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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림 해란강에 돌아가다

□리성권

  • 2016-09-29 15:15:47
올해 들어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린탓일가, 오랜 세월을 지나 갈수록 말라가던 해란강이 오늘은 손색없는 강으로 흐른다. 저멀리 아득히 펼쳐진 해란벌을 굽이굽이 감돌며 유유히 흘러와 여기 룡정시 동성용진 영성촌 마을앞에 이르러 때로는 사품치고 때로는 넘실넘실 기복을 이루기도 하면서 동으로, 동으로 쉬없이 흘러간다. 바람 한점 없는 쾌청한 가을날씨, 푸르른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늦더위를 지켜내려는듯 가을 태양이 아직도 따가운 빛을 쏟아붓고있다. 그아래 무연한 강량안의 해란벌에서는 고개숙인 벼이삭이 시누런 황금색으로 벌판을 장식하고있다. 인제 궁궐 같은 가옥들이 보기좋게 들어앉은 영성마을을 병풍처럼 둘러간 웅기중기 푸른산 서북쪽 끝자락으로 아스란히 모아산과 기상탑이 바라보인다.

바로 이 자리 해란강 수면우로 골회함 두개가 가지런히 띄워진다. 대부분 골회는 바로 영성마을앞 강바닥에 가라앉히고 나머지 골회만 싣고 서서히 서서히 강줄기를 따라 떠내려가고있다.

“아버지, 어머니, 편히 가십시오!”

“두분 사이좋게 내내 함께 하시옵소서!”

옷자락이 젖는줄도 모르고 강안에 들어가 골회를 뿌리고 골회함을 띄운 아들 송운이와 며느리 영애가 잎가에 손나팔을 해대고 잇달아 웨치는 소리다. 애절함과 뜨거운 념원이 담긴 그런 목소리다. 강가에 줄느런히 늘어선 세 딸과 식구들, 손군들까지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골회함을 손저어 바래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작별을 고한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다녀가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잘가세요!”

이들은 대체 누구일가? 왜 바다도 아니고 두만강도 아닌 이 해란강에 고인들의 골회를 뿌려야만 하는걸가? 영성촌이 고인들의 고향일가?

고인중 한분은 박하림, 1933년 당시의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용신향 대신촌에서 출생, 18세부터 연변일보사 기자로 장장 40여년을 근무하고 2004년에 작고한분이다. 다른 한 고인은 박하림의 부인 김성자, 1932년 흑룡강성 밀산지방 태생으로 건국전 14세에 지금의 연변일보사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에서 인생공으로 시작하여 후일 수십년간 교정원으로 사업한 리직휴양간부로서 장기간 병환에 계시다가 이틀전 작고하신분이다. 이날 장례식을 앞두고 자녀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들 송운이가 침울한 어조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나서 골회를 어디에 모셔야 할지 인제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저희 내외에게 남긴 유언이 계셨습니다. ‘…나는 해란강이 낳고 키운 기자였다. 내가 죽은뒤 내 골회를 영성촌 마을앞 해란강에 뿌려다오!’ 지금까지 아버지골회를 애초 연길시 렬사릉원 골회함보관소에 모셔둔대로 있었던것은 아버지 홀로를 보내드릴수가 없어서였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 유언을 지켜드릴가 합니다. 어머니 골회와 함께 말입니다!”

식구들이 십여명이 모인 자리였다. 이윽토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말치 않아도 자식된 마음들은 하나같이 불보듯 번연한것이다. 그렇게 보내드린다는건 그 이후 어데 가나 찾아뵐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움을 달랠 곳도 힘든 세상을 기대기라도 하고 하소연이라도 할곳조차 없게 된다는 말이다. 또 서로 멀리 떨어져살고있는 형제자매들이 청명절이나 추석같은 명절에도 부모님령전을 매개로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기회도 드물어지게 될것이다. 허나 저저마다 아버지, 어머니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자식들이다. 그 유언은 보모님의 마지막 소원이고 간절한 바람이다. 그 유언을 지켜드리고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는것이 무엇보다 크고 큰 효도임을 그들은 저마다 잘알고있었다. 별 의견상이가 없이 고인들을 해란강에 보내드리기로 락착이 되였다.

