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라이프

꿩을 쫓아가던 영춘형, 그 높푸른 리상과 격정

  • 2016-02-01 08:30:25

영춘형이 네번째로 에세이집 《래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를 펴냈다. 역시 영춘형다운 열정과 패기, 해학과 유머가 넘쳤다. 영춘형은 나의 친구 채성춘의 형이요, 우리 두 집은 연길시 광명가두에서 울바자 하나 사이 두고 의좋게 지냈다. 일찍 1960년대 초반 3년이나 지속된 재해로 기아에 허덕이던 시절 서민들은 강냉이떡이나 죽으로 연명했고 한해가 저물도록 고기 한칼 먹지 못했다. 1964년 겨울 연변지역은 큰 눈이 내려와 꿩들이 먹이를 찾아 연길의 공원이며 강바닥에 내려앉았다. 하루는 영춘형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얼굴이 부석부석한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안고 주섬주섬 밥상을 챙기다가 꿩이라도 한마리 주어온다면 꿩국이라도 해먹겠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이 구차한 세월에 아기를 낳고 얼마나 속이 출출했으면 이런 말씀을 할가싶어 영춘형은 못내 가슴이 아팠다.

이튿날 오후 우리 몇몇은 영춘형의 휘동하에 맨주먹으로 꿩사냥을 떠났다. 꿩사냥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몇번 헛물을 켠 뒤에 모두 포기했지만 영춘형만은 혼자서 산양떼를 쫓아가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끈질기게 쫓아갔다.

그날 저녁까지 영춘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온 동네 어른들이 총출동해서 모아산 자락에서 오돌오돌 떨고있는 영춘형을 찾아가지고 동네로 돌아온것은 밤 10시였다. 아무튼 영춘형의 지극한 효심과 목표를 향한 끈질긴 집념과 도전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 에피소드라 해야 하겠다.

꿩을 쫓던 이 우직한 소년은 연변TV방송국 국장, 신문출판국 국장을 거쳐 주당위 선전부 상무부부장으로 맹활약하다가 2010년 정년을 맞았다. 영춘형은 정년을 한후에도 조선족문화건설의 진두에 서서 우리 모두에게 지행합일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 나무에 그 열매이요, 그 인간이자 그 글이라고 했던가. 나는 이 에세이집의 가치와 매력을 아래와 같은 세가지로 나누어보고저 한다.

첫째로, 영춘형은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다. 워낙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데다가 글도 잘 쓰고 연설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그림은 더욱 프로급이다. 또한 그는 축구판을 주름잡는 공격수요, 연변의 유명한 등산애호가이며 두주불사(斗酒不辞)하는 주성(酒圣)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채주력이라는 별호를 갖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춘형의 독서범위와 활동범위가 이렇게 넓은줄은 미처 몰랐다. 또한 그의 시야와 관심사 역시 이렇게 넓을줄은 미처 몰랐다. 그의 에세이 소재를 보면 지역적으로는 연변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지어는 구미 여러 나라까지 망라한다. 거시적으로는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고있고 미시적으로 언어, 문학, 예술, 독서, 지리, 문물, 심리, 풍속, 스포츠 등 많은 분야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 에세이집은 적어도 개혁과 개방후 조선족사회의 고민과 고뇌, 변화와 발전의 궤적, 특히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친 우리 조선족지성인사회의 축도로 된다. 특히 해외에 나간 조선족근로자들까지 널리 포섭해 그들의 진로를 밝히고 중국정부의 관심과 배려를 촉구한 “코리안과 조선족”, “‘미꾸라지’의 악행과 우리의 책임”, “재한차세대를 위한 바람직한 발상”과 같은 글들은 참된 당지도일군의 드넓은 흉금과 안목, 투철한 민족적책임감과 참신한 발상을 일목료연하게 보여준다.

영춘형은 수십년간 연변의 문학과 예술, 방송과 신문을 관장(管掌)해온 지도일군으로 이 에세이집에 실은 서문이나 칼럼, 연설문들은 100%로 그 자신이 밤을 지새워가며 육필로 집필한것이다. 그는 언제나 당과 정부의 지시정신을 전면적으로 투철하게 리해한 토대에서 깊은 사고를 거쳐 연변의 구체적인 실제에 맞는 그 자신의 독특한 시각과 관점, 합리적인 건의와 실천적인 대안들을 내놓고있다. 그래서 그의 서문과 칼럼, 특히 연설문은 패기와 용단으로 넘친다. 이를테면 "중국주류사회에서 서성거리는 조선족문학"이라는 칼럼에서는 조선족문학과 영상매체의 접목을 통해 언어예술에 활력소를 주입하고 문학의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하면서 연변지역에서 조선족간부를 등용할 때 그들의 조선어구사능력과 년소화요구를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조선족문학 독자층의 저변확대를 꾀하고 연변지역 조선어사용의 일대 부흥을 일으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숨쉬는 연변의 느낌공간 만들기”에서는 연변에 미술의 전당을 만들것을 제안하며 예술가의 안목을 십분 살려 그 공간내부까지 구체적으로 설계한다. 그래서 영춘형의 에세이는 독창적인 안목과 참신한 아이디어, 유머와 위트로 번뜩인다.

