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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간이역

□ 리삼민

  • 2016-01-15 08:56:31

우수수 락엽이 떨어지는 작년 10월말에 나는 옛 고향인 도림촌에 다녀왔다. 수분하에서 할빈으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해림시 횡도하자역과 산시역 사이를 달리느라면 자그마한 도림 간이역이 보인다. 지난 세기 40년대초에 우리 태원 리씨 4세대가 조선 함경북도에서 살다가 두만강을 건너 괴나리보짐을 헤친 곳이 바로 이 도림촌이였다.

도림촌은 그때 살기 좋은 시골마을이였다. 간이역전부근에는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었고 그아래에 퐁퐁 솟아나는 샘터가 있었다. 해마다 살구꽃이 만발하는 봄철이 되면 마을사람들과 외지에서 온 산나물장사군들이 삶은 감자 서너알을 괴춤에 넣고 산속에 들어가 산나물을 뜯었다. 점심때가 되면 사람들은 샘터 주위에 모여앉아 식사를 하면서 오후 네시 기차를 가다렸다. 천년 원시림사이로 힘겹게 톺아오르다가 고작해야 통학하는 학생 몇명과 산나물장사군들이 오르고 내리는 간이역,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이 간이역은 시골 백성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보금자리였고 바깥세상과 통하는 창구였다.

그러나 지금 내앞에 펼쳐진 풍경은 동년시절 나의 머리속에 새겨진 옛 모습이 아니였다. 오손도손 모여 앉았던 초가집들은 고속도로가 마을 중간으로 지나가는바람에 뭉청 잘리웠고 급행렬차는 도림역에 서지도 않고 지나갔다. 갈한 목 가셔주던 샘터는 언녕 메워지고 우두커니 서있는 느티나무만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대합실을 지켜보고있었다. 더욱 나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것은 내가 소학교 1학년을 다니던 학교였다. 언녕 페교가 된 학교마당엔 돼지들이 우글거리고 계양대의 색바랜 국기는 찢어진채로 외롭게 펄럭이고있었다.

아니, 외로운건 나였다. 정열과 야망으로 찬연하던 젊은 시절, 나는 환상에 젖어 앞만 내다보며 인생의 년륜을 차곡차곡 새겨갔다. 그러다 어느하루 급행렬차를 타면서부터 나의 인생에는 속도가 붙었다. 촌에서부터 현소재지로, 다시 대련이라는 큰 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의 빠른 리듬을 즐기게 되였고 내 리듬과 속도에 길들어져 어느덧 도림촌 같은 간이역을 먼 추억의 안방으로 밀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누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 “보다싶이 나는 지금 시간에 쫓기고있다네”, “이런 일은 나와는 상관이 없소”, “차차 봅시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급행렬차가 간이역에서 기다리는 승객들을 외면하듯 나도 그들을 외면했다. 어느때부턴가 내가 외면했던 사람들도 슬그머니 내곁을 떠나갔고 호형호제하던 동료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핸드폰에는 수많은 전화번호들이 저장되여있지만 그속에서 쉽게 불러낼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 보면 지구촌의 구석구석에서 급행렬차를 타는 사람들은 돈지갑이 불룩한 사람들이고 생활의 밑바닥에서 가난에 쪼들리고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뿡- 하고 지나가는 급행렬차를 처연히 바라만 보아야 하는 간이역의 승객이 아닌가싶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우리는 왜 다 알고있으면서도 모르는척 피하는것일가? 왜 본심을 숨기고 자연스러운 인정을 밀어내는것일가? 간이역은 나를 이곳까지 불러내 자신의 외로움을 말해주었다. 질주하는 급행렬차에서 내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라고 한다. 내가 가장 원하는것을 찾아 일상을 즐기라고 다독인다.

간이역앞에 서니 나의 외로움은 더욱 짙어만 갔다. 그리고 나는 장마비속의 풀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받아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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