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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만남

□ 정호원

  • 2017-11-23 16:22:45
한주 시작, 하루 개시는 일상 륜회 같은 거듭이지만 강 건너 얼음처럼 비껴간 불가사의는 별다른 의미로 파생됨은 무엇 때문일가? 멀미 날 지경으로 아물거리는 소복한 추억이 동그마니 봉긋하다. 홀로 바장이는 틈바구니는 아물어버리고 아픔처럼 시린 통증을 눈 속에 묻어놓고 훌- 돌아서면 바람결에 스치는 락엽은 시간의 헛손질과 범벅이 된 것은 내 열반일가? 낯선 강뚝에서 멀거니 별을 쏘는 눈을 들어 처연히 되뇐 대명사는 산소의 숨결만일가? 내처 달려온 외길에 마침표를 물리칠 실타래를 끄집어 더듬거릴 때 왜 잊음을 포기하고 빈 걸상의 먼지를 닦는지 모르겠다. 열린 출입문… 먼지 낀 진렬대… 차단된 층계… 건물구조가 산야에선 아직 오픈 전야이다.

되는대로 긁적거린 메모 구절이다. 락서의 오답이면서도 고백의 정답이다. 아! 회의시간…난 급기야 마우스로 모니터의 문서파일창구를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섰다…

밤, 계속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름 모를 녀인의 프로필이 자꾸 매삼매삼 얼른거린다. 기연미연의 갈림길에서 꿈속처럼 만난 몽롱한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마녀와 요정으로 빗대고 면박주고 싶지 않다…

그녀와의 로맨틱한 첫 미팅은 2009년 12월 26일 토요일, 신화서점에서 이뤄졌다. 마치 낯익은 녀독자처럼 문득 만났다. 먼저 그녀가 도전했다. 아니 수줍게 인사를 건네왔다.

“선생님, 미안하지만 볼펜을 좀…”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그녀는 수집음을 타면서 내 포켓을 가리킨다. 갸름한 몸매에 머루알 같은 눈동자가 탈쇄했다는 선입견을 강하게 던져온다. 나는 웃옷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선선히 줬다. 그리고는 매장에서 계속 책을 뒤졌다. 한참 후 그녀는 정면으로 마주서 볼펜을 내밀며 인사를 한다.

“감사해요. 잘 썼어요.”

그제야 난 화제의 인물을 맞바로 봤다. 한편 일거일동을 주목했다. 그녀는 노트에 뭔가를 메모한 모양이다. 볼펜을 건네고 나서는 노트를 접어 핸드빽에 넣으면서 방그레 웃는다. 오뚝 솟은 코마루에 살짝 드러난 덧이가 개성적인 타입을 암시한다. 수박색 줄무늬가 간 맥시코트 차림이 약간 인상적이였다.

그로부터 두주일 후 난 종전 대로 또 서점을 향했다. 년월일은 2010년 1월 9일. 역시 토요일이다. 한창 진렬대를 돌면서 신간도서정보를 살피는데 웬 인기척에 흠칫 놀랐다.

(아, 전번에 만났던 녀인?! 또 두번 다시 상봉할 줄이야… 하다면 서점은 울 둘의 데이트아지트인가? 밀회마당인가?···)

느닷없는 재회에 착악을 금치 못했다. 보아하니 두번째 만남엔 커피색 투피스를 입었다. 겉옷은 신체의 가장 외부에 착용하기 때문에 보건위생상의 기능과 함께 장식성 및 내구성이 요구된다. 여름의 경우 녀자에게는 블라우스와 스커트, 남자에게는 와이샤쯔와 바지 등이 일반적이고 간단한 겉옷이다. 이 밖에 녀자에게는 원피스, 투피스, 슈트, 원피스와 카디건의 앙상블 등이고 남자에게서는 신사복이 일반적인 겉옷이다. 하다면 그녀는 신사숙녀를 떠올리는 타입인가? 난 부지중 왼데로 사유를 몰고 갔다. 한겨울인데도 성하의 계절을 떠올리니 말이다. 허나 반가운지 우연인지를 확인할 새 없이 맞다닥뜨렸다.

“선생님, 오늘 볼펜은?…”

그녀는 책가게를 돌다가 갑자기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적바림할 일이 있는데 볼펜을 갖고 오지 않았다면서 볼펜을 빌려주겠느냐 하는 청구를 생략해 물었다. 아마 나와는 인젠 구면이여 허물없이 접촉하는가보다. 핑게인지 리유인지를 따지는 게 내 몫이 아니다.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 까짓 볼펜이 한사람을 비난할 구실로는 미비하다. 내가 망설일 때다. 그녀는 내 포켓을 턱짓하면서 독촉한다.

“펜이 보이지 않네요. 오늘은…”

내려다보니 포켓은 비였다. 그제야 난 양복 안주머니에 볼펜을 꽂은 사실을 거니챘다.

나는 인차 호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웃옷 안주머니에 보라색 볼펜이 꽂혀있었다.

“자- 옜습니다.”

