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라이프

길에 빠진 길

□ 정호원

  • 2016-10-20 14:42:24
혹할바엔 둔갑술로 요부가 되라. 줄바엔 싹 벗어주라.

그에 대한 맞대결이 더 아이로니하게 핍진하다.

반할바엔 미치라. 빠질바엔 잡아먹어라!

누군가는 이런 맹렬한 리성VS리성 대치흡인을 두고 설교한바 있다. 야하고 속된 부분을 제외하곤 응당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포인트가 꽤 짙다.

나에게 길을 주고 그 선물에 이끌린 매력은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합리한 오늘이다. 길에서 길을 먹고 길을 토해내면 기다란 황토길이 릉선을 핥으며 나를 손짓한다. 도취된 심경을 이래도 승인하지 못하시겠는가?

어리석은자는 길을 두고 모로 간다. 얼마나 생동한 철학인가? 길에 한번 잘못 들어서면 한생을 망친다. 길을 제대로 올곧게 걸으니 힘든줄 모르고 내처 행선지를 줄이게 된다. 길이 나를 요귀처럼 간사하게 혹하고 꽃뱀처럼 탈피를 벗어준다. 나 또한 길에 홀려 광분하고 만끽한다. 쌍방은 목적을 달성하려 미친듯이 날뛴다. 살인마가 피 흐르는 입에 칼을 물고 덤벼들듯이 아주 혈안이 된채 길에 늘어서 매일 길을 혹애하고 길에 진땀을 뭉갠다. 자연히 정이 깊어가고 꿈이 발랄하고있다. 그래서 길이 집으로 통하고 길을 뜻으로 모신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후에 남을 다스림을 이르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예전에 미처 깨도가 되지 않아 나를 속이고 남을 훈계했다. 엉터리 작법인데도 말이다. 또는 내 시처위가 볼품 없었는데 젠체했다. 코방귀는 불문률의 조목이였다. 수긍과 수납엔 궁합의 공동분모가 있을리 만무했다. 알고보니 수기치인은 위정자들만 구비해야 할 덕목이 아니렸다. 또한 유학이 실현하고저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만도 아니다. 길을 발로 재이면서 점차 맘의 지평선에 길의 날개를 달아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길은 성수나서 주인과 더불어 한뉘 탐탁한 도보환경을 서비스로 깎듯이 제공할것이다. 한편 그래야 내가 세상을 살면서 사념을 찾는 과정이자 길을 찾는 질서임을 절감할것이다.

걸음마를 떼서부터 누구나 다 길을 걷는다. 그러나 걷는 행동거지, 속도, 방향, 호흡, 목적지가 다르다. 보다 활성적이고 참된 인생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부단히 길을 개척한다. 그러므로 당사자는 실현성으로부터 존재성으로 탈바꿈한다. 관념성과 현실성의 차이는 한보이다. 말하고 행동하는 순수동물로부터 고민하고 해결하는 고급령물로 승격한다. 언젠가 맘의 혼솔기로부터 측량의 자대를 부적처럼 지녔다. 그러면서도 나와 주변의 인물들이 충돌하는 감에 놀랐다. 당혹했다. 후에는 자연스럽게 받아졌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십인십색이다. 그러기에 가는 길도 서로 달랐다. 제 각기 달라서 말과 행동이 일치성을 가질수 없다는것이 인생길임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걸으며 우리는 공동언어, 공동목표를 누린다. 인간의 기적이다. 인젠부터 비슷한 다수의 공통된 발상을 기대한다. 내 길의 광폭이 넓어진다. 하물며 다 같이 길을 가며 다 같이 뜻을 줏고 모으는 노력이 지향이다. 생각이 진리가 되는 세상임에랴.···

길이 싫은 길이 있었다. 아무리 길에 혹한들 과연 그런 거부감은 꽤 지루하게 나를 칭칭 동였다. 엄친시하(严亲侍下)란 엄한 어버이를 모시는 그아래라는 뜻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모시고있는 처지를 이르는 말이다. 그무렵엔 매일이다싶이 두문불출했다. 길이 있어도 걷지 않았고 갈 곳이 많아도 일절 눌러앉았다. 발가락이 쑤셔났고 발바닥이 근질거렸다. 참았다. 무좀이 생겨도 치료하지 않았다. 편모슬하에서도 메갓을 곧잘 찾던 일상이 정강말을 자주 타지 않았다.

기왕 내친바엔 인젠 모험 도박처럼 이색적인 길을 선택하려 서두른다. 변태나 탈선이 아니다. 보다 종합적인 루트의 주소를 찾으려 손오공처럼 곧잘 손채양을 해댄것이다. 낯선 길을 헤매는 즐거움 역시 탐구분야의 범주가 아니랴싶어진다. 그러다보니 싱숭생숭해 부처님을 뵙던 아령칙한 기억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노릴따름이다. 관형사이자 접두사인 <<-첫>>을 중략하겠다. <<처음>>의 명사인 <<초>>도 삭제하련다. 두시간 강의, 두번째 게임, 두차례 데이트, 두세번 체험… 신드롬이 쇄도했었다. 몇줄 안될 공중여론의 트위터도 무시하련다. 레임덕(lame duck)의 궁지에 몰리지언정 선택한바는 내처 추진할 야망이 꼼틀거릴따름이다. 캐리커처(caricature)의 꼼수라고 해도 당분간은 마이동풍일줄로 알면 족하리라.

