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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부치는 편지

□ 최균선

  • 2017-06-29 15:03:15
무정세월 약류파(若流波)라 늙음도 잠간새 오는 듯, 리조 때 신계영 할배의 시조 <탄로가>를 곱씹으면 새삼스레 만단회포가 가슴에 그들먹해진다.

‘아해 제 늘그니 보고 백발(白髮)을 비웃더니/ 그 더듸 아해들이 날 우슬줄 어이 알리/ 아해야 하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해로다.’

시조에서는 철없는 아이와 서정적 자아로서의 늙은 ‘나’를 설정하여 아이가 늙은 이의 백발을 비웃지만 자신의 체험으로 볼 때 순식간에 자신도 늙어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경험론을 아이에게 깨우쳐주는 형식으로 되여있다. 표면적으로 아이를 교시 하는 말투로 읊고 있지만 독자들이 제 일처럼 받아들여지니 동병상련이런가,

세월을 이기는 장수가 없거늘 젊음과 늙음의 확연한 차이를 날로 나날이 절감하면서 ‘범을 잡던’ 당년의 호기는 세월따라 간 곳 없고 남은 것은 쇠잔함 뿐이여서 야금야금 줄어들기만 하는 앞날을 두고 혼자 당혹함을 찧고 까불리다가 추억을 지팽이 삼아 인생의 막바지에서 불타던 석양의 잔광을 바라보면 탄식 뿐이던가? 세상 일이 항상 동일하게 흘러간다는 법은 없다. 환경이 바뀌면 인생자세도 바뀌여지기 마련이다.

‘아이는 아이답게,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늙은이는 늙은이답게…’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사실 늙은이의 ‘매력’은 인생극의 미성에 있지 않을가 싶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온 삶의 내용에서 발산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쨌든 젊어야만 볼 멋이 있고 값이 나간다는 공식이 성립된다면 늙음은 추하다는 의미가 아닐가?

누구든 늙으면 자연히 소외되는 관습이기에 그래서 저저 늙는다는 것이 제일 꺼림직한 일이 될 수밖에 없으렸다. 하지만 ‘젊어보인다’에 목매이지 말고 해묵은 삶이지만 끝까지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발굴하는데 ‘모지름’ 써야 초심을 지켜 젊어사는 인생자세가 아닐가 싶다.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으로 가로막을 수 없지만 세월을 막으려는 의지보다 더 빨리 와버린 늙음에 허탈해지더라도 느낌에 초까지 치지는 말자.

오랜 세월 산전수전, 온갖 풍상고초를 겪으며 속히운 적도 많고 실수한 적도 많은 파란만장한 인생길 굽이굽이를 회억을 앞세우고 휘적휘적 답사하다 보면 뒤죽박죽이 된 인생잡사가 별로 만족스럽지 않을 것은 당연지사, 무엇을 하며 살았든, 무슨 지위에 있었든, 혈기방장하였을 때 늙어서 어찌 될지에 거의 관심없다가 어언간 때가 되고보니 불현 듯 찾아온 듯한 로쇠에 억울한 마음이 겹치기도 하리라.

사람이 늙으면 도로 어린 아이가 된다는 말은 아마도 도로 미숙해진다는 의미인 듯 싶다. 물덤벙 불덤벙하던 아이 때와도 정반대로 소심하고 의심이 많아지고 비관론자가 되여진다. 저도 모르게 자심해지고 마음의 터밭도 좁아지고 대신 그저 살고 있음에 안주하니 비상한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과 충돌이 극렬해진다.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기에 삶에 대한 애착심만 끈끈해질 뿐 모든 욕망의 대상이 멀어지고 그 대신 급선무는 무병장수이다.

나이테가 굵어지는 것에 탄식하고 비통해하고 실망하겠지만 아예 체념해버려야 명지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아니다. 로소를 불문하고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일 수록 갈구는 불타오르고 마침내 탄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성이다. 유지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세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늙음을 재촉하고 그 종점에 사신 이 기다리는 상황을 누군들 홀가분한 마음으로 상상할손가?

