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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의 미학

□ 최균선

  • 2017-02-23 13:49:33
생명체로서의 인간에게 가장 불가극복은 무엇이냐? 곧 “수요”라고 단언하고싶다. 고자의 말처럼 “식색성(食色性)”과 사회성수요(영욕(荣辱)가 인간의 생명욕구의 기본동력이요 인생의 전부의 내함인즉 수요충족이기때문이다. 수요와 욕망은 다 심리선상에 있으나 수요는 생존의 기본조건이고 욕망은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이다.
생명은 일정한 물질조건을 갈구한다. 수요한다는것, 그것은 바로 존재함의 체현이다. 닭알은 생명-한마리의 병아리를 잉태하고있다. 그것은 미지일지라도 미쁜 기다림이다. 모든 생닭알은 꿈을 꾼다. 모든 화초는 해볕과 수분을 먹고 꽃을 피운다. 그런데 생명은 원래 단순한데 인간심사는 왜 그리도 복잡다단한가? 근원은 생명자체의 수요를 벗어난 과욕을 한데 섞어버렸고 탐욕은 수요의 한계를 벗어나 무지경이 되였기때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큰 집이 있다해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자뿐이요, 좋은 논밭이 만경이 있어도 하루 먹는 식량은 두되뿐이다.”라고 했다. 설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갑부이고 전 지구촌에서 가장 고귀한 권세자라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녀인을 만날수 있고 오르지 못할 고봉이 있으며 루만금을 주고라도 사고싶은 물건을 그 주인이 한사코 팔지 않을수 있으니 욕망 그 자체는 만능이 아닌것이다.
대저, 수요밖의 바람을 과욕이라 한다. 자연수요를 벗어난 물욕은 생명자체가 가지고 나온것이 아니라 사회자극, 서로간의 비교가 낳은것이다. 기실 물욕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생명자체의 쾌락보다 얕고 협착하며 정신적쾌락보다 훨씬 아래이다. 인생의 많은 고통은 자연수요이상의 욕망의 악과이다.《회남왕성(淮南王书)》에 “全 性保真,不以物累形”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너의 완정하고 진실된 생명상태를 보존해야지 물욕으로 그것을 손상주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이는 장자의 사상으로서 그는 만약 물질속에 자아를 상실한다면 본성을 세속에서 상실하는것이며 곧 거꾸로 된 사람(丧已于物,失性于俗者,谓之倒置之民)이라고 하였다. 무엇이 전도되였는가? 현대말로 가치관이 전도되였다. 무엇을 가진다는것은 바로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것이다. 이는 심오한 도리가 아니다.
수요에 의해 가진것이라도 도리어 심리상에서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주객이 전도됨으로서 자신이 되려 소유물로 되는 경우가 있다. 많이 가진것이 떼복이고 과시이고 자랑이겠지만 그만큼 얽히게 되는 측면도 가지고있다. 소유욕은 리해와 정비례된다고 한다. 이 말은 확실히 오묘하다. 나름대로 크게 버리는 사람이 크게 얻는다는 누구나 다 아는 도리를 달리 말한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진짜 잃고나서야 더없이 소중함을 알게 되는것이 청춘, 건강, 사랑, 생명이다. 한마디로 자유가 곧 그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수요의 저너머에 있는 하늘보다 더 넓다는 인간의 흉금때문인지 욕망은 깊이도 끝도 없는 우주보다 더 넓다. 사회에 류행되는 인생의 최고경계는 정말 군침을 흘리게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로임, 영국식주택, 스웨덴 휴대폰, 스 위스 시계,한국 안해, 일본 애첩, 타이 안마사, 독일제 호화차, 미국 비행기, 프랑스 와인, 오스트랄리아 물고기, 꾸바 려송연, 이딸리아 구두, 스페인 녀자와 놀기, 오지리 가극, 로씨야식별장, 필리핀 하녀, 이스라엘 경호원, 토이기 사우나, 높은 관리… 만약 마지막 소원을 이룬다면 앞에 수많은 욕망들이 호박이 넝쿨채 굴러들듯 할것이다…
욕망은 무어나 최신식, 최고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 모든 최고의 실용가치가 무지경인것이 아니다. 례하여 고급휴대폰의 70% 공능은 무용하며 고급 하이야의 70% 속도는 무용하며 궁궐 같은 호화별장의 70% 방이 그저 비여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더 넓고 더 호화로운 사무실과 어마어마하게 큰 사무상과 여러가지 장식품이나 화분통을 늘여놓아야 더 위엄이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풍조이며 개인도 더 넒은 집과 더 많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갖추기를 바란다.
