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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독

□ 안해월

  • 2015-12-24 14:59:51

하얀 아침해살이 어김없이 비쳐 들어온다. 해마다 흰 머릭카락이 늘어만 가는 하얀 집의 녀주인, 오늘도 나는 고요함과 벗하고 내앞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고독들을 바라보며 년륜의 무상함을 넉두리해본다.

톡톡 꽃망울이 터지던 봄날, 내 반쪽은 기적소리를 타고 고향을 등졌다. 달리는 렬차에서 나를 향해 손 젓는 남편의 모습에는 정녕 금의환향의 푸른 꿈이 넘실거리고있었더랬다. 렬차를 따라 달리는 내 마음속에서는 가난에서 벗어날수 있으리라는 부푼 소망과 혼자 남겨질 무거운 마음이 이중주를 연주하였고 그 연주를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습관이 안된 혼자의 일상은 내 반쪽의 빈자리를 수시로 느끼게 했다. 우선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이 굴레 벗은 말처럼 내 속을 무등히도 태웠고 집안 여기저기 자질구레한 가정제품들도 예고없이 고장을 선언했다. 상수도, 하수도 작동이 제멋대로여서 애를 먹기도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눈길은 친절인지 경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고 아저씨들의 친절도 흑백이 가려지지 않았다. 삶이란 과연 이런것이란 말인가. 나는 처음으로 인생이란 각본없는 희비극이라는걸 알았다.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내 반쪽의 일상은 어떨가? 오늘은 무엇을 먹고 어떤 로고속에서 삶과 사투를 벌이는지 나는 알수 없었다. 상상으로 하는 느낌은 미지수에 불과했고 그저 간혹가다 들려오는 송수화기 저편의 소리로만이 서로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분명히 치렬한 삶을 살고있었다. 소망과 꿈을 위해 너무 일찍 견우와 직녀가 된 반쪽과 반쪽의 기다림, 그것은 정녕 배고픈 사랑과 그리움의 눈물이였다. 해마다 칠월칠석은 어김없이 찾아오건만 무정한 까치들은 우리 사이에 오작교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 사이 세월은 조롱이라도 하듯 얼굴에 주름을 만들어주었고 검은 머리에 흰서리를 얹어주었다.

전에 동네방네에 소문난 잉꼬부부의 이야기도 그 해 그 봄날의 기적소리와 함께 아득히 사라져버렸다. 고독과 그리움은 나의 육체와 정신을 공격하였다. 몸은 지독한 태양빛 아래 풀뿌리를 드러낸 잡초마냥 시들시들해지고 가슴은 마른 우물처럼 공허해졌다. 여름 내내 반짝이는 별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은하수에 내 마음을 몽땅 털어놓았건만 은하수는 나를 알은체 해주지 않았다. 내 반쪽이 금의환향 할 날은 언제일가? 공원 벤취에 앉아 은하수의 소식을 기다리는 내내 모기떼들이 나를 골려주기라도 하듯 쉴새없이 소란의 피리를 불어댔다. 상현달과 하현달이 살풋이 웃어주는 랑만의 밤도 나에게는 랑만이 아니라 비애와 고독 그 자체였다.

울긋불긋한 락엽을 즈려밟으며 걷는 가을길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고운 석양을 등에 지고 다정하게 손 잡고 걷는 로부부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아닌가. 그들의 뒤를 따라 나도 걸어본다. 고독이 내 발목에 칭칭 감긴다. 은하수도 하냥 무소식이다. 아마도 인간세상이라는 이 울타리에서 나를 영영 밀어낸 모양이다. 인내의 철학은 내 가슴에서 철저하게 무너져내리고말았다. 하지만 또 무슨 방법이 있으랴. 나는 기다림이 헛수고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바보처럼 기다림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눈보라기 치던 어느날, 나는 내 그림자와 마주앉아 또 옛이야기를 또 들추어냈다. 나의 그림자는 이야기주머니 력사가 20년도 넘다는 나의 말에 킥킥 웃는다. 나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못할 감정이 욱 치밀어 나의 그림자를 툭 밀쳤다.

20년의 춘하추동 홀로 서기에 지쳤다기보다는 무디여졌다는 편이 나을가. 인생에 또 얼마나 많은 20년이 있을가? 그래서 불현듯 슬퍼난다. 사랑을 잃고 행복을 잃은 내 삶이 한없이 서러워난다. 이제서야 부자의 꿈보다도 더 간절하고 소박한 내 삶의 꿈을 알았다. 가난하였지만 앞마당에 채소 심고 자전거 등받이에 아이를 태우고 내 반쪽에게 “여보”라 살갑게 부르며 살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가고싶어도 갈수 없는 그 순간들이 진정한 행복이였음을.

내 반쪽은 오늘도 별아래에서 숨 쉬고있겠지, 이제라도 우리 세월을 다시 디자인하여 흰머리 날리며 두손 꼭 잡고 강변의 유보도를 거닐면 안될가? 너무 일찍 시들어버린 사랑을 늘그막에라도 화사하게 다시 꽃 피우면 안될가?

오늘도 나느 고요한 겨울 하늘 먼곳에 있을 당신의 별을 찾으며 고독을 껴안고 핑크빛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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