둘째로 영춘형은 “오래된것을 충실히 지켜나가고 새로운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괴테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 즉 “온고지신”은 문학의 본령, 특히 에세이의 본령과도 맞닿아있는 진리라고 하겠다. 칼럼은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도 필요하지만 작자가 말하고저 하는 뜻을 다른 사물을 통해 비유적으로 말하거나 에둘러 말하기 일쑤다. 이른바 다른 사물이 바로 “옛것”이 된다. 이 “옛것”은 전례가 될수도 있고 작가의 견문이 될수도 있다. 영춘형의 글들은 자신의 풍부한 체험과 다문박식함을 충분히 살려 “옛것”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오늘을 관조하거나 반성하고있어 한결 더 재미와 설득력을 가진다. 이를테면 “‘유산’귀속문제”, “관행론”, “명인효과 개발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론”, “나의 축구격정” 과 같은 글이 그러하다.

이 에세이집의 백미(白眉)요, 압권은 “나의 축구격정”이라는 글이다. 영춘형이 길림성사회과학일군대표단 일원으로 이집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수에즈운하를 돌아보던중 광장에서 이집트 젊은이들이 축구를 하고있었다. 그들이 놓친 축구공이 면바로 영춘형에게로 데굴데굴 굴러왔고 영춘형은 패스가 아니라 이집트 젊은이들에게 새매처럼 두 팔을 벌리고 왼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눕히면서 쉿을 했다. 그 멋진 쉿에 이집트 젊은이들은 환성을 질렀고 같이 놀자고 청했다.

“이집트 젊은이들과 20, 30분가량 정신없이 공을 차고나니 광택이 흐르던 내 구두는 완전히 흙먼지범벅이 되였고 흰 적삼은 땀과 먼지에 절어 그야말로 꼴불견이였다…” 이 글이 여기서 끝났다면 아마추어 축구선수의 재미 있는 무용담으로 되였겠지만 영춘형은 화룡점정(画龙点睛),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묘미를 살려 독자들에게 깊은 사고를 유발한다.

“나는 늘 축구경기에 림하는 자세로 공직자의 삶을 격정으로 타오르게 할수 없을가 생각해왔다.”

경기에 림하는 프로선수처럼 격정을 가지고 공직에 림하는것, 이게 영춘형의 불변의 신조이며 그래서 영춘형의 글은 격정과 더불어 익살과 유머로 넘친다.

셋째로 영춘형은 피와 땀으로 연변을 개척하고 공화국의 창건과 번영에 기여한 선현들을 사랑하고 연변의 일초일목을 사랑한다. “‘유산’귀속문제”, “친환경도시개발론”, “도심론”, “생태변천론”과 같은 글들을 보면 선도구국가전략, 연룡도일체화전략을 펴나감에 있어서 유적지건설을 포함시켜야 할뿐만아니라 연변의 독특한 생태환경을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모든 선견지명과 아이디어는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춘형의 높푸른 리상과 격정은 그의 지극한 혈육애, 동포애, 연변사랑의 마음에서 피여난 한떨기 꽃이라고 생각한다.

자고로 해와 달을 쫓아가고 무지개를 쫓아갔던 우직하면서도 엉뚱한 소년들이 세계사를 뒤흔든 큰 인물이 되였다. 가난한 연변에서 나서 자랐기에 영춘형은 꿩을 쫓아갈수밖에 없었다. 연변에서 나서 자랐기에 망정이지 좀 더 큰 무대가 주어졌더라면 영춘형은 더 큰 일을 해내고 더 큰 인물이 되였을지도 모른다.

재직 43년간 영춘형은 우리의 “오래된것”을 망각하고 이른바 “새것”만 쫓아가는 그러한 경망스러운 행태를 질타하면서 “오래된것에 충실하고 새로운것을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로 우리 민족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신명을 다 바쳤다. 지금도 영춘형의 드높은 리상과 격정은 식을줄 모르고 활활 홰불처럼 타오르고있다.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