한데 왜 영성촌일가? 해란강이 낳아 키운 기자였다는 고인의 유언은 과연 무슨 사연을 담고있는것일가?

1951년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특수한 년대라 할수 있다. 그 특수한 년대에 나라의 특수한 수요에 의하여 당시 18세 나이로 고중 2학년 학기초 재학중이였던 고 박하림(이하 박하림)은 국가의 통일배치에 의하여 앞당겨 졸업하고 연변일보사의 기자로 일하게 되였다. 그가 기자생활 첫 취재대상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연변의 첫 호조조를 건립한 김시룡, 후일 전국 로동모범으로, 도합3기에 걸쳐 전국 인대 대표로 선후하여 27차나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 등 당과 국가 주요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고 제3기 전국인대회의 제1차 회의에서는 대회주석단 성원으로 되여 나라의 여러 지도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국가대사를 토의 결정하는데 직접 참여했던 바로 그 김시룡이였다. 18세의 어린 나이, 그것도 작달막한 키에 애어린 얼굴을 한 박하림은 이 첫만남이 자기의 수십년 기자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처 다 알지 못하고있었다. 후날 그는 자신의 기자생활 40여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쓴다. “수많은 선배와 스승가운데서도 나에게 있어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익숙하며 가장 존경스러웠던 스승은 김시룡이였다”

“장기간 농촌기자생활을 하면서 연변 농촌을 거개 다 누비고다닌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은 바로 김시룡의 영성촌(당시 영성대대, 이하 통칭 영성촌)이였다. 참된 기자로서의 나의 삶을 낳아주고 길러준 곳이 해란강이 적셔주는 옥토벌-영성벌이였고 거기에 사는 김시룡과 착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촌민들이였다…”

김시룡은 그에게 “학생 과당 질문”이 아닌 “유도질문”과 같은 취재요령으로부터 시작하여 학생틀에서 벗어나 촌민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과 하나 되여 어울리면서 그들의 희노애락을 파헤치는데 이르기까지, 또 신문의 진실성과 실사구시적인 보도를 견지할데 이르기까지 세세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시룡을 취재하던 초기 박하림은 영성촌에 가면 촌초대소에서 먹고자고했고 취재대상도 김시룡한테만 국한했다. 또 김시룡의 집에 들어갈 때도 번마다 꼭 웃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 방에 앉은채 떠다주는 물을 마시면서 취재를 하군 했다.

“얘, 하림아,”

김시룡은 어느새 “박기자”로부터 “하림아”로 호칭을 바꿨다. “너 초대소가 머니? 그러지 말고 다음번부턴 우리 집에 와 묵도록 해라. 그리구 죄꼬만게 무슨 손님이라구 웃방문으로 다녀? 정지문으로 들어와 정지칸에서 나하구 얘길 나누구 물도 네손으로 떠다 먹도록 해라.”

또 어느새 “하림아”가 “죄꼬만게”로 하대된다.

어느날, 또 김시룡의 취재를 갔더니 그날 마침 촌민회의를 한단다. 그 회의에 함께 가자고 하는 김시룡의 말에 박하림이 안가겠다고 버티자 김시룡은 대뜸 그의 귀를 잡아끌면서 “죄꼬만게 왜 촌민들을 깔보는거니?”라고 무작정 데리고 갔다.

18세의 어린 나이라 그때 박하림은 술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어느 한번 영성촌 년말총화모임 취재를 갔던 그가 모임끝에 벌어진 술자리에서 강권하는 촌민들의 술잔을 거절하자 또 김시룡에게 귀를 잡혔다.

“죄꼬만게 기자라구 틀을 차리냐? 농민들과 함께 술잔두 기울이구 취하기두 하구 그래야 진짜 기자루 되는거다!”

김시룡과 한 촌민이 각기 귀와 술잔을 잡은채 억지로 그의 입에 술을 쏟아넣었다. 그리고 한 촌민은 기름 묻은 손으로 돼지고기 큰살점을 그의 입에 마구 밀어넣었다. 그날 술에 만취한 박하림은 김시룡한테 엎혀서 그의 집에 가 자게 되였다. 이튿날아침 김시룡은 그에게 해정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인젠 우리 집뿐만아니라 다른 촌민들 집들도 자주 드나들면서 사람도 익히고 살림살이도 살펴보면서 그들과 친숙해져야 하오.”

