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마음을 확 열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가 없다. 일찍 남들로부터 “맑은 물에 고기가 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나건만 나이가 들면서 모름지기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러던 요즘 두루두루 고인들의 글을 살펴 보았더니 지나친 걱정과 고민에 빠질것 없다는 명쾌한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폐부로부터 나오는 숨을 몰아쉬면서 붓을 들고 “붕우성찰”을 터치하는 바다.
벗이란 어떤것이며 친구란 무엇인가하는 개념부터 분명히 알고저 사전을 펼쳐보았더니 벗이란 비슷한 나이에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 붕우, 우인, 친구라고 하며 또는 사람이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의 비유하는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말해둘것은 나는 벗이라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친구라는 말을 싫어한다. 벗이라면 존중스럽고 교양적이지만 친구라 하면 대방을 낮추는것 같아 좀 어색하다. 존경이 없이는 신앙과 사랑이 어찌 있을수 있겠는가.
나는 성미가 팽팽한데가 있지만 세상사물에 오성이 미치지 못하였다는것을 알고 있는터라 괴벽하거나 오만할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와 오성은 용포와 포의를 가리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해서 나에게는 옛것을 사모하는 품격과 취향이 많아 가끔 현대 고속도템포에 떨어져 기원전 요, 순, 우의 원시사회의 부락시대를 찾아가는가 하면 당송시대의 어진 선비들이나 문학가, 그리고 서구의 고고철학을 찾아 그들의 참된 뜻을 앙모하면서 삶의 격조와 색조를 가져 보는 로맨틱한 기분이 있다.
올해는 설 기분이 둥둥 떠서 아이처럼 좋아하며 동북으로 떠났다. 떠나기 앞서 벗으로부터 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이번 설 휴무는 나와의 교분이 첫째에 중심이라 하면서 고향에서 만나자했다. 뜻밖의 환희에 “실로 벗은 벗이로다, 가끔 버성길 때도 있었지만.”라고 중얼거리며 나의 린색한 사유를 부정했다.
나는 그와의 상봉을 위하여 년로하신 어머니와 자매, 친척방문을 서둘러 끝마치고 그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없다며 만나주지를 않았다.
보면 거개가 메신저나 전화에서는 “그립소, 간절하오, 지음이요.” 하며 수다를 떨지만 생활이란 아마 우정이나 애정을 담을만한 그릇이 되기에는 아름찬가 본다. 그래서 우정을 지키기란 힘들고 벗을 찾기란 고달프다. 루추한 초가에 포의를 입어도 벗은 스스로 모이는것이니 초불을 들고는 찾지를 못한다.
문득 괴테와 쉴러의 갈등과 칸트와 헤르더 갈등이 떠오르면서 무상(無常)한 인간감정의 무상(無相)을 알것같아 위안된다.
나는 시골을 떠나 겨울의 밤하늘에 헤쳤다. 밤하늘의 신비로운 색조는 시작도 끝도없이 존재하는 우주의 본리를 말하고 있었다.
자고로 천하에 굴원과 같이 추방당한 충신이나 맹상군의 식객으로 된 풍훤과 같은 인물은 있어도 죽마고우는 드물다. 그래서 조정을 떠난 어진 충신이나 재질이 뛰어난 한준(寒俊)들이 벗을 찾고자 강산을 두루 밟아 가는 동방의 문화는 고아(古雅)하고 신비해 종자기는 없고 적벽아래 도사는 하늘을 스친 학이 아니런가. 술을 들어 거문고를 선사하며 벗 양치와의 이별을 고하는 구양수의 우애는 몇몇이 되던가. 그러니 가을을 슬퍼하며 술에 명월을 탄식하는 리유를 알겠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에는 착오가 없다. 실은 법률과 질서가 사람을 삐뚤게 평가하는것이다. 자연을 즐기는것만큼 자유롭고 포근한것이 없다. 자연을 즐긺은 마음이요 벗을 즐긺은 그때뿐이니 차라리 옛것을 찾아 길을 떠남이 유유자적하다.
생명체의 만남이란 거개가 득실의 만남이다. 그래서 벗이 되지 못해도 나쁠것은 없다. 살아가는 삶이란 거친 땅에서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거늘 세상만사가 다 그런것이다.
커다란 보름달이 찾아왔다. 달은 나를 내려다보며 남의 일을 캐묻지 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