 수없이 찍아놓은 지문이 나를 도왔는가 나는 사원들의 추천을 받아서 공농병대학으로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자 내 인격을 과시하는 인감(법인도장)이 생겼다. 이런저런 업체를 꾸리면서 나에게 도장을 찍을 기회가 많아졌다. 해내외 기업들과 경제계약을 체결하고 인감을 찍을 때마다 아버지가 끊어진 손가락이 또렷이 안겨온다. 직원들이 사장님인데 옥이 아니면 금으로 “사장님인감”을 새기자고 우기지만 나는 오늘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식지손가락으로 지문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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