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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게 말을 걸다

□ 김학송

  • 2016-10-13 15:08:19
문학의 중심에 섰던 시가 한쪽으로 밀리우게 된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시 쓰는 사람들의 문제도 적지 않다고 본다. 시를 재미없게 쓰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죄 없는 시는 독자와 멀어진채 쪽방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있는 눈치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다. 그만큼 직감에 호소하는 성분이 다분하다. 스쳐가는 미인을 되돌아보듯 다시 보고픈 충동이 확연히 생기도록 써야 한다. 시를 접하는 순간부터 선명한 미감으로-낚시군이 월척을 낚듯이- 독자의 마음을 확- 후려채야 할것이다. 독자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고 또 요즘처럼 생활절주가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에는 더구나 그러하다. 찰나에 독자를 매료시키지 못하면 금방 놓쳐버리게 된다. 첫행부터 뚜렷하게 끌리는데가 있어 다 읽고난 다음에도 다시 읽고싶어져야 시가 온전히 제 구실을 하게된다. 여기서 말하는 선명한 미감이란 지극히 아름답거나 지극히 진실하거나 지극히 순수하거나 지극히 재미있거나 지극히 철리적인 경우를 말한다. 난삽하고 딱딱한 시구를 퀴즈풀듯이 기어이 풀어보려고 애쓸 독자는 별로 없다.

시도 음식이다. 정신의 음식이다. 우선 보기 좋고 맛이 좋아야 식(食)자에게 먹히운다. 누군가에게 먹히워야 그 영양가치를 론할수가 있게 되는 법. 먹히지 못하는 음식은 곧 부식되고만다.

시의 뜨락으로 많은 독자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시인의 겸허한 자세가 각별히 요청된다. 독자가 자기의 귀중한 시간(아주 순간적인 혹은 가장 짧은 시간일수도 있음)을 할애하여 한 시인의 시를 읽어주는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그럼 독자가 가장 짧은 틈을 할애해주는 그 순간적인 시간내에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 잡겠는가? 여기에 깊은 학문이 있지 않겠는가?

몽롱한 언어로 따분한 시를 빚어 놓고 독자가 미처 리해 못하니 독자더러 몇십분씩 혹은 몇시간씩, 심지어 며칠이라는 시간을 할애하여 “내 시를 봐줍소사, 그 뜻을 해독해 주옵소사” 하고 강요할수는 없는 일.

시는 독자와 함께 가야 하고 독자를 왕처럼 모셔야 비로소 그 발전이 가능해진다. 예술은 감동이고 공감이기때문이다. 그 어떤 구실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대중을 떠난 스스로의 선양은 그 얼마나 무의미한가!

나의 시가 나에게만 속해서는 의미가 없다. 나는 나의 시가 나를 벗어나 멀리 흘러가기를 바란다. 내 가슴에서 타인의 가슴으로 옮아가기를 바란다. 호수우에 그려진 파문처럼 넓게, 멀리 번져갈수록 가치가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시를 평가하는 열쇠는 나에게 있지 않고 독자가 쥐고있다. 스스로 좋다고 하는건 무효이고 오직 독자가 좋다고 해야만 그 평가는 효력을 발생한다.

언어의 배면에서 강하게 풍겨오는 미적인 호소력은 체험의 질감과 정비례한다. 진짜 깊은 시는 깊은척을 하지 않는다. 현대시의 지나친 기술주의나 지적인 사치가 병페라고 한다면 소박성의 미에 눈을 뜬, 구체성을 지닌 시구가 무척 아쉬운 시점이다. 깊은 체험을 통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시가 참시이며 좋은 시이다. 좋은 시는 독자의 기억에 남는다.

시의 우렬은 독자의 기억속에 남느냐 남지 않느냐에 달린다.

독자의 기억에서 사라진 시는 별로 좋은 시라고 할수 없다.

시행속에 시인의 절실한 혼이 침투되어 고도의 진정성을 얻을 때만이 시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뼈저린 감수가 선행되여야 생명력이 있는 좋은 시의 생산이 가능해진다. 언어의 리면에 그 언어를 지탱하는 체험적에너지가 결여한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진정성이 거세되고 어떤 간절함이 없는 시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고금중외의 명시는 례외없이 모두가 공감대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한 작품들이다. 평범함속에 비범함을 감춘 작품들이다. 좋은 시는 맹물에 알콜을 탄것이 아니고 쌀, 누룩, 노하우가 버무러져 오랜 세월이 발효시킨 명품술이다. “명주”를 생산하자면 영감을 삭이고 거를수 있는 정신의 그릇을 만드는 작업이 필수다.

