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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네 늪을 읽어보다

□ 최룡관

  • 2017-05-11 14:46:00
덴마크에 있는 나의 딸 연이네 집앞에는 늪이 있다. 너비가 50메터좌우 되고 길이가 100메터 됨직한 늪인데 바로 그 늪으로부터 10여메터 떨어진 곳에 딸집이 있었다. 그림이라고 하자니 그림보다 아름답고 책이라고 하자니 책보다 많은 사연이 적혀있는 같았으며 보물이라고 하자니 보물보다 귀한것이 많은것 같아서 나 역시 어느새 정이 들었다.

늪의 오른쪽 기슭에는 커피색머리를 한광주리나 떠인 총각나무가 서있다. 총각은 늪 건너를 응시하고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그가 서있는 대안에 금방 목욕을 하고 나온 하얀 몸매의 봇나무 두그루가 머리발을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드리우고 서있다. 총각은 바로 그 녀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있다. 나는 나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아직 그 총각과 이름이 뭐냐고 묻지 못했다. 늪둘레에는 한쌍의 처녀와 총각이 있을뿐만아니라 버드나무아저씨도 있고 헤아릴수 없이 많은 팔들을 하늘로 치켜들고 서있는 이름 모를 나무할아버지들도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파아란 주단을 깔아놓은듯한 잔디밭이다. 나는 얼결에 “님과 함께"라는 코노래가 나간다.

저 푸른 초원우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싶어

봄이면 씨앗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여

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류행따라 사는것도 제멋이지만

반디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아니, 내가 아니라 목석이 와서 이 늪을 보아도 이렇게 흥얼거릴것이다.

나는 이 이름도 없는 늪을 “연이네 늪”이라 부르고싶다. 물을것도 없다. 늪은 연이네 집앞에 있으니까.

연이네 늪은 사랑이 데이트하는 곳이다. 야생오리들이 쌍을 지어 날아온다. 이따금 갈매기들도 쌍을 지어 날아온다. 암컷과 수컷. 수컷은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암컷은 조르르 수컷을 따른다. 언제 만날지 기약도 없이 더벅머리총각은 멍청하게 처녀를 바라보고만 섰다. 등 돌린 처녀 둘은 부끄러워 감히 몸을 돌리지 못하고 금방 분통에서 나온듯한 하얀 몸을 머리채로 가리고있다. 그외에도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들이 늪과 조용히 교감하고있다.

연이네 늪은 작아도 허구 많은것들을 품고 산다. 두리의 나무며 강이며 집이며를 품고있을뿐만아니라 하늘의 바람과 구름과 해와 달 그리고 무수한 별들을 품고 산다. 그 모든 생명들을 품고있으면서 연이네 늪은 잔소리 한마디 없다. 하늘이 흐리거나 밤이 되면 늪이 품었던 생명체들이 다 멀리로 간것 같지만 연이네 늪은 그 모든것들을 하나도 보내지 않고있다. 바람과 구름과 해와 달 별들의 다정한 집이 연이네 늪이다. 하늘의 이러한 생명체들은 때론 집을 떠난것 같지만 때가 되면 다시 돌아와 늪의 품에 안겨 소곤거리기도 하고 새근새근 달콤한 잠을 자기도 한다. 오붓하고 앙증스럽고 아늑한 집을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랴. 모이면 한없이 화목하고 떠나면 하 그리운 집을 누군들 다시 오려하지 않으랴. 그래서 연이네 늪은 물밑에도 하늘이 있고 물우에도 하늘이 있어 마냥 하늘과 함께 살아가고있는것이 아니랴.

연이네 늪은 장백산의 천지에 비할만한 장려함과 웅위로움과 숭고함과 신비한것은 없다. 강남의 호한한 태호에 비길만한 그런 무한함도 물론 없고, 서호처럼 황홀한 풍경도 없지만 연이네 늪은 한없이 매혹적이고 한없이 인자하고 한없이 살뜰하다.

연이네 늪은 “ㄷ”자형이다. 《새국어사전》을 보면 “ㄷ”자계렬의 단어가 381쪽부터 522쪽까지 어우러져있는데 “ㄷ”와 모든 모음이 어울리여 세상만사를 이야기하고있다. “ㄷ”와 모음 “ㅏ”가 어울리는것만 하여도 그 함의가 헤아릴수 없이 다양하다. 다 하면 오늘의 시대를 말하는 다국제국주의, 다국부대, 다민족국가, 다문화가정과 같은 싱싱한 내용들을 나타내는 개념들이 떠오른다. 또 그런가 하면 인류의 대가들인 다윈, 다빈치도 떠오른다. 다! 현대의 철학과 문학을 대변하는 질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향체도 있다. 다! 입맛을 돋구는 조미료 다시마, 다! 창고로 쓰는 다락, 다! 다락밭, 다! 다각사랑… 하하 많기도 하다.

해빛이 쨍 하고 비추면 연이네 늪 저쪽에서 물이 하얀 머리들을 송송 내밀며 쏠라닥거리다도 미풍이 살랑거리면 잔잔한 물주름을 느리기도 한다. 그 물주름을 다리미질하여 반듯하게 펴는 고즈넉함은 또 흔상해볼만한 일품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살얼음이 살짝 간 물우로 눈이 내린다. 뒤에 오는 눈송이들은 이미 내린 눈들에게 소리친다. 얘들아 어깨를 세워 내가 간다. 우리도 자리를 잡아야지. 그러면 먼저 내린 눈들이 어깨를 치키느라고 모지름을 쓴다. 드디여 눈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하얀 눈의 세계, 티끌 한알도 묻지 않은 순하디 순한 세계가 연이네 늪에 새로이 탄생한다. 한해에 한두번 태여나는 새 세상이란다. 이 은은한 새세계를 하얀 백지라고 하자. 시인이 달려와서 시를 쓰려다 얼떠름해 서있는다. 화가가 달려와서 그림을 그리려다 얼떠름해 서있는다. 설계사가 달려와서 설계도를 그리려다 얼떠름해 서있는다. 너무도 깨끗하고 순해서 눈이 시리다. 감히 필끝으로 오물을 떨어뜨릴수 없다.

연이네 늪 주위에는 우물 정자 같은 길이 있다. 이 길은 경도와 위도처럼 온세상과 통한다. 연이네 늪은 길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함께 어우러져 외로운것 같아도 외롭지 않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하냥 손을 잡고 있으므로 연이네 늪의 사전에는 고독이라는 낱말이 적혀있지 않다. 그래서 그리우면서도 그립지 않는 연이네 늪이다.

연이네 늪이 세상과 대화하는 언어가 바로 이 길이 아니랴!

2017년 2월 텐마크 홀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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