만사는 궁금증이 유발돼 설렘과 두려움으로 작동된다. 가슴의 비밀은 투명과 혼탁과 미증유로 집결됐다. 여러갈래 길이 한데 운집한지라 아직은 출발점과 코스가 갈피 잡히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길은 생소하다. 넘어지고 살갗을 벗길 우려가 없지 않다. 또는 사득판이나 함정의 길에 들어설가봐 불안하기도 하다. 허나 낯선 길이기에 내 발부리가 길목을 노크함을 누구보다도 난 잘 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했다. 제발 이런 시탐으로도 행운을 건질수 있기를 원한다. 길도 같이 동행하노라면 날 잘 알거라고 믿어주련다. 공포의 질식보다는 황홀함으로 여유를 달래야 하기때문이렷다.

내 길을 립체감으로 포갠것도 일종 비밀이고 창의이고 도전이다. 교차로가 번잡하고 차원이 다각적이고 사통팔달하니 말이다. 삶의 냄새가 그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와 훗훗한 숨결을 전해준다. 생활의 절주야말로 운동의 실체다. 돌아가는 세상에서 길도 굽이를 돌고 보행자도 고패를 돈다. 지구는 태양을 에워싸고 돌고 나는 님이라는 축을 둘러싸고 회전한다. 그래서 둥근 원이 그토록 각광을 받는다. 길도 점차 길둥근 반호를 그리며 포물선을 짙게 던지는 중이다. 그 진행중에는 필경 신기한 비경이 숨어 있는줄 안다.

생명의 신비가 잠든 레벨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몸의 지혜를 활용함이 우선이라는 제기법이 나돌고있다. 왜냐하면 삶의 신비는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육체에서는 거부할수 없는 진실을 매장했기때문이다. 내 몸이 길에 나선 이상 신체의 부위마다 병풍 같은 환벽(环璧)의 옹위를 받으며 길과 나란히 병행하면서 정진을 거듭하련다. 세포들은 수백만년 동안 우리보다 월등한 생각을 해내고있단다. 사실상 인간의 대뇌에서 나오는것보다 오래된 세포들의 지혜를 통해, 세포들보다 오래된 유일한 존재인 우주의 속성을 가장 잘 리해할수 있다. 아마 우주는 우리보다 훨씬 진보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다면 그 우주에 갇힌 길이나 나의 존재실감도 역시 앞선 초월로 리드하고 멘토링(mentoring)을 행함이 당연할게 아닌가?!

한번 빠지니 들어갈수록 더 멀어지고 걸어갈수록 더 맛이 난다. 환부작신(换腐作新)도 완전히 가능하다. 하여 길에 빠진 길도 봄엔 향기를 풍기고 여름엔 질척거리다가 가을엔 그 우로 황금수레가 굴러가고 겨울엔 하얀 산토끼가 깡충깡충 춤을 춘다. 잃었다가 주었고 여러갈래를 하나로 통합해 실팍하게 꽜다. 인젠 그 곬에 깊숙이 심어지는가보다. 길에서 느낀 멋이란 대개 자아를 완성하고 타인과 통합하고 뭉치는 락취일것이다. 재수 좋은 날엔 꽃의 감상을 공유하고 모시범나비가 꼬리 치는 언덕에서 피리 불면서 자축할수도 있을거라고 만복감을 달린다. 허루한 단칸 오두막 봉노방에서 호롱불을 켜들었다. 조롱박잔을 잡은 신랑신부의 교배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만년커플로 가시화할 욕심을 상기시키고싶다.

출입이 통제될수 없는 자유의 길에 들어서니 푹- 시름 놓인다. 만사를 잊고 범사를 걱정할 판이다. 문득 성구 하나 떠오른다. 사가망처(徙家忘妻)이다. 이사를 갈 때 안해를 잊고 두고 간다는 뜻으로 무엇을 잘 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 자신이 그런 경황 없는 미혹에 잠겼음을 고백하련다. 내가 고작 이 순위라면 길에 빠진 길의 미혹은 또 얼마나 처절하랴싶다. 빠진바엔 차라리 새와 꽃과 벌과 나비와 구름과 바람과 향기와 이슬과 안개와 그리고 또 도마뱀과 모기와 개미와 버마재비와 메뚜기와 베짱이와 잠자리와 온갖 벌레와 녹아내리고 엉켜 붙으련다. 어느 시대에도 귀공들은 현실화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런 나를 경질과 승진으로 데려가는 세월이 고맙다. 감사하다.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