스스로 ‘화로근불로, 신로심불로(花老根不老,身老心不老)’를 외워보아도 육신이 늙으니 마음도 자연 좇아 늙어가니 고달프고 반복무상한 인생살이에 무릎을 꺾고 짧은 탄식, 긴 한숨이 절로 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인생경험은 더쌓여 있고 처세술에도 로련하지만 자신심은 메말라서 무슨 일에 부딪치면 두 팔을 걷어부치고 달려들지 못하고 주저주저 주저심만 앞세우게 된다. 그렇게 자기를 부정하는데 차차 습관되면서 체념을 붙안기 십상이다. 장수를 내놓고 죄다 체념해버린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생명은 운동에 있다 할진대 정신기둥이 먼저 무너지고야 생명이 잘 연소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인생경험에도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남을 잘 믿지 않고 제마음처럼 남을 못믿으니 긴가민가 의심병마저 점점 더 깊어가고 따라서 무 열정, 무 흥취, 무 관심이 편견이 이끄는대로 뒤따른다면 절로 자초하는 랑패가 아닐 수 없다.

가난에 부대끼며 근근득실 생계를 도모해오던 그 심리관성에서 돈벌기가 얼마나 어렵고 써버리기는 얼마나 쉬운지를 절감했기에 돈에 관한 한 저도 모르게 린색해지던 심리관성이 그냥 작동하기도 하지만 늘그막에 거개 셈평이 펴인데다가 100세 시대에 살게 되여 ‘장생불로’가 최대의 욕망이라서 잡다한 보건품, 약광고에 각별하여 몸에 좋다면 값 비싼 약이라도 통이 크게 산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이 없 듯이 남에게 좋다고 내 체질에도 맞아서 즉각 효험을 보리라고 믿는 것은 무리이다.

차차차… 나이가 많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늘 추억에 잠겨들고 그 속에서 막연한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늙어간다는 표징이고 갈 수록 못 말리게 떠올려지는 추억이 아리고 쓰리게 새겨지면 이미 폭삭 늙어버렸다는 표지이다. 산이 다가오는 법이 없으니 내가 다가가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은 젊은이들에게만 유익한 계시가 아니다. 각자 생명에 지평이 있지만 생명은 평등하다.

무릇 젊음과 늙음에는 구별이 있지만 생명선 상에서는 점선으로 이어져있다. 젊음과 늙음 사이에 심리장벽이 쌓이지만 스스로 덧벽까지 쌓는다는 것은 자기학대이다.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고 지극한 아픔 마음 속에 (日暮途遠 至痛在心)’ 있나니 묵은 기억을 무찔러버리고 래일 죽을 듯 오늘을 알차게 사는 것이 명지하다. 보내고 곧 맞는 ‘오늘’이란 너무 평범한 날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산봉마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계절, 마음은 저 단풍처럼 붉게 타리라 벼르지만 미구에 불어오는 찬바람에 흩날리는 락엽을 보면 락엽귀근이라는 미쁜 생각도 서글퍼지고 들녘은 황금물결 설레이지만 고개길에 잡풀들은 시들어가고 미구에 백설이 분분 할제 또 한해 끝자락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지? 무엇을 바라고 저문 인생길을 허위단심 걸어야 할지? 자연은 이처럼 엄연한데 늙어진 마음만 정처없더라도 잠간만!

늙는다고 개탄만 하지 말고 그냥 인생의 막바지까지 익어간다고 생각하자! 생명이란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이다.

그냥 살아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몸이 쇠약해졌을 때 강장제를 먹는 것과 같다. 감사하는 마음은 최상의 미덕일 뿐아니라 생명의 나무를 지탱하게 하는 뿌리이다.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늙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인생학교에 급제생이라 할 수 있다. 가르칠 수 없고 배워낼 수 없는 것, 반은 천성이고 반은 자기에 달린 것이 기질이다. 마냥 따스한 가슴을 열고 남을 받아들이지는 못할지언정 남을 해치는 늑대만은 되지 말자. 림종의 착한 유언으로 한생의 유감을 미봉 할 수는 없거늘 살아있을 때 적덕은 못할망정 패덕한 자는 되지 말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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