그뒤로 얼마 안가서 박하림이 취재차로 촌에 가면 마을 사람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다 “박기자"가 아닌 “하림이가 왔소, 하림이가.” 하면서 반겨 맞아주었다.

그무렵, 한번은 기자들이 영성촌에서 공공식당을 잘 꾸린다고 련속보도를 한적이 있었다. 김시룡은 “공공식당을 잘 꾸린다고 향으로부터 현, 주에 이르기까지 다 여게 와서 현장회의를 하는 통에 전 촌의 1년식량이 중등 무지러졌는데 무슨 놈의 식당이 잘 꾸려진다고 신문에까지 내는가, 당보기자들이 실정을 파악하지 않고 인민들을 속여서야 말이 되는가!” 하고 퍼그나 노여움을 쏟아냈다. 그는 박하림에게 “내가 잘한것만 쓰지 말고 나의 잘못을 비판하는 글도 쓰도록 하오. 그리고 나뿐만아니라 다른 선진인물들도 보도를 하도록 하고 겉보기 좋은데만 눈길을 그치지 말고 촌민들의 고초, 그들의 의견까지에도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하오.”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김시룡은 그에게 있어서 기자사업에서의 스승일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인정많은 맏형과도 같이 푸근한 정과 자상한 관심을 준 사람이였다. 해마다 한번씩 자치주 인대회의차로 연길에 올 때면 꼭 그의 집을 방문하군 했다. 박하림에게 “하림아”로 대했듯 그는 박하림의 부인인 김성자에게도 “성자야, 어떻게 사는가 좀 보자.”라고 하면서 스스럼없이 대했다. 당시 우로 량친부모, 아래로 동생과 아들딸 도합 11식구가 살았던 박하림은 가정살림살이가 무척 각골할 때였다.

김시룡은 “쯧쯧쯧, 기자의 살림살이가 이래서야 쓰겠냐!” 하면서 깊이 동정했다. 그리고 “잘살 날이 오겠지, 힘내라!” 하고 고무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뒤로 영성촌에 가면 김시룡의 부인은 “집살림이 그렇게 구차하다니 집에서 변변히 자시기나 하겠소?” 하면서 닭을 잡는다 찰떡을 쳐준다 하면서 극성스레 대해주었다…

과연 해란강반의 영성촌은 기자로서의 박하림의 삶을 낳아준 “고향”이고 김시룡은 그를 참된 기자로 키워준 스승임에 틀림없다. 유서깊은 강과 “옥토”가 바로 박하림의 40여성상 기자생활을 빛나게 장식해준것이다. 그의 40년 기자생활 총화인듯 싶은 “박하림신문작품선집” 서문에서 당시 연변일보사 사장(후일 중공연변주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 리득룡은 이렇게 썼다. “그는 ‘다산기자’로 40여년 동안 붓을 날려 1000여편의 소식, 통신과 언론 그리고 20여편의 론문을 썼다. 그는 또 ‘다면수’로 그 어느 쟝르, 그 어느 분야에서나 명수였다… 그는 한 평번한 기자, 편집으로부터 고급기자로, 부주임으로부터 주임, 부주필로, 신문사의 선진일군, 모범일군으로부터 2기에 걸쳐 자치주인대 대표로까지 당선되였다…”

어느새 두 골회함은 영성다리밑을 지나 저멀리 흘러가고있다. 어디까지 갈가? 해란강이 끝나는 곳까지? 아니면 해란강과 연집하가 합류하는 부르하통하까지? 아니면 부르하통하와 가야하가 합류하는 곳까지? 또 아니면 두만강이나 그 강이 흘러드는 드넓은 바다까지?

아무튼 두 고인의 골회의 대부분은 여기 영성벌 해란강 강바닥에 고스란히 가라앉아 그 넋은 날이 갈수록 그속에 깊이 묻혀있을것이다. 그의 넋은 그속에서 그가 생전에 쓴 “해란강의 넋” 주인공 김시룡과 만날수 있을가? 김시룡이 그토록 사랑했고 박하림과 무랍없는 친구들이였던 영성촌 촌민들과 서로 만날수 있을가?

아무쪼록 그속에서도 그이들의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그 모든이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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