나는 별다른 말이 없이 인차 볼펜을 꺼내 바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쩌면 주말이나 주중에 가끔 약속처럼 만난 련인 사이 같다. 가끔 서점에서 단골로 만나는 사이에서 이런 도움은 미량의 협조가 아닐 수 없다. 다 같은 독자이고 다 같은 취미를 지닌 동사자이지 않는가! 어쩌면 어설픈 지기지우 같지만 말이다. 당초의 이른바 당당하다는 배짱의 전부이다. 한편 이성이라는 한계는 부정하면서도 민감성은 여전했다. 하여 떡심 좋게 사회친구라는 자기위안에 모든 의혹의 가능성을 빙자했다. 까짓 볼펜 하나쯤 빌리는 것은 별개의 방조가 아닐 수 없음에랴…

뭔가 잽싸게 긁적거리던 그녀는 인차 나에게 볼펜을 건네준다. 궁금했다. 하여 왜가리 여울목 넘어다보듯 슬며시 눈빗질했다. 한 손엔 《자기개발을 위한 작전 135가지》, 《마른 생과부, 익은 싱글》, 《지구를 딛고 별을 따는 사람》, 《새벽의 정한》, 《내가 알고 내가 모르는 비결》 등 비즈니스맨에 관련된 신간차트가 쥐여졌고 노트엔 구매할 도서목록이 조목별로 몇권 적혀있었다. 보아하니 아마 사업가나 기업인으로 봐줘도 괜찮겠다는 용단을 내리기 십상이렸다.

그로부터 2년 반이 돼오던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난 자료수집으로 하남가의 한 고서점을 찾았다. 거기에서 또 극적인 상봉을 치를 줄이야…추억의 앨범에 색 바래진 사진처럼 먼지를 들쓰고 있던 그 녀인을 또 만났다. 세번째 만남이다.

(또 볼펜을 빌려달라고 손을 내밀가?…)

허나 나의 로파심은 한참이나 빗나갔다. 이번엔 내 볼펜을 빌려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등진 채 한족업주에게 책 몇꾸레미 처분하는 판이였다. 책이 든 보짐을 저울에 달며 흥정한다. 업주가 전자계산기로 금액을 확인하는 사이 난 인차 돌아서 서점을 나와버렸다.

“아니, 선생님!…”

그제야 등뒤에서 난 인적기를 느낀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소리친다. 난 천천히 돌아섰다. 이때 매대 안쪽으로부터 예닐곱살 되는 녀자애가 달려나왔다.

“엄마, 이 책을 살래!…”

소녀의 손엔 《로빈슨 크루소》가 쥐여져있었다.

“어마나- 네가 글을 쓸 작정이냐? 작가로 되자구?!… 응, 사주마. 낡은 책이구나. 먼지가 텁숙한데…호호… 이 세월에 문학을…”

딸애를 격려하는지 비웃는지 그녀는 혼자 종알거린다. 난 머리가 착잡해졌다. 문학의 가치성과 문학인의 현주소를 동시에 현념한 순간이다. 영국의 작가 디포가 지은 장편소설이 한 녀인에게서 롱담취급을 당함에 대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약한 동정심과 망연한 자비심 그 자체였음이 당연하다겠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평범한 사공이 배가 난파된 뒤 홀로 무인도에 표류하여 갖가지 모험을 겪고 28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결코 허무한 환상만 같지 않다. 1719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300년 가까운 력사가 반디불처럼 아련해보이기는 처음이다.

열심히 독서를 추구하다가 나중엔 그 책을 리콜처럼 반려로 헐가방매하는 판매자가 또 낡은 책을 자식에게 사주는 현실 앞에서 난 어정쩡해졌다. 삽삽한 텁텁이 같기도 하고 온오한 책략가 같기도 한 녀인의 뜬금없는 삶의 좌표를 스쳐본 관찰이다. 직업을 바꾸고 취향을 고치려는 현대인의 처세를 대중없이 일별한 셈이다. 세일과 사재기 그리고 밀수의 륜환이렸다.

그후 다시 그녀를 보지 못했다. 신화서점, 아침시장, 도서관, 고서점, 열람실에서도 더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인터넷 홈쇼핑에서도 구경하지 못했다. 블로그나 카페, 트위터에서도 재회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여직 그녀를 찾고 싶지도 않았음을 문득 발견했다. 우연한 일치로 조우한 공중의 대인관계가 고작임에랴…

아마 우리의 인연수명은 여기까진 듯하다. 이성과 다 같은 애독자라는 이질성과 공동성에 잠시 연분을 거느렸다. 고작 장서가, 독서가라는 호기심이 유발한 전부의 내막이다. 그런데 인간은 때론 예상외의 곤혹에서 직감의 능력을 제공받는다. 그녀는 멜로드라마와 비슷한 일인극을 핍진하게 출연했다. 오락성, 호기심, 통속성이 크다 해도 히트할 것까진 없다. 자체의 선택으로 시처위에 대비해 극본을 완성하는 게 창의가 아니랴! 그런 대중극의 무대에서 인간은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승진계단을 오르고 만다. 혹자는 하차하고 누구는 뒤안길에서 무성의 여유를 향수한다. 비구와 비구니가 커플이고 노새와 버새가 항배라면 비익조나 련리지는 별도의 개념일 줄 안다.

갑자기 로타리의 신호등이 켜졌다. 빨간불이다. 택시 뒤좌석에서 올연독좌한 그녀가 앞을 주시한다. 난 옆눈길로 탑승자를 훔쳐보았다. 한닥락의 짤다랗게 꼰 에피소드를 만들기에만 족했던 적격자인 것 같다. 아니면 그동안의 실적으로라도 능히 세상내용을 야누스 러브스토리로 건지기에 충족했던 여유였나보다. 시한부의 차용물이 된 볼펜을 움켜잡았다. 마우스로 작동돼 급기야 비망록을 타이핑하련다. 결코 한산인의 애용물만 아님을 절감한 지점이다. 세번째 만남은 네번째로 이어질 다음 해후를 옵션하는 왕척직심의 계기로 될 줄 믿었던 탓이다. ‘PR시대’는 아니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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