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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좋은 인생만들기

□박군산

  • 2017-03-02 14:34:05
한국에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어딘가 몸도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이웃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친척친우들과 회포를 나누며 오래간만에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것 같아서 퍼그나 좋았다. 와중에 고생은 많았겠지만 참 보기가 좋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응원의 메세지가 되여 지지리도 못났던 내 어깨우에 주렁주렁 열리고 그 다리로 일하느니 얼마나 힘들었겠냐는 물음표가 걱정 반, 동정 반의 애틋함을 품고 내 가슴을 훈훈하게 덮혀주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맨몸 하나를 믿고 한국로무현장을 다녀왔다기에 보는이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경한 지체장애인이였다. 그래서 더구나 일을 해냈다는것만으로도 단순히 돈이 아닌 한결 색다른 맛의 금의환향을 한것 같았다.

내가 문득 꿈에도 없었던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것은 어떤 운명적인 절박함때문이였다. 한국에 갔던 아버지께서 암수술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뒤통수라도 한대 얻어맞은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환갑년을 훨씬 넘긴 아버지께서 당신 몸이 병든줄도 모르고 그렇게 힘들다는 한국노가다현장에서 일을 해왔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벌려고 했던 리유가 무었이겠는가! 자식으로서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초라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외의 사고로 장애인의 삶을 시작한 나에게 세상은 더없이 랭정하고 가혹한 현실로 다가왔었다. 다년간 해오던 신발수선이나 열쇠, 자전거수리를 연길에 가서 하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것 같았으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도 않았다. 물론 가계를 운영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던것 같았다. 우후죽순처럼 일떠서는 아파트따위는 꿈도 못 꾸며 오히려 헛고생만 하는게 아닌지, 긴가민가하던 나는 급기야 마음의 방향판을 비틀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치면 백프로 회사취직까지 책임져준다는 컴퓨터학원과 애니메이션학원에서 전문지식을 공부했다. 서른을 넘긴 늦깍이학생이였지만 몇개월의 수료과정을 마치면 꿈속에서도 그리던 회사를 다닌다는것이 얼마나 큰 환상이였던지! 졸업이 다가올수록 환상은 더해져만 갔다. 내 머리속에 자주 들락거리던 장애인이라는 이름표가 취직에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될지는 감감 모르고있는채.

려행용가방이 터지도록 짐을 챙겨 찾아간 회사에서 나는 번번히 한달을 버티지 못했다. 오히려 들고간 무거운 짐속에 시름까지 더 꾸겨넣고 집으로 돌아왔야 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한심하고 안타까왔으랴. 어쩌면 이 못난 자식은 언녕 아버지의 가슴속에서 암덩어리로 자라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더이상 장애인이란 이름으로 부모님의 그늘밑에서 살아갈 리유도 없었으며 안된다는 부정의 벽을 허물고 사고를 당하기전의 겁기없이 천진란만하기만 했던 내 소년의 손을 꼭 잡고 세상밖으로 뛰쳐나올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낱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한국나들이를 잘 준비해서 비행기에 몸을 실은 마음은 전쟁판에 나가는 심정처럼 무거웠었다.

슬픈 추억이 곱게 익어가던 어느날, 나는 종이컵전문제조회사에 면접보러 갔었다. 생각과는 달리 사무실아가씨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부장님은 참 좋은 사람 같았다. 나이와 이름을 물어보고는 회사의 규칙이나 복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나서 회사용역으로 두달간 일하다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내 말에 퍼그나 반가와하는 눈치였다. 이때라고 생각한 나는 다리가 조금 불편한 사람이지만 열심히 할테니 잘 부탁한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내 겉모습만 보고 마음이 확 동했는지 부장님은 사장님과 상의해봐야 한다며 묘하게 얼굴색을 바꾸었다. 나중에는 먼저 열흘동안만 아르바이트를 하고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지만 나는 개의치를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두려워하거나 주눅이 들어서는 안된다. 일단은 마음에 상처가 되고 부담이 될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극복해나갈수 있는 용기면 부끄럼없이 당당한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 내 숙소에 옷장을 넣어주고 주말이면 턴넬까지 직접 차를 운전해 데려다주던 부장님이 슬슬 로동계약에 대해 뜻을 내비치는것을 보면서 나는 내 몸값도 어지간히 올라가 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특히 내가 손해를 보는 낮은 월급제를 시급제로 조정할수 있었던것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여주었다.

철컹철컹, 쉬임없이 돌아가는 기계동음은 굴러가는 렬차바퀴소리에 점철되여 끝없이 들려왔다. 어쩌면 밤낮이 따로없이 살아가는 재한조선족동포들의 하나와 같은 꿈을 싣고 고향으로 가는 렬차에 앉은 기분이였다. 땀으로 얼룩진 일상은 그야말로 일하는게 아니라 버틴다는 맞는 말이 더 어울릴것이다. 촘촘히 들어앉은 기계마다에 점심시간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종이를 올리고나면 팔다리가 쑤시고 아픈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일상이라고 생각했더니 훨씬 큰 위안이 되였다. 그러나 육신이 나른한 하루일을 마치고나서 씻고 자리에 누우면 공장안에서 쏟아지던 졸음은 다 어디로 도망가버렸는지? 래일도 일해야지, 일해야지 하며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고 다시 이튿날아침이면 알람벨소리에 맞춰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먹으면 또 그 질리도록 낮익은 하루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지막 하루처럼 생각하고 공장에 들어서면 오히려 기계가 되여 돌아가는 내 몸이 신비로울 정도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곳은 다들 종이컵제조라고 해서 쉽게 생각해 찾아왔다가도 작업현장이 너무 덥고 잔걸음이 많아서 힘들다며 외국인들도 꺼리는 회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회사에서라도 일할수가 있다는것이 너무나 감사했고 건강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자신이 장애인이라는것을 감감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인생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진리의 참뜻을 깨우쳐가고있었다. 못난 사람보다 잘난 사람이 되려하고 실패보다는 성공을 노리는, 너도나도 욕심내는 랭정하고도 치렬한 생존환경속에서도 차례진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를 느끼면서 살아가야 했던것이다.

훌쩍 높아진 가을하늘아래에 유난히도 덥고 비도 많았던 지난 여름을 떠올리면서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은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저 들판의 생명체들도 가녀린 이파리에 푸른 꿈을 싣고 한없이 아프도록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이 순간순간을 이기여내면 분명 가을이 올것임을 믿어의심하지 않았을것이다.

인생 역시도 마음의 언덕우에 긍정을 심어 나름대로의 맛과 향기를 가지는게 아닌가 싶다. 내가 장애인이라서거나 내가 어떠어떠해서라는 변명을 늘여놓는것은 한낱 자기 자신을 가두어 고립시키는 울타리를 만드는 어리석음이나 다름없다. 보다 넓은 가슴을 열고 력동하는 세상의 눈높이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인생은 보다 먹음직스럽고 풍요로운 열매로 주렁질것이다.

이 순간, 한결 가벼워진 내 마음은 또 다른 삶의 자신감으로 파아랗게 나붓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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