한국의 소설가 이외수씨는 천상병시인을 가리켜 백년에 한번 나올가말가한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천시인은 옹근 마음으로 시를 쓰는, 흔치않은 시인이라고 했다.

기교에 련련하지 않고 깨끗한 심장으로 시를 쓴 천시인은 이 시대의 마지막 순수라고 불리울만큼 솔직하고 심성이 맑은 사람이였다.

그의 대표작 “귀천”은 명시중의 명시로 평가 받고있다.

알기 쉽지만 뜻이 깊고 영혼을 울려준다. 깊은 진실이 독자를 감동시킨다. 시인의 진실이 독자의 진실과 만나 공명의 불꽃을 튕긴다.

좋은 시는 새 독자를 만나 새 감동을 일으킬 때마다 새 생명을 얻게 된다. 감동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좋은 시라고 할수 있다. 이 진실과 저 진실이 만나 열매가 맺힌다. 그 열매가 눈물이며 감동이다.

시에서 중요한것은 드러냄과 감춤의 적절한 배비이다. 너무 드러내면 여운이 없고 너무 감추면 도깨비시가 되고만다.

시도 생명체이다. 하기에 가장 합리한 거리에서 시적대상물의 본질이 형상으로 드러날 때 언어는 생명을 획득하고 한 수의 좋은 시가 태여난다.

시는 시인의 내면에서 흐르는 령혼의 샘물이다. 마음의 박우물에서 찰랑이는 청정수이다. 요란을 떨지 않고 수줍게 조용히 흘러가는데서 생명을 얻는다.

서정성의 기본 특징은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한 자기 내면의 자연스런 표출이다. 그런 표현은 너무 드러내지 않은 함축된것, 절제된것일수록 좋다. 자아성찰과 반성이 없는 서정은 진정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객관적상관물은 흔히 자아를 바라보는 들창이 된다. 반성과 참회의 미학이 침투된 시가 고도의 서정성과 일치되는 경우가 많다. 윤동주의 시가 좋은 보기가 된다. 순정한 마음이 떠올린 참회, 반성, 붐끄러움을 통해 서정성을 일궈낸것이 윤동주 시의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우주자연과 자아를 옳게, 깊이 바라보는 눈이 중요하다.

무한히 화분될수도 있고 무한히 화합할수도 있는 자아를 부단히 정시하고 그런 자아를 바라보는 깊은 눈이 생길 때 시인은 거기에서 좋은 시를 만나게 된다.

시인은 모름지기 아름다움과 인간성과 예술로 독자를 감동키켜야 한다. 이러자면 시인은 우선 겸손해야 하며 독자의 종이 되여 독자를 섬길수 있는 착한 심성을 지녀야 한다. 문학은 모든 욕을 이겨가는 선비의 길이다. 령혼의 순수성이 가장 중요한 시인의 자질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한걸음 물러설줄 알아야 한다. 시는 시로 완성되여야 한다. 역경이나 아픔을 겪고나면 령혼이 성숙되고 시가 깊어진다. 사는만큼의 시이다.

기존가치관이 무너지고 새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무(无)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있다.

흔들리는 삶의 환경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힘은 온당한 내부질서의 건립에 있다.

남을 모방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자기다운 내면의 질서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런 내부질서를 가꾸는 보다 큰 힘이 바로 문학이며 시이다.

본질적으로 시의 위기란 인류생명 자체의 위기이다.

시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진심으로 시에게 사랑을 바치는 일 외에는 달리는 길이 없다. 시인은 뭐니뭐니 해도 시를 잘 써야 한다. 진짜 시비는 독자의 마음속에 세워진다. 시인의 진정한 훈장은 시작품- 그 자체뿐.

좋은 시에는 날개가 있다

깃을 푸득이지 않아도

먼 곳으로 나래치는 날개를 가졌다

이 날개는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시의 날개는 신의 옷자락을 닮았다

고요속에 태여나 소란속에 몸을 감춘다

겸허속에 날개가 펴지고 교만속에 나래가 꺾인다

스스로 만든 날개가 아니라 우주의 령혼으로부터

잠간 빌려온 날개이다

조금이라도 허세를 부리거나 욕심을 부리면 우주는 그 날개를 거둬간다.

도처에 비관론이 머리 들고있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근자에 열린 한 문학축제에서 어느 랑송가의 시랑송을 들으며 행복한 전률을 느꼈다. 노래말이 곡상의 등에 업혀 멀리멀리 날아가듯이, 시도 랑송가의 입술에 얹혀 멀리멀리 날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떠본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다. 시는 독자와 함께 가야 한다. 우리의 시가 민들레 홀씨처럼 천하만방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과욕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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