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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속에 묻힌 행복을 소환하다

□ 렴청화

  • 2015-11-12 15:05:22
가을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훌쩍 지나갔다. 올해 겨울은 그냥 무탈하기만을 바란다는 친구의 넉두리에 100% 공감하면서도 언제부터 삶에 대한 우리의 요구기준이 무탈함에 멈췄는지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동네오빠의 딱지치기에 슬쩍 끼여들었다가 면목없이 쫓겨나고, 무거운 책가방에 질질 끌려다니던 땅꼬마시절에는 엄마의 뾰족구두가 내 발에 착 들어맞는 그 날이 행복의 시작일거라 여겼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덩치와 나이를 기준으로 한 소위 “어른”이 됐지만 행복지수는 줄어들었다. 왜서일가.

우리는 출근을 하고 돈을 벌고 인맥을 쌓고 려행을 한다… 어른의 세상에서는 모두 가능할 법한 일을 매일 반복하고 “행복”이라는, 익숙하면서도 좀처럼 잡혀지지 않는 목적을 좇아 다람쥐가 채 바퀴를 돌리듯 정신없이 살고있지만 행복은 어쩐지 멀게만 느껴지던 날들이 있었다. 임신 확인후 아이의 태명을 “행복”이라 지을만큼 행복에 대한 숙명과도 같은 집착을 가졌지만 삶 구석구석에서 느끼는 행복지수는 퍽퍽하리만치 적었다.

무탈함 속에서도, 부지런을 떨며 사는 일상속에서도 여전히 불안감을 버리지 못한채 이도저도 아닌 삶의 모서리를 배회하는건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한번쯤 앓아봤을 두번째 성장통에 의한것임을 나는 사실 알고있다. 인터넷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발달로 인해 이웃의 얘기는 때로는 원해서, 때로는 의도치 않게 내 앞에 펼쳐진다. A는 시집부모가 미국에 가게만 두개 차렸고 B는 디톡스에 돈과 시간을 올인했더니 미인이 됐고 C는 모 단위의 과장으로 승진했고 D는 남편이 잘 벌어 유족한 생활을 보낸다는 소식에 아연실색을 금치 못하다가 급기야는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비교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눅잦히려 찾은 서점에는 “승부하라”는 제목의 계발서가 또 어찌나 많은지. 문득, 경쟁과 비교를 부추기고 1등만을 인정하는 사회분위기가 내 고민에 한몫했다는 원망도 없지는 않았다.

딸아이가 책궤를 엉망진창으로 쑤셔놔 한참을 분노했던 어느 하루, 우연히 소학교시절의 일기책을 주워들었다. 삐죽삐죽 심술대로 적은 일기에는 부모님께서 남의 집 아이들과 나를 비기는데서 폭발한 분풀이로 가득했다. “비교가 너무 싫어!” “난 비교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거야.” 읽다보니 어린 시절에도 비교란 작은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나쁜 일이였다. 왜 어른이 되고서도 그때의 분노를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던걸가.

어느것이 진짜고 어느것이 가짜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오늘의 세상에서 정신줄만 놓는다면 널린게 자랑이고 그냥 볼품없는 자격지심의 노예로만 될것임을 너무 늦게 알았다. 인생이란 물론 서바이벌이라고 하지만 이 서바이벌도 100메터 경주가 아닌, 길고 긴 마라톤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우쳤다. 이런 인생에서 본연의 “나”와, 과정의 즐거움을 무시할 때 행복이란 대체 어데서 올가. 영 안 올지도 모른다.

내가 원했건 아니건 세상에 반짝이는 사람은 많고 내가 잘났건 못났건 한번 왔으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행복이 언제 끝날지 몰라 초조함에 떨거나 남들보다 뒤처질가 다가올 앞날을 걱정하기보단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울면서 “지금여기주의자”로 매 순간을 잘 살아내고 잘 떠나보내는것이 전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가싶다. 어쩌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대체적으로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온갖 정서와 마주할 때 사람마다 보이는 독특한 자세로 그 삶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될수 있겠다는 생각을 재차 해본다.

꿈을 품은채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그 마음 자체면 충분히 아름답다는것을 알고 당장 맺히지 않을 열매일지라도 거기에 대한 아쉬움보단 단촐하지만 더 어른스러운 행복을 느낄수 있는 내가 되길 오늘도 바래본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그렇게 뚜벅뚜벅 성실히 걸어갈 걸음이라면 “행복”이란 늘 떠나지 않는 벗으로 나와 동행할것이라 믿으면서.

렴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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