곰곰히 생각해 볼것도 없이 그 모든 최고급의 사치품이나 소지품의 구매는 욕망의 큰입을 만족시킬뿐이지 행복의 고대광실에 들어서게 하는것은 아니다. 고차원의 물건들을 늘여놓은 구석구석에 작은 령혼들이 쪼크리고있다.
탐욕스러운자가 부자가 되였더라도 정신빈곤자가 많으며 수요의 충족을 아는자는 가난해도 마음은 부자인 사람이 많다. 높이 앉아있어 평안한듯 보여도 마음은 시종여일 불안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도 보기에는 민망할수 있지만 마음은 여유로울수 있다. 이것이 인생현장이고 그속에서 사는 우리 인간군이다.
그런데 욕망에는 왜 한계가 그어지지 않는가? 인간의 욕심은 길고 아름찬 구렝이로는 너무 부족해 코끼리를 삼키려 한다. 한마리도 아닌 무수한 코끼리를… 그러면서도 아이로니하게 돼지를 욕한다. 그 모든 유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면 참을수 없는 기갈과 빈곤의 처절함과 적막의 고험과 실패의 참담함, 낭떠러지에 다가선 아슬함… 등 일패도지를 면할수 있으련만 결국 자신이 자기에게 패하고 만다. 그러는것은 마치 실탄한 여러자루의 총을 두고도 빈총만 들고 쏘는 우직함과 다를배없다.
오색잡다한 유혹의 세계, 주머니사정이 어려울 때 일확천금이 유혹이고 적막할 때 주색잡기가 유혹이며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포기가 유혹이다. 아무도 세계의 풍경을 다 볼수는 없다. 욕망을 멀리하고 수요에 따라 살면 구수한 흙냄새와 분방한 꽃의 향기를 맡을수 있으며 과일의 달콤함을 느낄수 있다. 저차원의 생활안배는 당신의 공간을 압축하지 않는것을 말하며 생활의 질량을 낮추는것을 말한다.
선택의 자유권에서 욕망이 무한정 부풀고 확장되는 이 세계에서 분별력과 버릴줄 아는 사람이 기실 행복을 만들줄 아는 사람이다. 욕망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자기를 잃지 않을수 있으며 “버들숲지나 또 새마을이 나타날수 있다.” 산꽃은 창턱에 화려한 화분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산뜻한 잔디밭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청산에 록수는 편안한 늪에 갇히기를 바라지 않기에 창창한 바다의 품에 안길수 있다.
“새는 나무우에서 산다. 그것도 낮은것을 두려워하여 우듬지에서 산다. 그럼에도 먹이에 속히여 그물에 걸린다.” 우리가 추구를 낮추고 몸을 낮춘다면, 요구를 낮추고 공간을 더 좁힌다면 이런 자원랑비가 필연코 줄어들련만. 물질요구는 낮게, 적게, 정신적요구는 더 높게, 더 넓게 한다면 자족은 곧 찾아올것이요, 행복은 더 가까이 다가올것이다. 결국 자기생명수요의 조절문제이다.
당신이 자기 생명을 지배한다거나 당신의 생명이 당신을 운전한다고 할 때, 당신의 마음속에는 누가 운전수이고 누가 손님이라는것이 명백하다. 욕심을 조절할줄 안다면 넘칠 일이 없을것이고 넘치지 않으면 온정할것이고 온당하면 유유자적할수 있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자신의 인간상이 잘 그려져있다. 인생현장은 늘 안개가 자오록한 수면 같지만 꿰뚫어보는 뭇눈길들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무형의 속박이라 한다. 그런 속박감이 우리를 방종에서 격리시키는 금지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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